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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영영페미’의 탄생…“강남역 10번출구, 우리 삶을 바꿨다”

등록 2017-05-16 18:13수정 2017-05-16 23:15

[강남역 사건 1주기]
1년전 추모현장 ‘포스트잇 수천장’
“나도 언제든 피해자가 될 수 있다”
젊은 여성들 ‘혐오’ 맞서 투쟁 시작

낙태 처벌강화 무산시킨 ‘검은 시위’
촛불집회 땐 혐오발언 사과 끌어내
“두려움이 용기가 됐다” 17일 추모제
지난해 5월 강남역 여성 살인 사건이 벌어진 뒤 첫 주말인 21일 오후 강남역 10번 출구 앞에 모인 시민들이 희생자를 추모하고 있다. 이정아 기자 leej@hani.co.kr
지난해 5월 강남역 여성 살인 사건이 벌어진 뒤 첫 주말인 21일 오후 강남역 10번 출구 앞에 모인 시민들이 희생자를 추모하고 있다. 이정아 기자 leej@hani.co.kr
지난해 5월17일 새벽 서울 강남역 인근 상가 공용화장실에서 흉기에 찔린 스물세살 여성이 숨졌다. 며칠 새 강남역 10번 출구엔 포스트잇 수만장이 붙었다. 많은 젊은 여성들은 늦은 밤 공용화장실 사용이 사건의 원인인 것처럼 호도하는 데 반대했다. 사회에 만연한 여성 멸시와 성차별 등 ‘여성혐오’가 진짜 이유라고 사건 성격을 규정했다. 이들은 ‘강남역 여성 살인 사건’을 계기로 ‘페미니스트’가 됐고, 모임을 만들었고, 행동을 시작했다. 1990년대 등장한 ‘영페미’(young feminist·젊은 페미니스트)에서 따온 ‘영영페미’(‘영페미’보다 더 젊다는 취지의 단어)의 탄생이다. 이들은 ‘나도 언제든 피해자가 될 수 있다’는 자각에서 용기를 냈다고 고백했다.

강남역 10번 출구, 페미니스트로의 전환 대학원생 이다은(26)씨는 “지난해 5월 강남역 추모 현장에 있었던 4시간이 인생을 바꾸어놓았다”고 말했다. 그는 당시 수많은 포스트잇에 적힌 문구와 자유발언을 보며 “‘나 혼자만 그렇게 아팠던 게 아니었구나’라는 걸 발견했다”며 “스스로 검열하는 성격이었는데 돌아오는 길에 묵직함과 뜨거움을 견딜 수 없었다”고 말했다. 이씨는 준비하던 중국 유학을 떠나는 대신 지난 3월 이화여대 여성학과 대학원에 진학했다. 이씨는 “젠더에 ‘까막눈’이었던 1년 전의 제가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일”이라고 했다.

페미니스트 모임 ‘불꽃페미액션’에서 활동하는 대학생 이가현(24)씨는 “사건 전엔 편견이 무서워 ‘페미니스트’라고 말할 수가 없었다. 강남역에서 ‘내가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다’고 자각하게 되면서 용기를 얻었다”고 말했다. 강남역 사건을 계기로 활동을 시작한 ‘페미당당’ 소속 직장인 홍승민(25)씨도 비슷하다. 사건 직후 꽃 한 송이 두고 온다는 생각으로 강남역에 갔다가 큰 충격을 받았다. 홍씨는 “추모는 시위보다 문턱이 낮아서 갈 마음을 먹을 수 있었는데, 그곳에서 ‘나는 페미니스트, 행동하는 사람’이라는 자각과 용기가 생겼다”고 말했다. ‘페미당당’은 사건 직후 강남역 주변에서 이 거리에 있는 누구나 피해자가 될 수 있다는 취지로 거울을 든 채 행진하는 ‘거울행동’을 하기도 했다.

낙태죄 처벌 강화 백지화, 집회서 혐오발언 금지 끌어내 이렇게 탄생한 ‘영영페미’들은 지난 1년간 여성 관련 각종 문제에 목소리를 냈다. ‘낙태죄 폐지’를 요구한 ‘검은 시위’가 대표적이다. 지난해 9월 보건복지부가 인공 임신중절 수술을 집도한 의사들의 자격정지 기간을 기존 1개월에서 최대 1년으로 늘린다는 행정규칙 개정안을 입법예고하자 이들은 ‘내 자궁은 나의 것’이라고 외치며 검은 옷을 입고 두 차례 시위를 벌였다. 복지부는 입법예고 한달 만에 이를 백지화했다.

