티비엔(tvN) '혼술남녀' 조연출 고 이한빛 피디(PD)의 어머니 김혜영씨가 18일 낮 서울 프란치스코 교육회관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입장을 밝히고 있다. 고 이한빛 피디는 입사한 지 9개월 만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드라마 <혼술남녀>(티브이엔) 제작팀 신입 조연출이던 이한빛(사망 당시 28살) 피디가 지난해 10월26일 스스로 목숨을 끊은 채 발견됐다. <혼술남녀>가 5.8%의 자체 최고 시청률(닐슨미디어 기준)을 기록하며 인기리에 종영된 바로 다음날이었다. 씨제이이앤엠(CJ E&M) 신입사원으로 입사한 지는 불과 9개월 만이었다. 유서엔 이런 글이 적혀 있었다. “하루에 20시간 넘는 노동을 부과하고, 두세 시간 재운 뒤 다시 현장으로 노동자를 불러내고, 우리가 원하는 결과물을 만들기 위해 이미 지쳐 있는 노동자들을 독촉하고 등 떠밀고. 제가 가장 경멸했던 삶이기에 더 이어가긴 어려웠어요.”
<혼술남녀>는 서울 노량진 학원강사들과 ‘공시생’(공무원 시험 준비생)들의 삶을 통해 청년들의 팍팍한 현실을 다룬 드라마로 호평받았다. 정작 드라마 이면에는 고된 업무와 폭력적인 조직문화 때문에 죽음을 택한 청년 노동자가 있었던 셈이다. 청년유니온,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등 17개 시민사회단체가 모인 ‘<혼술남녀> 신입 조연출 사망사건 대책위원회’(대책위)는 18일 오전 서울 정동 프란치스코 교육회관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씨제이이앤엠에 ‘책임 인정 및 공개사과’, ‘책임자 징계’ 등을 촉구했다.
대책위는 고인이 조연출로 살인적인 업무에 시달렸다고 주장했다. <혼술남녀>는 촬영 초반 사전제작 분량의 완성도가 낮다는 이유로 촬영·조명·장비팀 외주업체가 대거 교체됐고, 초반부를 재촬영했다. 업무량이 폭증할 수밖에 없었다.
특히 신입 피디들의 업무 강도는 더 셌다. 이 피디는 의상, 소품을 챙기거나 현장을 정리하는 등의 역할에 더해 영수증 증빙 등 뒤치다꺼리를 떠맡았다. 이 피디의 휴대전화 발신기록과 촬영 스케줄을 토대로 분석한 결과, <혼술남녀> 촬영이 재개된 지난해 8월27일부터 그가 실종된 10월20일까지 총 55일 가운데 이 피디가 휴식을 한 날은 단 이틀에 불과한 것으로 추정됐다. 이름을 밝히지 말아 달라고 요청한 드라마 스태프는 이날 <한겨레>와 한 통화에서 “집에 거의 들어갈 수 없고 씻지도 못한다. 오늘인지 내일인지 모를 날들이 이어진다”고 말했다.
이 피디는 촬영 기간에 숱한 언어폭력에도 시달렸다고 한다. 그의 녹취록과 메신저 기록을 보면, <혼술남녀>의 선임 피디 등 촬영 관계자들은 고인을 향해 “이한빛 개XX야…”, “진짜 한 대 후려갈길 뻔했다. 퇴사에 대해 고민하고 있으면 지금 나가라” 등의 발언을 한 것으로 나타났다. 회사는 <혼술남녀> 종영 직전 이 피디를 드라마 제작과는 관계없는 기획부서로 발령냈다.
고인의 어머니 김혜영(59)씨는 “회사는 아들이 비정규직을 무시해 팀 내 갈등을 키웠다고 하는데, 평소 사회문제에 관심이 많던 아이가 어떻게 사내 비정규직을 무시할 수 있겠느냐”며 “아들이 취직한 뒤 여러 달치 급여를 세월호 문제 해결을 위한 ‘416연대’, ‘KTX 해고 승무원’ 등의 단체에 기부해왔다”고 말했다.
앞서 회사 차원의 진상조사에 유가족의 참여를 거부한 씨제이이앤엠은 이후 세 차례에 걸친 서면 답변에서 “타 프로그램 대비 근무강도가 특별히 높은 편이 아니었다” “팀 내 갈등이 있었지만 고인의 성격과 근무태만이 문제였다”고 거듭 주장한 것으로 알려졌다. 씨제이이앤엠은 기자회견 뒤 공식입장을 내어 “당사 및 임직원들은 경찰과 공적인 관련 기관 등이 조사에 나선다면 적극 임할 것이며, 조사결과를 수용하고 지적된 문제에 대한 개선방안을 마련하는 등 책임질 것”이라고 밝혔다.
이 피디의 죽음을 계기로 드라마 산업의 열악한 노동환경을 다시 들여다봐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유명 배우들 사이에서는 드라마 계약서를 쓸 때 ‘하루 몇 시간은 잠을 재운다’는 항목을 넣기도 하지만, 일반 스태프들한테는 적용되지 않는다. 어머니 김씨는 “아들은 죽었지만 이 땅의 괜찮은 젊은이들이 또다른 좌절감을 겪고 살아야 하는 현실을 그대로 두면 안 되겠다고 생각해 여기(기자회견)까지 나왔다”고 말했다.
황금비 남지은 기자
withbee@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