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불야학 강학·학강들과 유족들이 5·18 광주민중항쟁 37주년을 앞두고 들불야학의 근거지였던 광주광역시 서구 광천동 광천시민아파트 앞에 함께 섰다. 왼쪽부터 윤태원(윤상원 항쟁지도부 대변인 동생)
▶ ‘임을 위한 행진곡’의 주인공은 윤상원 열사와 박기순 열사입니다. 살았을 때 두 사람이 연인은 아니었으나, 죽은 뒤 영혼결혼식으로 함께했습니다. 그들을 기리며 널리 전파된 노래는 이제 한국 민주주의를 상징하는 곡이 됐습니다. 노랫말엔 등장하지 않지만 ‘노래의 탯줄’이 된 장소가 있습니다. 광천시민아파트는 두 열사가 들불야학 강학으로 활동하며 ‘새날’을 꿈꾼 공간입니다. 앞서간 임들이 삶을 던져 함께했던 사람들이 그 땅에 남아 있습니다. 임들이 떠난 자리에 남은 ‘광주에서 가장 가난한 아파트’가 임들의 기억과 5·18의 상흔을 안고 머지않아 사라집니다. ‘남은 임들을 위한 진혼곡’을 준비했습니다.
윤순호(2기 학강. <투사회보> 제작. YWCA 최후항전 중 체포·고문)
1만여명의 입에서 ‘임’이 불리었다. 광주민주화운동 37돌 기념식에서 ‘임을 위한 행진곡’을 9년 만에 제창하며 오월 광주는 오랜만에 슬픔 없는 눈물을 흘렸다. 문재인 대통령은 ‘임을 위한 행진곡’이 “오월의 피와 혼이 응축된 상징”이라고 했다.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부르는 것은 희생자의 명예를 지키고 민주주의의 역사를 기억하겠다는 것”이라고도 했다. 지난 두 정부에서 정치적 왜곡으로 훼손된 임들의 노래가 역대 최대 규모로 모인 사람들의 제창에 실려 전국으로 퍼졌다. 광주시 서구 광천동의 낮고 낡은 아파트에도 노래는 날아들었을 것이다. 앞서서 나가며 산 자가 따를 길을 낸 임들(윤상원·박기순)이 그 아파트를 중심으로 주민들을 만나고 노동자들과 공부하며 ‘새날’을 꿈꿨다. 들불야학(광주전남 최초의 노동야학)은 그 아파트에서 제작한 <투사회보>를 들고 광주항쟁의 중심으로 뛰어들어 학살과 맞섰다. 광천시민아파트에 쏟아진 5·18의 국가폭력은 아직 마르지 않았다. 판자촌을 철거한 자리에 지어진 광주 최초의 아파트는 이제 광주에서 가장 오래고, 가장 허름하며, 가장 값싼 아파트로서 가장 가난한 사람들을 품고 있다. 광천동에서 대규모의 재개발이 추진되면서 들불이 사그라든 아파트도 머지않아 철거될 것이다. 살아남은 야학의 강학(교사)·학강(학생)들과 유족들이 광천시민아파트를 찾아 임들의 흔적을 더듬었다. 윤상원 열사의 방이 있던 광천시민아파트 B동 앞에서 주민들이 화단과 화분에 심은 채소를 돌보고 있다. 광주/글 이문영 기자 moon0@hani.co.kr, 사진 강재훈 기자 khan@hani.co.kr
‘행진’에 앞서 죽음이 있었다.
앞서서 나가며 산 자들의 따를 길을 낸 죽은 자들이 있었다. 먼저 간 ‘임들’의 자취가 흐릿해진 아파트에서 남은 자들의 머물 시간도 오래지 않았다. 임의 동생 윤태원(57·㈜한양 전무)이 B동 106호의 문을 두드렸다.
“누구씨요?”
방 안에서 목소리가 물었다.
“오래전 이 방에 살았던 아파트 주민인데요.”
윤태원이 방문 안으로 말을 넣었다.
