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9월12일 규모 5.8의 지진이 천년고도 경주를 흔들었다. 그로부터 8개월이 지난 현재, 경주 도심에선 지진의 흔적을 찾기 힘들다. 눈에 보이는 피해를 입진 않았지만, 일상생활이 흔들렸다는 사람들이 있다. 지난해 지진으로 부서진 한옥 기와를 수리하고 있는 모습. 경주시 제공
2016년 9월12일 규모 5.8의 지진이 천년고도 경주를 흔들었습니다. 신라 선덕여왕 때 세워진 첨성대 중심축마저 흔들렸지요. 그로부터 8개월의 시간이 지났습니다. 지난 5월11일 찾은 경주 도심은 따스하고 평화로웠습니다. 첨성대 앞에선 수학여행을 온 중학생들이 재잘거리며 사진 촬영을 하고 있었지요. 첨성대 바로 옆에 붙여진 ‘지진 대응 요령’ 외에, 지진 흔적을 찾기란 어려웠습니다. 그러나 이곳엔 8개월째 ‘생존배낭’을 풀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지난해 9월 경주서 5.8 지진
올해 5월까지 617차례 여진
몸으로 직접 겪었던 16명
시민들로부터 후원 받아
9·12 이야기 담은 책 펴내
여진 횟수 점차 줄어들면서
불안함 사라졌다고 여기다
규모 3.3 지진 홀로 목격하곤
집에서 맨몸으로 뛰쳐나와
전화기 붙들고 펑펑 울었다
2016년 추석 연휴를 앞둔 9월12일 월요일 밤. 서울부터 제주까지 전국 곳곳이 흔들렸다.
경북 경주시 남남서쪽 8㎞ 지역(내남면)에서 발생한 규모 5.8의 지진이었다. 1978년 기상청이 장비로 지진을 관측한 이래 가장 큰 규모였다. 규모는 지진에너지 크기를 절대적으로 나타내는 단위이며, 진도는 지진의 세기에 따라 사람의 느낌이나 흔들림 정도를 상대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카카오톡 메신저가 작동하지 않았다. 경북·경남에선 휴대전화마저 먹통이 됐다. 국민안전처 누리집은 지진 발생 직후 3시간 가까이 접속조차 되지 않았다. 지진 재난에 대한 불안이 높아졌고, 질문이 쏟아졌다.
‘더 큰 지진이 일어난다면?’
‘원자력발전소(핵발전소)엔 문제가 없나?’
‘늑장대응을 하는 국가를 믿을 수 있는 것일까?’
그로부터 8개월이 지났다. 9·12 지진 이후 규모 1.5 이상의 여진이 올해 5월19일까지 모두 617차례나 있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들은 드물다. 경주에 살고 있는 전직 출판편집자 박찬석(43)씨, 글쓰기 선생님 윤정임(47)씨, 방송작가 정꽃님(36)씨는 몸에 새겨진 지진의 공포와 두려움이 옅어지기 전에, 당시 상황을 기록에 남겨야 한다고 생각했다. 더 큰 규모의 지진이 언제, 어디서 또 일어날지 모르기 때문이다. 이들은 초등학교 선생님, 지역 케이블방송 기자, 임상심리사, 일본에서 유학한 교수, 경주에 사는 일본인, 게스트하우스와 책방 주인 등 저마다 다른 삶터에서 지진을 겪은 13명을 만났다. 이렇게 연을 맺은 사람들은 최근 9·12 지진과 그 이후의 이야기를 담은 책 <현관 앞 생존배낭>을 펴냈다. 이러한 기록이 공유돼야 한다는 데 공감한 시민 152명이 출판에 필요한 500여만원을 모아주었다. 지진을 겪은 16명이 직접 쓴 글을 기반으로 9·12 지진이 우리 사회에 남긴 흔적과 과제를 되짚어보았다.
보이지 않는 상처
2017년 3월31일 새벽, 박근혜 전 대통령이 구속됐다. 물 위로 떠오른 세월호는 침몰 1080일 만에 뭍으로 향하고 있었다. 바야흐로 봄이었다. 경주에선 벚꽃축제가 열렸다. 바로 그날, 정꽃님씨는 경주 황성동 집 앞길에 홀로 나와 울고 있었다. 오후 1시46분, 규모 3.3의 지진이 났다. 지난 8개월 동안 여진 횟수가 점차 줄어들면서, 불안한 마음이 어느 정도 잠잠해졌다고 생각한 시기였다.