지난해 인공 임신중절 수술을 집도한 의료인에 대한 처벌을 강화하는 정부의 행정규칙 입법예고안에 항의하는 여성들이 ‘낙태죄 폐지’를 요구하며 ‘검은 시위’를 진행했다. 페미당당 제공
지난해 인공 임신중절 수술을 집도한 의료인에 대한 처벌을 강화하는 정부의 행정규칙 입법예고안에 항의하는 여성들이 ‘낙태죄 폐지’를 요구하며 ‘검은 시위’를 진행했다. 페미당당 제공
이들은 탄핵 촛불 정국에서 ‘집회 내 성추행’이나 ‘집회 중 여성비하 발언’ 문제를 수면 위로 끌어올리기도 했다. 이가현씨는 “집회 현장에 늘 있던 여성혐오·성차별적 발언과 행동을 문제로 인식시켰다는 게 가장 큰 성과였다”고 말했다. 디제이디오시(DJ DOC)의 노래 가사는 ‘여혐 논란’ 끝에 본무대에서 불리지 못했다.

지난해 7월 성우 김자연씨가 여성 비하를 ‘미러링’하는 것으로 유명해진 인터넷 커뮤니티 메갈리아 후원 티셔츠를 입었다가 게임회사 넥슨과 계약이 해지되자 이들은 전격적으로 넥슨에 항의하는 시위에 나섰다. 여성의 몸에 대한 속박을 거부하며 ‘천하제일 겨털대회’나 ‘명절 노동 개박살’ 행사를 열었고, 김포공항 청소노동자들이 처우 개선을 요구하며 단식투쟁을 벌이자 ‘여성노동 평가절하를 중단하라’며 연대하기도 했다. 숨가빴던 1년이다.

강남역 사건 이후 등장한 페미니스트 그룹들은 지난 3월 연대체 ‘범페미네트워크’를 발족했다. 범페미네트워크가 주관해 17일 저녁 강남역 인근에서 열리는 1주기 추모제 이름은 ‘우리의 두려움은 용기가 되어 돌아왔다’이다. 박수지 기자 suji@hani.co.kr

지난해 6월 페미니스트 그룹 불꽃페미액션이 서울 중구 태평로 프레스센터 앞에서 가해자 중심적인 언론보도와 사회의 여성혐오 조장에 일조하는 강남역 살인사건 관련 언론보도를 비판하는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김봉규 선임기자 bong9@hani.co.kr
지난해 6월 페미니스트 그룹 불꽃페미액션이 서울 중구 태평로 프레스센터 앞에서 가해자 중심적인 언론보도와 사회의 여성혐오 조장에 일조하는 강남역 살인사건 관련 언론보도를 비판하는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김봉규 선임기자 bong9@hani.co.kr

“여성혐오 범죄” “약자대상 범행” 논란 여전

강남역 여성 살인 사건 이후 1년이 흘렀지만 이 사건이 ‘여성혐오 범죄인가’를 두고 논란이 여전하다.

경찰과 검찰은 사건 발생 직후부터 ‘정신질환자의 묻지마 범죄이지 여성혐오 범죄가 아니다’라는 입장을 유지했다. 법원도 “김씨가 여성을 혐오했다기보다 남성을 무서워해 상대적으로 약자인 여성을 범행 대상으로 삼았다”고 판결문에서 밝혔다.

하지만 여성계는 사건의 맥락에 더 주목해야 한다고 본다. 강남역 사건도 수많은 여성 대상 범죄 중 하나이고, 그런 범죄의 배경에는 구조적인 성차별이나 여성에 대한 멸시, 조롱 등 ‘여성혐오’가 자리잡고 있다는 시각이다. 김민정 전 형사정책연구원 위촉연구원(플로리다주립대 범죄학 박사수료)은 “해당 범죄를 ‘혐오 범죄’로 처벌해달라는 것이 아니라, 그런 범행이 사회적으로 만연한 ‘여성혐오’에서 비롯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장다혜 형사정책연구원 부연구위원은 “스코틀랜드 정부는 ‘여성 대상 폭력이 성차별 구조에서 기인했다’는 판단에 따라 2014년부터 폭력 예방 정책의 일환으로 각종 성평등 정책을 펴고 있다”며 “여성혐오가 만연한 사회를 직시하고 예방책을 수립하는 게 중요하다”고 지적했다.

고한솔 박수지 기자 so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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