오래전, 빛고을에 핏빛이 내려앉기 직전까지. 이 방, 형과 사글세로 얻어 살았던 새집처럼 작은 방이. 아파트, 어느덧 날 수 있는 새들이 모두 날아간 뒤 날개 꺾인 새들만 남은 낡은 둥지가 돼 있었다.
“오랜만에 왔는데 옛 방을 좀 보고 갈 수 있을까 해서요.”
망설이던 방주인이 문을 열었다.
“들어와서 보씨요.”
눈에 익으면서도 눈에 선 방이 문 뒤에 있었고, 달라졌으나 달라지지 않은 생활이 방 안에 있었다. 흘러버린 시간과 멈춰버린 시간의 틈새로 ‘그때’와 지금이 윤태원의 눈앞에서 교차했다.
“우리 살 땐 수도도 화장실도 없었는데….”
방이 곧 집인 건축물이었다. 작은 방 두 개가 전부인 거처에서 주인은 10평의 집을 쪼개 없던 수도를 들이고 부엌을 냈다.
“참 많이도 낡았다.”
37년 전 그 방에서 북적였던 ‘임들’의 기억도 머지않아 철거될 것이었다.
작은 방에서 북적이던 ‘임들’의 기억
광주 망월동 5·18 묘역(옛 묘역)에서 두 영혼의 결혼식이 있었다. 1978년 12월26일 죽은 여자와 1980년 5월27일 죽은 남자가 1982년 2월20일 부부(1997년 새 묘역 합장)가 됐다. 두 달 뒤 산 자들은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기지 못하고 죽은 두 사람을 기리며 노래했다. 창작노래극 <넋풀이> 녹음테이프(7곡 수록)에 담겨 전파된 ‘임을 위한 행진곡’(소설가 황석영이 백기완의 시 ‘묏비나리’로 작사, 전남대생 김종률이 작곡, 들불야학 2기 강학 전용호가 녹음 실무)은 광주항쟁과 한국 민주주의를 대표하는 곡이 됐다. 남자는 윤태원의 형이었고, 여자는 그의 형수가 됐다.
형. 윤상원(1950년 8월~1980년 5월27일). 들불야학 1기 강학(일반사회). 5·18 항쟁지도부 대변인. 들불야학 동료들을 이끌고 <투사회보> 제작·배포. 도청 최후항전 주도. 계엄군 총에 사망 뒤 주검 불 타 훼손.
광주광역시 서구 광천동 65-7에 형제의 방이 있었다. 광천시민아파트는 2017년 광주의 주택들 가운데 독보적으로 낡아 주변으로부터 구별됐다. 황토색 페인트칠은 부스럼처럼 일어나 나무껍질처럼 벗겨졌고, 실금들이 자유롭게 뻗은 벽들엔 시멘트를 덧발라 땜빵 했다. 시간의 속도를 좇아가지 못한 아파트에서 마모된 삶들이 부식된 시대를 견디고 있었다. ‘합창’으로 갇혀 있다 9년 만에 ‘제창’으로 놓여난 노래는 이 가난한 아파트에 근거를 둔 들불야학의 인연에서 이야기를 얻었다.
형수. 박기순(1957년 11월~1978년 12월26일). ‘6·27 교육지표 사건’(1978년 6월27일 전남대 교수 11명이 ‘우리의 교육지표’ 발표)으로 강제휴학. 들불야학 창립(수학). 광주 지역 1호 위장취업자가 된 ‘노동자의 벗’. 연탄가스 중독 사망.
들불야학은 광주·전남 최초의 노동야학(1978년 7월~1981년 7월)이었다. 1978년 10월 박기순은 전남대 선배 윤상원을 설득해 들불야학에 참여시켰다. 윤상원은 서울의 직장을 그만두고 광천공단의 한남플라스틱 노동자(박기순과 더불어 광주의 첫 위장취업자)가 돼 있었다. 신영일(1958년 10월~1988년 5월9일. 1기 강학. 국사. 5·18구속자협의회와 전남민주청년협의회 창립 주도)이 만든 ‘학당가’를 부르며 그들은 임과 임이 됐다. 야학 강학(교사)이 된 다음달 윤상원은 광천시민아파트에 방을 얻어 이사했다.