“남편은 출근했고 두 딸아이는 유치원·학교에 있었어요. 거실 책상에 혼자 앉아 있는데, 집 베란다에서부터 ‘드르르르’ 진동이 오는 게 보이는 거예요. 지진이 나면 어떻게 대피할지, 무엇을 챙길지 항상 머릿속에 그리고 있었거든요. 그런데 그동안 무뎌진 건지, 순간 너무 당황한건지 아무것도 생각이 나지 않았어요. 맨몸으로 집에서 뛰쳐나갔는데 손이 덜덜덜 떨리고, 남편 전화를 받고선 엉엉 터져버린 거예요. 너무 무서워서.”
초등학교 5학년 딸은 교실에 있었다. 흔들림이 있자, 책상 밑으로 몸을 숨겼다. 운동장으로 나가라는 안내방송이 나오기까지 5분 동안 웅크리고 있어야 했다. 운동장으로 나온 아이들은 인솔자 없이 뿔뿔이 흩어졌다. 꽃님씨네 부부는 두 아이를 데리러 학교와 유치원을 찾았다. 엄마·아빠와 연락이 안 되면 ‘무조건 계림고등학교 한복판’에 있으라고 누누이 일러두었다. 꽃님씨 머리카락은 짧다. 언제 갑자기 지진이 닥칠지 몰라, 샤워 시간을 줄이기 위해 긴 머리카락을 싹둑 잘랐다. 여차하면 아이 둘을 안고 뛰어야 한다는 생각에, 한동안 치마를 입거나 높은 구두를 신지 못했다.
9·12 지진으로 경주 사람들의 삶이 뿌리째 흔들린 건 아니다. 경북·대구에서 23명이 다쳤고 110억여원의 재산 피해가 있었다. 전문가들은 지진 규모에 견줘 피해가 적었다고 입을 모았다. 지진이 발생한 진원이 지하 15㎞로 깊었고, 지진 지속시간도 5~7초로 짧았기에 대규모 참사를 피할 수 있었다. 2011년 규모 9.0의 동일본대지진 지속시간은 무려 170초였다. 내진설계가 돼 있지 않은 낡은 집과 중저층 건물의 피해가 컸다. 지역에 따라 흔들림을 느낀 정도는 달랐다. 매립지 같은 지반이 약한 지역은 지진에 더 취약하다.
꽃님씨네가 눈에 보이는 피해를 입은 건 아니다. 그러나 일상생활엔 눈에 보이지 않는 균열이 생겨났다.
규모 5.8 지진이 일어나자 경주 도로 곳곳에 자동차가 쏟아져나왔다. 초등학교 운동장, 공원, 박물관 앞 공터마다 불안에 떠는 사람들로 가득 찼다. 2016년 9월12일 밤 동국대 경주캠퍼스 운동장 모습. 이창희씨 제공
고문이 된 일상의 소리
‘우웅’ ‘우르르르’ ‘꾸구구구궁’
경주로 밀려드는 지진은 소리를 몰고 다닌다. 자동차 엔진 소리, 주전자 물 끓는 소리, 냉장고 여닫는 소리, 바람에 창문 흔들리는 소리, 세탁기 돌아가는 소리…. 일상의 소리는 지진이 내는 굉음과 자주 겹쳤다. 비슷한 소리가 들릴 때마다 가슴은 철렁 내려앉았다. 학교에선 수업을 듣다 위층에서 들리는 소리에 놀라 우는 학생들이 있었다. 지진을 반복적으로 경험한 몸은, 진동만으로도 규모 3.0인지 3.5인지를 가늠할 만큼 예민해졌다.