“여기네 여기.”
지난 2일 세월이 피부를 벗겨낸 낡은 벽을 몇 개의 손들이 가리켰다. B동 건물 뒷벽으로 윤상원 형제의 방이 삭은 창틀을 품고 있었다. 살아남은 들불의 강학·학강(학생)들이 임의 유족들과 광천시민아파트에서 야학의 흔적을 더듬었다. 야학의 강학·학강들은 1980년 5월 항쟁지도부와 시민군으로 뛰어들어 학살에 맞섰다. “‘들불7열사’(박기순·윤상원·박용준·박관현·신영일·김영철·박효선)의 삶과 죽음은 광주항쟁의 머릿돌이자 광주·전남 민주화운동의 밑돌”(1기 강학 임낙평)이 됐다.
야학 1기 학당은 광천성당 교리실 한 칸(2004년 도로를 낼 때 헐려 출입문 쪽 벽 일부만 보존)을 빌려 썼다. 윤상원의 방이 속한 B동과는 골목길을 따라 접해 있었다. 그의 방은 야학 강학·학강들의 공동 숙소였다. 휴게실이기도 했고, 회의실이기도 했으며, 자료실이기도 했다.
“저 좁은 방에서 스무 명이 잔 적도 있었으니까.”
임낙평(현 국제기후환경센터 대표)이 회고했다.
들불의 교사와 학생들은 윤상원의 방에서 자고 먹고 공부하고 토론하다가도 창문으로 뛰어내리면 곧바로 야학에 닿았다. 박기순이 불운한 죽음을 맞기 이틀 전 야학의 전망을 놓고 동료들과 밤샘토론한 곳도 그 방이었다.
시민아파트의 열악한 생활환경이 고등학교 3학년이던 윤태원에겐 버거웠다. “한여름 땀을 뻘뻘 흘리며 집에 돌아와도 씻을 공간과 물이 없다”는 사실이 그는 가장 힘들었다. 주민들은 층마다 하나씩 있는 공동세면(탁)장과 공동화장실에서 씻고 빨래하고 볼일을 봤다. “화장실에서 새어나온 냄새가 아파트 복도에서 진동”했다.
“머지않아 내려앉겠네.”
위태로운 아파트 외벽을 바라보며 윤태원이 말했다. 그는 “지금 다시 봐도 그때 그 환경에서 어떻게 살 수 있었는지 의문”이었다. 광천시민아파트는 그때나 지금이나 광주에서 가장 가난한 사람들이 사는 가장 값싼 아파트였다. 그 변함없는 공고함에 그는 마음이 편치 않았다.
조순임(1기 학강. <투사회보> 제작). 광주/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임을 위한 행진곡’ 주인공들이
새날을 꿈꾸며 활동한 장소
산 자들이 앞서간 자들 그리며
광천시민아파트 찾아 흔적 더듬어
독보적으로 낡아 구별되는 공간
들불야학은 광주·전남 최초 노동야학
박기순 설득으로 윤상원 야학 참여
광천시민아파트에 얻은 그의 방
야학의 공동숙소·휴게실·자료실
박기순도 사망 이틀 전 밤샘토론
한국전쟁 피란민과 도시빈민 판자촌
허물고 지은 가장 가난한 아파트
아파트에서 주민운동하던 김영철 동참
C동 아파트 2층에도 새 학당 얻어
들불·김영철 활동으로 아파트도 생동
광주항쟁에 뛰어들어 산화한 들불들
5·18 국가폭력 마르지 않은 아파트
임박한 재개발에 갈 곳 없는 주민들
“시상이 얼매나 좋아졌는진 몰러도
우리넌 요렇게 오그라들기만 혔소.”