반려견 도리와 함께 사는 박찬석씨에겐 새로운 습관이 생겼다. 욕실 문을 살짝 열어 놓고 볼일을 본다. 샤워를 할 때도 마찬가지다. 찬석씨는 지난해 12월 성건동 집을 팔고 사정동으로 거처를 옮겼다. 원자력발전소 밀집지역인 경주에 큰 재앙이 덮치면, 집은 휴짓조각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굳이 집을 소유할 까닭이 없었다. 경주 시내에서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기 위해선, 형산강 다리를 건너야 한다. 버스터미널 근처 동네인 사정동은 서천교와 가까웠다. 앞서 살던 동네보다 좀더 빨리 경주를 떠날 수 있는 위치다. 그가 살던 집으로 ‘좀더 튼튼한 집’을 찾아나선 젊은 부부가 이사를 왔다. 지진 이후 사람들이 선호하는 아파트 ‘로열층’은 1~3층으로 낮아졌다.
서울과 주변 지역에서 살던 찬석씨는 6년 전 아는 사람 하나 없는 경주에 정착했다. 9·12 지진 이후, 다시 삶의 터전을 옮길까 고민하기도 했다.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우리나라 어느 곳이 안전지대일까? 답을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경주 지진 이후 수원·제주·부여에서도 지진이 있었다. 예전에도 그 정도의 지진이 있었는데 둔감해서 모르고 살았을지 모른다. 이젠 규모 2.0 이상 지진에도 둔감할 수가 없어졌다.”
일본 지바현에서 7년간 유학하며 셀 수 없이 많은 지진을 만난 이창희(38)씨는 2년 전부터 동국대 경주캠퍼스에서 고고학을 가르치고 있다. 지진이 생경한 사람들은 물었다.
“그래도, 이 선생은 지진을 많이 겪어 봐서 괜찮죠?”
“제가 제일 무서워하고 있어요.”
일본과 비교해 우리의 지진 방재시스템이 너무나 허술하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속수무책에서 각자도생으로
2016년 9월12일 저녁 7시44분. 하루 일과를 마친 경주 사람들은 가족과 저녁을 먹거나, 동료들과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경주시 내남면 내남초등학교 인근(경주시청으로부터 남남서쪽 9㎞)에서 규모 5.1의 지진이 났다.
박경애(45)씨가 불린 미역을 보던 순간이었다. 이날은 딸아이 생일이었다. 바쁜 월요일 아침, 미역국을 챙기지 못했다. 대신 저녁에 근사한 생일상을 차려줄 계획이었다. 거인이 지은 지 30년 된 아파트 벽을 밀었다 당겼다 마구 흔드는 것 같았다. 아파트 마당으로 1년 반을 살며 한번도 보지 못한 이웃들이 한꺼번에 쏟아져나와 있었다. 맨발로 나온 청년, 고무장갑을 낀 채 나온 아주머니, 잠옷 위로 외투만 걸친 할머니…. 각양각색의 사람들은 똑같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어찌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는 공포에 질린 얼굴. 지진이 난 순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어디로 대피를 해야 하는지 알지 못했다. 경주시든 정부든 구체적인 대응 요령을 알려주는 곳이 없었다. 경애씨는 규모 5.1 지진이 난 지 9분 뒤에야 ‘지진 났다. 조심하라’는 긴급재난문자를 받았을 뿐이다. 최정진(43)씨는 이러한 ‘뒷북 문자’마저 한 통도 받지 못했다.
세월호 참사부터 메르스(MERS·중동호흡기증후군) 사태, 최근 영동지방 산불까지. 재난에 대한 대처는 늘 허술했다. 전조가 없었던 건 아니다. 9·12 지진 두달 전인 7월5일엔 울산 앞바다에서 규모 5.0 지진이 있었다. 앞서 4월16일 일본 규슈 구마모토현에서 규모 7.3 지진이 나자, 진앙(지진이 발생한 진원 바로 위에 해당하는 지점)에서 320㎞ 떨어진 부산·울산·경상남북도로 흔들림이 전해졌다. 그때까지만 해도 국민안전처는 지진의 경우 사전 예측이 불가능하다며 긴급재난문자를 보내지 않았다. 아무런 정보도 주지 않아 국민을 불안에 떨게 했다는 질타성 보도가 이어지자, 다음달인 5월 기상청으로부터 지진 정보를 받아 긴급재난문자를 보내기로 한다. 그러나 9월12일, 국민안전처가 기상청 자료를 보고 진도를 분석하는 데만 5분가량의 시간이 흘렀다. 또 진앙에서 가까운 곳이 아예 문자 발송 대상 지역에서 누락되는 혼란이 이어졌다.