“참말로 험난시러웠으라우”
무등산 계곡에서 발원한 광주천(23㎞)은 빛고을을 동에서 서로 휘돌아 영산강에 이르렀다. 물을 타고 온 퇴적물이 광주천변에 쌓이면서 사람들은 제방을 놓고 광천동을 일궜다. 천변은 마르고 단단한 땅을 가져본 적 없는 가난한 사람들이 흐르다 닿은 무르고 축축한 땅이었다. 한국전쟁 피란민과 도시빈민들이 다닥다닥 붙어 판자촌을 이뤄 살았다. 그 판자촌을 허문 자리에 1970년 광주시 최초의 아파트(3층 건물 3개동 184가구)가 준공했다. 한 해 전 박정희 정권은 서울 전역의 가난을 철거(무허가 판자촌 정리)한 자리에 ‘시민아파트’(1970년 와우아파트 붕괴→1972년 부실 시공으로 건설사업 중단→1997년 정리 시작→2005년 32개 지구 433개동 정리 완료)를 짓고 철거된 가난을 몰아넣었다. 광주시가 광천동에 지어 ‘시민’이란 이름을 부여한 아파트도 난(亂)을 피해 살아남은 사람들의 심란(心亂)한 집을 대한민국이 ‘정비’하고 ‘정화’한 결과물이었다.
“옛날엔 우물이었잖아. 상원이 형 빨래가 쌓이면 내가 여기서 거들기도 했는데.”
B동 건물 옆에서 조순임(55. 1기 학강. <투사회보> 제작)이 틀어 잠근 수도꼭지에 시선을 뒀다. 광천시민아파트 주민이었던 그는 낮엔 광천공단(대한콘덴사)에서 일하고 밤엔 야학에서 공부했다.
“나도 이 방에서 살다시피 했지.”
윤순호(59. 2기 학강. <투사회보> 제작. YWCA 최후항전 중 체포)가 윤상원의 방을 보며 말했다. 5·18 때 그는 광천공단 프레스공(현재 프레스·금형·용접 업체 대표)이었다. “악덕사장과 노동조건을 따지려면 먼저 배워야겠다는 생각”에 퇴근 뒤 야학을 찾아 공부했다.
아파트 가까운 곳에 광천공단이 있었다. 아시아자동차 공장(1965년 설립)에 부품을 대는 영세업체들이 모여들면서 공단이 됐다. 판자촌의 아버지들은 건설 현장에서 날품을 팔았고, 아들딸은 공단에서 저임금 노동자로 일했다. 들불야학에서 노동법을 배운 윤순호는 부당함에 항의하며 반원들과 출근거부를 벌였다.
판자촌 주민들이 광천시민아파트에 삶을 의탁한 그해 서울에서 노동자 전태일이 분신했다. 전태일은 대학생 친구 한 명 갖길 소망하며 죽어갔다. 전태일의 친구로 살고자 들불야학은 광천시민아파트에서 척박한 노동을 만났다. 전남대 학생들(당시 법대 1학년이던 박관현이 들불야학에 결합하는 계기)과 협업한 ‘광천공단 노동자 실태조사 보고서’(72만평 부지에 입주한 63개 업체 전수조사)는 지역사회에 충격을 주기도 했다.
20년 상환에 매달 4천원을 갚는 조건으로 184가구가 시민아파트에 입주했다. 상대적으로 큰 판잣집 주민은 1층의 방 2개짜리 집(10평형)에 들어갔고, 작은 판잣집에 살던 사람들은 2층과 3층의 방 1개짜리 집(3~4평형)을 받았다. ‘광주 1호 아파트’는 살 만한 집이 아니었다. 행정은 아파트라고 명명했지만 구조는 아궁이 달린 쪽방이었다. 주민들이 상환금을 제때 납부하지 못하자 광주시도 자금 투입을 끊고 건물의 뼈대만 세워 분양했다. “벽이랄 게 없어 거적때기를 붙이고 살면서”(C동 주민) 주민들이 직접 공사를 했다. 조순임의 아버지도 등에 지고 나른 모래를 시멘트와 섞어 벽과 바닥을 발랐다. 아파트로 들어간 피란민들은 그곳에서 다시 ‘난’(광주학살)을 맞았다.
“이 집 참말로 험난시러웠으라우.”