일본에선 일상적으로 지진 방재훈련이 이뤄진다. 일본 유치원의 지진 방재훈련 모습. 이창희씨 제공
아라키 준(52)씨는 그날 밤 경주에서 침착함을 잃지 않은 몇 안 되는 사람이다. 지진에 익숙했기 때문이다. 그는 2011년 서울 근교에서 경주로 이주한 일본인이다. 규모 5.1 지진이 나던 순간 남산동 한옥집에서 식구들과 밥을 먹고 있었다. 일본인들은 지진이 나면 습관적으로 텔레비전을 켠다. 지진해일(쓰나미) 가능성, 지진 규모, 진앙지, 피해 정도, 앞으로의 예측 등 사람들이 궁금해하는 정보가 공영방송인 <엔에이치케이>(NHK)를 통해 나오기 때문이다. 아라키씨 가족도 텔레비전을 켰다. 공영방송 <케이비에스>(KBS)에서는 드라마를 방영하고 있었다.
이창희씨가 일본에서 생활할 땐 흔들림을 느끼기 20~30초 전에 지진이 올 것이라는 걸 미리 알고 있었다. 텔레비전 방송을 통해 알려주기 때문이다. 진도 4(전등처럼 매달린 것이 크게 흔들리는 정도) 이상 지진이 발생하면, 방송 채널에선 일제히 ‘띠링~띠링~띠링’ 소리가 난다. 제법 큼지막한 자막으로 ‘긴급지진속보’를 알려주는 것이다. 지진파는 피(P)파와 에스(S)파로 나뉘는데, 진동을 동반하지 않는 피파는 에스파보다 빠른 속도로 전파된다. 진앙 인근에서 피파를 감지해, 피해를 일으킬 수 있는 에스파의 도달 시각을 예측해 알려주는 것이다. 일본은 이러한 시스템을 지난 2007년부터 도입했다. “지진이 오기 전 20~30초 동안 얼마나 대비를 할 수 있을까는 의문이지만 적어도 지진이 온다는 것을 미리 아는 것과 모른 채로 겪는 건 천양지차다. 긴급지진속보라는 사전 경보는 ‘마음의 준비’만으로도 충분히 역할을 한다.”
첫번째 지진 이후 1시간도 지나지 않아 더 큰 규모 5.8 지진이 발생했다. 학교에 있던 창희씨는 가족을 데리러 자동차로 3분 거리인 집으로 향했다. 그가 가족들과 함께 학교 운동장으로 돌아오는 데까지 1시간 가까운 시간이 걸렸다. 경주 도로 곳곳에 자동차가 쏟아져나왔기 때문이다. 초등학교 운동장, 공원, 박물관 앞 공터마다 불안에 떠는 사람들로 가득 찼다. “지진 이후 2시간 동안, 그 어디에서도 통제가 없었다. 텔레비전·라디오에서도 경주 지진과 관련 정보를 제대로 알려주는 곳이 없었다. 진원지에 기자를 보낸 방송사도 몇 군데 되지 않았다.”
지진이 언제 또 닥칠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기상청 지진 정보만으론 안심할 수 없었다. 트위터에서 ‘지진’이라는 단어가 급증할 경우, 이를 알려주는 ‘트윗 지진 알림’ 계정이 등장했다. 일본에서 개발된 ‘유레쿠루 콜’이라는 애플리케이션을 통해 지진 가능성을 체크하는 이들이 늘었다.
두 차례 지진이 이어지던 밤
대응요령 알 수 없어 우왕좌왕
‘뒷북’ 문자·언론보도 도움 안돼
불안감에 공원서 텐트 생활
시에선 불법이라며 철거 요구
불안·공포 드러내길 꺼려
아이 둔 30~40대 여성들은
원전·정치 등에 관심 많아져
정부 지진대책 발표했지만
“아직 변한 건 하나도 없다”
불온시된 불안
규모 5.8 지진이 일어났을 때, 아라키씨의 한국인 아내는 경주에 위치한 원전에서 사고가 나는 건 아닐까 불안을 호소했다. 동일본대지진이 동반한 지진해일로 인한 방사선 누출사고는 우리에게도 큰 충격이었다. 진앙에서 28㎞ 거리에 월성 1~4호, 신월성 1~2호기 등 원전 6기가 있었고 27㎞ 떨어진 곳엔 방사성폐기물처분시설(방폐장)이 있다. 지진 발생 3시간여 뒤 한국수력원자력은 월성 1~4호기 가동을 수동으로 중단했다. 2016년 12월 원안위는 월성 1~4호기에 문제가 없다며 재가동을 승인했다. 정꽃님씨는 이러한 발표를 쉽게 믿을 수 없다고 했다. 원전이 지진 규모 6.5에 견딜 수 있게 설계됐다지만 지은 지 수십년이 지난 현재까지 그 성능을 유지하는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1982년 11월 발전을 시작한 월성 1호기는 이미 2012년 설계수명(30년)을 넘겼다. 2015년 원안위는 시민·환경단체의 반발에도 ‘투표’를 통해 월성 1호기 수명을 2022년까지 연장했다. 경주 시민 2100여명은 원안위를 상대로 ‘월성 1호기 수명연장을 위한 운영변경 허가처분 무효확인’ 소송을 낸다. 올해 2월 1심 법원은 월성 1호기 수명연장 처분을 취소하라고 판결했다. 원안위는 이에 불복해 항소했고, 5월26일 현재 월성 1호기는 여전히 돌아가고 있다.
박경애씨는 규모 5.1 지진이 난 지 9분 뒤에야 국민안전처로부터 ‘지진 났다. 조심하라’는 긴급재난문자를 받았다. 이마저도 받지 못한 사람들도 있다. 박경애씨 제공
큰 지진을 겪은 지 일주일 만인 9월19일 규모 4.5 지진이 또다시 평일 저녁을 흔들었다. ‘아무도 나를 도와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됐기에, 두려움은 더 커졌다. 황성동 18층 아파트를 나선 윤정임씨는 지진 대피장소인 황성공원에 텐트를 쳤다.
“와 자꾸 텐트를 치는데요? 안 불안한 사람이 어디 있능교? 너도나도 다 나오면 어찌 되겠능교?” 사흘 만인 23일 공원관리사무소 직원이 정임씨를 윽박질렀다. 한 시의원이 ‘관광객이 줄어드는 원인’으로 황성공원 텐트촌을 지목했다. 경주시는 9월30일 황성공원 내 ‘야영행위’는 도시공원 및 녹지 등에 관한 법률 위반이라며 자진철거를 요구하는 계고장을 보냈다. 야영을 하는 게 아니라 대피 중이라는 시민들에게 경주시 국장급 공무원은 “이제 더 큰 지진이 안 난다”고 단언했다. 10월5일 아라키 준씨가 참여한 지진 피해 극복을 위한 토론회에선 ‘경주 지진이라는 명칭 대신 동해안 지진이라는 명칭을 쓰도록 해 특정 지역에 피해가 가지 않도록 해야 한다’ ‘첨성대가 무사했던 만큼 경주는 안전하다고 표현해야 한다’는 의견이 나왔다.
9·12 지진 이후 8개월이 지나면서 공포와 불안을 겉으로 드러내는 사람들은 많지 않다. “기냥 마 죽을란다”는 어르신들도 있다. 삶을 이어가야 할 터전이기에, 지진이니 원전이니 하는 것을 차라리 모르는 편이 낫다고 여긴다. “사람들은 생소했던 지진에 대한 정보를 얻고, 위로받기를 원했다. 문화센터에 오는 많은 사람들은 지역 온라인 모임에서 지진 정보를 확인한다고 했다. 그런데 여진이 그치지 않으면서 갈등이 생겼다. 불안을 조성하니 온라인 모임에 지진 글을 올리지 말라는 의견이 올라오기 시작했단다. 이런 것조차 논란거리가 되는 건 이미 모두가 과민하다는 뜻이다.” 최정진씨의 분석이다.