김춘례(가명·72)는 윤상원·윤태원이 비운 방(1980년 초 100여m 떨어진 주택가로 이사)으로 5·18 직전 입주했다. “255만원에 사서 고치는 데 500만원”을 쓴 그는 “5·18 때 애기들 숨쿠느라 애간장이 녹아부렀”다. “잡아가믄 다 죽여부리는 시절”이었다.
“오매오매, 동명이 어매 아난가배.”
윤태원을 뒤따라온 김순자(63)에게 김춘례가 손을 내밀었다.
“안 죽고 살아있응께 이리 보네.”
“나 생각나겄소?”
“(5·18 때) 동명 아배한테 (거리로) 나가지 말라고 그리 말혔는디.”
동명 아배. 김영철(1948년 8월~1998년 8월16일). 2기 특별강학(공동체). 광천신용협동조합 이사장. 항쟁지도부 기획실장. 윤상원의 죽음 목격 뒤 체포. 상무대에서 자살 시도. 정신장애로 오랜 고통.
광천시민아파트 3개동은 디귿자 구조로 배치됐다. 골목을 따라 들어가면 세월이 고스란히 내려앉은 건물이 누워 있다. 정면에 아파트 이름을 새긴 A동이 앞을 바라보고 있다. B동 윤상원의 옛 방에서 건너온 김순자가 남편과 살던 집을 찾았다.
“할매, 이 방에서 얼매나 살았소?”
“20년은 넘었제.”
“방에만 있지 말고 밖에도 좀 나가셔.”
“내 거동을 잘 몬허니께.”
A동 114호 정순임(87)은 방에 들어와 인사하는 김순자와 한참 이야기한 뒤에야 얼굴을 알아봤다. 김순자는 1988년까지 그 방에 살았다.
“이제 보이 동명이 엄마구마.”
“맞소. 반장 마누래. 앞으로는 나 기억해요.”
김영철은 ‘A동 반장’이었다. 그는 1976년 5월 김순자와 두 아들을 데리고 시민아파트로 이사했다. 그의 주민운동(당시 YWCA전남협동개발단 간사)으로 시민아파트엔 생기가 돌았다. 그는 청년회를 부활시켰고, 신용협동조합을 인수해 키웠다. 매일 새벽 아이들을 깨워 아파트를 청소했으며, 주워온 빈병과 폐지를 팔아 아이들에게 신협 통장을 만들어줬다. “놀이터가 없어 부서진 리어카 위에서 난폭하게 놀”(김영철 유고집)던 아이들을 모아 토·일요일마다 어린이 주말학교를 열었다. ‘아파트 200만원 이하로는 팔지 않기 운동’으로 주민들 자산도 끌어올렸다.
광주광역시 지산동에 위치한 들불열사기념사업회 벽에 걸린 ‘들불7열사’의 얼굴 동판들. 왼쪽 아래부터 박기순
“전두환 때려잡는 데 써주씨요”
“나 살 땐 저 창문에 창호지를 발라서 건들면 툭툭 떨어져불고 그랬제. 창문으로 내다보믄 우리 애가 저기 신협(시민아파트 입구) 쪽으로 들어오는 게 다 보였어.”
김순자가 창문을 보며 말했다. 들불야학이 시민아파트에 뿌리내린 데는 김영철의 역할이 컸다. 별도의 야학을 구상하던 그는 들불팀을 만나 뜻을 합쳤다. 2기 특별강학이 돼 힘을 보탰다. 그가 주도하던 신협의 사무실도 야학 3기 학당으로 제공했다. 들불야학은 2기 신입생을 받은 1979년 1월 무렵 박기순의 유족이 보탠 돈을 합쳐 C동 2층 방을 새 학당으로 얻었다. 아파트 마당에선 ‘오월 광대’ 박효선(1954년 10월~1998년 9월10일. 3기 강학. 문화. 항쟁지도부 홍보부장. 극단 ‘토박이’ 대표)이 탈춤반을 이끌고 주민들과 춤사위를 풀었다. 김영철과 들불야학이 활동했던 시기(1977년 10월~1980년 5월)가 광천시민아파트 47년 역사에서 가장 반짝였던 때였다.