공포에 맞서는 방법
지난해 10월12일 경주 인문학 책방 ‘노닐다’에는 50명이 넘는 사람들이 북적였다. 반핵활동가인 동국대 의대 김익중 교수의 강연을 듣기 위해 모인 이들이다. 특히 아이를 데리고 온 30~40대 젊은 여성들이 많았다. 정부와 경주시가 눈에 보이는 피해를 수습해 나갔지만,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 컸던 것이다. 스스로 안전하게 살 수 있는 법을 찾는 사람들이 늘어난 건 9·12 지진 이후의 변화다. 경주환경운동연합 회원인 박경애씨는 앞서 1년 넘게 시내 곳곳에서 ‘월성 1호기 폐쇄’를 촉구하는 피켓 시위를 했다. 냉랭한 시선을 보내던 사람들이 이젠 질문을 쏟아낸다. “경주에 원전이 그렇게나 많았어요?”
생활협동조합인 경주아이쿱은 그해 11월2일 ‘일본 엄마들의 지진 대처법’이란 주제로 특별강연을 열었다. 강사는 1999년부터 2012년까지 13년간 일본에서 아이를 키우며 생활한 김형미 아이쿱생활협동조합 연구소장이었다. 강연을 들은 윤정임씨는 일본의 체계적인 재난 대비 시스템에 놀랐다. “일본에선 가족들이 대피소에서 만나는 게 원칙이다. 학교에선 학생들을 학년과 반이 아닌, 사는 동네별로 분류해 지역별 인솔자가 대피소까지 데려다준다. 평일 낮 여진이 닥친 경주에서는 부모들이 아이를 데리러 학교 앞에 모여들었고, 학교는 아이들을 조기 귀가시키면서 서로를 찾아 헤매는 가족들로 아수라장이 됐다.”
이창희씨는 두 딸이 지진을 대하는 것을 보고 교육의 중요성을 깨달았다. “일곱살 큰아이는 땅이 흔들려도 아무렇지도 않다. 다섯살배기 작은 아이는 불안해하며 엄마 품을 벗어나려 하지 않는다. 큰아이는 일본에서 유치원을 다녔는데 한 달에 한 번씩 방재훈련을 받았다. 보호구를 착용하고 줄지어 대피하는 훈련을 몸으로 경험한 것이다.”
정부는 지난해 12월 △지진 경보시간 단축 △내진설계 의무화 주택 확대 △지진 매뉴얼 개선 및 훈련 실시 △주요 단층조사 △원전 내진성능 재평가 등 지진 방재 종합대책을 내놓았다. 그러나 9·12 지진을 경험한 사람들에게 ‘손에 잡히는’ 변화는 없었다. 또다시 큰 규모의 지진이 온다면, 8개월 전과 같은 아수라장이 될 것이라고 했다.
“첫 지진 때보다 규모 4.5 지진이 났을 때 사람들이 더 많이 거리로 나왔다. 지진 방재 전문가가 필요하다. 당장 지진을 잊지 않도록 끊임없이 학교나 주민센터에서 교육을 해야 한다. 그런데 지금까지 단 한번의 훈련이 없었다.”(윤정임)
“초등학교 건물이 흔들리면서 마감재에 들어간 석면가루가 떨어져 아이들의 건강을 위협하고 있다. 여진이 계속되고 있는데도 석면 마감재 교체가 더디다. 여전히 안전이 우선순위에서 밀리는 거다.”(최정진)
“10년에 한번 올까 말까 한 지진이라도 그 한번의 피해를 줄이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야 한다. 왜 우리는 뒷북 문자를 사전예보 경보음으로 바꾸지 못하는가? 수동정지 됐다 재가동이 승인된 월성 원전에 대해 우리는 얼마나 관심을 갖고 있나?”(이창희)
국내에서 2016년 발생한 규모 2.0 이상 지진은 모두 254차례다. 이 가운데 58회의 지진은 9·12 경주 지진과 무관했다. 지난 5월25일 오전 11시20분에도, 충남 태안군 서격렬비도 109㎞ 해역에서 규모 3.0 지진이 있었다.
경주/박현정 기자 saram@hani.co.kr
※참고자료: <현관 앞 생존배낭>(권오민 외·2017), <9·12 지진백서>(국민안전처·2017)
9·12 경주 지진을 온몸으로 경험한 16명의 사람들은 <현관 앞 생존배낭>이라는 책을 펴냈다. 최정진씨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