1979년 6월 윤상원은 아파트 밖에 살던 동생 윤태원을 자신의 방으로 데려왔다. 고등학교 3학년인 동생이 공부하도록 그는 짐을 싸서 김영철의 집으로 들어갔다. 그 좁은 집엔 이미 박용준이 식구가 돼 살고 있었다.
박용준(1956년 7월~1980년 5월27일). 2기 특별강학(자기계발). 글씨를 잘 써 <투사회보> 필경을 도맡음. 광주와이더블유시에이(YWCA)에서 최후항전 중 계엄군 총에 사망.
박용준은 고아였다. 출생일도 추정했다. 광주와이더블유시에이신협 직원이었던 그는 돈을 아끼려고 사무실 소파에서 자고 연탄난로에 라면을 끓여 먹으며 지냈다. 1977년 11월 리어카를 끌고 간 김영철이 박용준의 짐을 자기 집으로 실어 날랐다. 그를 동생으로 삼아 주민등록에 올렸다. “형님 집에 살면서 비로소 행복해졌다”던 “용준이”의 말을 김순자는 지금도 기억했다.
합판으로 나눈 방 한 칸을 김영철 부부와 아이들이 썼고, 다른 한 칸에 박용준과 윤상원이 살았다. 윤상원이 거처를 옮기면서 그의 방에 있던 야학 자료들과 그의 방으로 몰려들던 강학·학강들까지 김영철의 방으로 따라왔다. 박관현(1953년 7월~1982년 10월12일. 3기 강학. 영어. 80년 5월14일~5월16일 전남대 총학생회장으로 ‘민족민주화 대성회’ 주도. 40일 옥중단식 뒤 사망), 임낙평, 서대석(3기 강학. <투사회보> 제작. 참여정부 청와대 시민사회수석비서관)이 ‘고정 식객’이 됐다. ‘말도 안 되는 동거’를 감내하며 “끼니마다 열댓명의 밥을 해야 했던” 그 시절이 김순자에게도 “가장 살아있던 날들”이었다. 김영철이 광천시민아파트를 허물고 ‘살 만한 집’으로 다시 지을 계획을 추진하고 있을 때 1980년 5월이 왔다.
“전두환 때려잡는 데 써주씨요.”
“공수부대 몰아내는 데 써주씨요.”(<윤상원 평전>)
들불야학은 항쟁의 한복판으로 뛰어들었다. 광천시민아파트 주민들은 돈과 쌀을 모아 윤상원에게 건넸다.
5월22일 윤상원은 밤새 박용준이 필경하고 야학 동료들이 등사한 <투사회보> 수천장을 시민군의 지프차에 실어 배포했다. 손이 부족했던 그는 동생 윤태원을 불러 차에 태웠다. “같이 회보를 뿌리다 차에서 내려 급히 어디론가 가던 뒷모습”이 동생의 기억에 남은 형의 마지막이었다. 5월28일 윤상원은 시청 청소차에 실려 망월시립묘역에 성명불상자(관번호 57. 검안번호 4-1. 묘지번호 111)로 가매장됐다. 박용준도 망월동 무연고자 사체들(묘지번호 2-38) 중에서 발견됐다.
“5월23일 상원이 삼촌 밥을 먹여 보낸” 김순자는 5월27일 임신 8개월의 몸으로 “3살짜리 아들이 아빠아빠 불러도 뒤도 안 돌아보고 가버린 남편”을 찾아 헤맸다. 윤상원의 사망 장소에서 체포된 김영철은 고문을 받으며 박용준의 죽음을 들었다. 왼손 동맥을 끊다 실패한 뒤 화장실 콘크리트 모서리에 머리를 세 번 찧었다. 계엄군이 상처만 꿰매 방치한 그는 출소 뒤 16년간 정신병원에서 고통받다 사망했다. 김순자의 뱃속에 있던 막내딸이 무용가로 자라 아버지의 영정을 안고 춤을 췄다.
낮에도 어둠은 있었다.
“오후 6시 전엔 불을 못 써(켜).”
B동 주민 양혜자(가명·81)가 공동화장실을 나와 복도 저편에서 걸어왔다. 그의 얼굴은 2m 앞에 섰을 때에야 눈·코·입에 묻은 컴컴함을 털고 윤곽을 갖췄다. 태양이 수직으로 뜬 시간에도 아파트 복도는 깊이 웅크린 터널 같았다. 김영철이 “암굴 같다”고 표현했던 복도가 그의 시대로부터 40년이 흐른 지금까지 고스란했다.
“영철이, 그리 똑똑헌 사람이었는디.”
시민아파트에 쏟아진 5·18의 국가폭력은 아직 마르지 않았다. 김영철과 청년회 활동을 같이 했던 양혜자의 아들도 시민군이 됐다. 도청 함락 뒤 도망다니다 집에 들른 아들을 진 치고 있던 형사들이 잡아가 고문했다. 풀려난 뒤 수술을 받고 병치레가 잦아진 그는 “지금도 빼빼 말라 뭣을 잘 먹도 못 헌 채” 전국을 오가며 건설노동자로 살고 있다.
“영철이허고 야학서 청년들 모으고 갤쳐서 쓸 만헌 놈들은 다 5·18에 쓸렸제. 그려서 그리 되?慧째 싶어 한동안 밉기도 혔제. 영철이가 아파트 사람들 데불고 뭘 혀볼라고 겁나 애를 썼어. 정신 앓음서 집에 왔을 땐 월매나 짠허든지. 영철이도 그리 되야불고 부모 없이 살던 아들 친구 머심애(박용준)도 홀홀단신으로 죽어불고. 가슴이 아파 말도 몬 혔제.”
“슬퍼하지 말아라 오늘부터는”
‘빨갱이 소굴’로 찍힌 광천시민아파트에서 김순자도 “간첩”이 돼버렸다. “남편과 부부로 위장한 간첩 아니냐”는 말을 들으면 “억울해서 붙들고 싸움질도” 했다. 조합원 탈퇴로 신협 자산도 빠져나갔다. 남편 사후 10년 뒤(2008년) 그도 “여기(머리)가 못 견딘 탓에” 쓰러져 수술(뇌경색)을 받았다. 김순자는 “남편이 인생을 걸었던” 아파트를 다녀갈 때마다 한동안 몸져누웠다.
시간이 직선으로만 흐르진 않았다. 과거를 뒤에 두고 현재를 밀어 미래로 가는 것이 시간인 줄 알았다. 지난 정부에서 대한민국의 시간은 정방향이 가늠되지 않는 궤적(정부의 ‘임을 위한 행진곡’ 제창 거부. 종편의 ‘간첩 침투설’ 유포. 전두환 회고록의 거짓말 등)을 그렸다.
“지금도 무서와.”
양혜자는 “나는 안즉도 불안하다”고 했다.
“시상이 바뀌믄 든든허게 살어야 허는디 시상이 이렸다저렸다 항께 무서와.”
“애간장 녹던 오월”이 서른일곱 차례 돌아오는 동안 시간은 광천시민아파트의 가난을 데려가지 않았다. 부실공사로 아파트가 지어졌을 때나, 군대의 총칼이 광주를 쏘고 찔렀을 때나, 새 정부 출범으로 ‘새날’이 온 뒤에도, 복도로 들어와 어둠을 밀어낸 빛은 없었다.
아파트 입주 첫해(1977년) 김영철은 전 가구를 방문 조사(수입·지출·부채 등)해 ‘광천시민아파트 개발 계획’을 짰다. 조사 결과(전체가구 75%가 ‘요보호 빈곤가구’)는 40년이 흘러도 달라지지 않았다. 정신을 다친 뒤에도 김영철은 “감춰놓으면 꺼내 보고 또 감춰놓으면 또 찾아서”(김순자) 자료들을 보고 다시 봤다. 건강 악화를 염려한 아내가 그 시간에서 남편을 꺼내려 자료를 불태웠다. 김영철의 시간이 조사 시점에서 맴돈 것처럼 광천시민아파트의 시간도 그때에서 나아가지 못했다. 시민아파트는 매년 혹서와 혹한의 계절마다 ‘복지 사각지대’로 언론에 소비되고 있다. 아파트가 시간을 뒤쫓지 못한 것이 아니라 시간이 아파트를 내버린 것인지도 몰랐다.
‘들불’이 피어오른 자리로 철거가 임박했다. 현재 광천동에선 42만6389㎡에 6200여가구를 짓는 광주시 역대 최대 재개발(시공사 대림·롯데·금호·현대산업개발)이 진행되고 있다. 오랜 논란 끝에 주택재개발정비사업조합이 2015년 9월 설립인가를 받았다. 광천시민아파트도 사업구역에 포함돼 2019년께 철거가 예정돼 있다. 광천공단은 광주종합버스터미널로 바뀌었고, 아시아자동차는 기아자동차가 됐다. 광천시민아파트로부터 500여m 거리엔 신세계백화점이 들어섰다. 시간이 질주하는 동안 들불이 사그라든 아파트만 낡아 왜소해지고 있다. 광천동이 ‘신세계’가 돼도 시민아파트 주민들이 들어갈 자리는 없다.
윤상원의 방에 사는 김춘례는 “이 방에서 죽는 게 남은 소망”이었다. 시민아파트의 방 절반 이상이 비어 있다. 떠날 수 있는 사람들 모두 아파트를 떠났다. 빈방들은 개발이익을 얻으려는 외부인들의 명의로 이전됐다. 판자촌 시절부터 그 땅에 살아온 사람들은 노령연금으로 버티는 독거노인이 돼 드문드문 방을 지키고 있다. 가난은 가장 가난한 자들부터 발을 묶었다.
“찌그러질 것 같은 아들의 집에 내가 어쩌자고 들어갈 끄나.”
양혜자는 폐렴으로 숨을 몰아쉬었다.
“여긴 내 혼자서 징역 사는 방이제. 화장실 갔다가, 방에 있다가, 마당 나갔다가, 다시 방에 들어오는 기 내 댕기는 길의 전부라. 5·18 때 우리 불쌍헌 애기들 얼매나 죽었소. 제대로 배우도 몬 헌 애기들이 나섰다가 죽어뿌고, 살아남았어도 노동일 하믄서 고생들 안 허요. 시상이 얼매나 좋아졌는진 몰러도 우리넌 요렇게 퍽퍽하고 오그라들기만 안 혔소.”
시민은 이름이 없다. 가난한 아파트 벽에 박혀 철거민들에게 던져진 그 이름 ‘시민’이, 들불야학과 김영철을 만나 저항하는 시민이 되고, 5·18의 거리에서 시민군이 돼 총을 들고 죽어갔다. 이젠 그 시간만큼 밝아진 세계의 시민들 틈엔 끼지 못한 채, 그 시간만큼 가난을 더한 아파트에 남아 갈 곳 없는 시민으로 스러지고 있다.
‘임을 위한 행진곡’이 담긴 ‘넋풀이’ 테이프엔 ‘격려가’(김준태의 시 ‘이 세상에서 사라지는 것은 하나도 없다’로 황석영이 작사)가 있다. 죽은 윤상원과 박기순이 산 자들을 위로하는 노랫말이다. ‘행진’ 뒤엔 삶이 남았다. 임들이 떠난 땅에 그들이 지키려던 임들이 아직 남아 있다.
(윤상원) 살아남은 분들이 너무 풀이 죽었어.
(박기순) 그래요. 우리 격려해주어요.
슬퍼하지 말아라 오늘부터는
절망하지 말아라 오늘부터는
세상에서 사라지는 것들은 하나도 없단다….
광주/이문영 기자 moon0@hani.co.kr
들불야학 강학·학강과 유족들이 광천시민아파트 옆 광천성당 교리실에 있던 1기 학당의 옛 터를 둘러보고 있다. 광주/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서대석(3기 강학. <투사회보> 제작. 참여정부 청와대 시민사회수석비서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