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16 및 12·12 쿠데타로 약 26년간 지속되던 폭압적인 군사 독재정권을 종식시킨 6월항쟁은 시민혁명이었습니다. 청년 학생과 시민, 노동자 등 숱한 민중이 항쟁의 주역이지만, 이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데 결정적인 연료를 제공한 두 명이 있습니다. 당시 재야의 지도자였던 이부영 전 의원과 김정남 전 청와대 교육문화수석이 그들입니다. 옥중에서 ‘진실의 무기’(편지)를 만들어 시민들에게 나눠줬던 얘기를 들어봤습니다. 두 사람 대담은 지난 2일 오후 서울 명동성당에서 했으며, 개별 인터뷰도 별도로 했습니다.
친구 사이인 김정남 전 청와대 교육문화수석(왼쪽)과 이부영 전 의원은 1987년 6월항쟁 당시 명동성당은커녕 최루탄이 날던 거리에도 한번 나서지 못했다. 수배 중이던 김정남은 피난처 바깥으로 나오지 못했으며, 이부영은 영등포교도소에 수감돼 있었다. 하지만, 두 사람은 6월항쟁에 불을 붙인 심지이자 숨은 주역이었다. 두 사람이 6월항쟁 30주년을 앞둔 지난 2일 6월항쟁의 중심지였던 명동성당 앞에 서서 당시를 회상하고 있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그때는 하루하루 피가 마르는 심정이었어요.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만 바라보고 있었죠.”(김정남)
“감옥에서 하루도 편히 발 뻗고 잠을 못 잤죠. 언제 어떻게 발표가 날까 매일 매 시각 촉각을 곤두세웠죠.”(이부영)
지난 2일 서울 명동성당 들머리에서 만난 두 사람은 언덕 위에 솟은 성당 건물을 지그시 올려다봤다. 명동성당은 30년 전인 1987년 6월10일부터 15일까지 청년 학생들과 시민 수백명이 농성 투쟁을 하는 등 6월항쟁의 중심이었다. 전두환 정권이 강제진압을 하려 하자, 김수환 당시 추기경이 “학생을 체포하려거든 나를 밟고, 그다음 신부와 수녀들을 밟고 지나가라”며 단호히 맞섰던 곳이다. 한 중년 여성이 이부영(74) 전 열린우리당(더불어민주당의 전신) 의장에게 다가와 인사하면서 휴대전화로 기념촬영을 요청했다. 계단을 오르던 김정남(74) 전 청와대 교육문화수석(이하 호칭 생략)이 “이부영의 인기가 아직 여전하네”라고 말했다.
친구 사이인 김정남과 이부영은 1987년 6월항쟁 당시 명동성당은커녕 최루탄이 날던 거리에도 한번 나서지 못했다. 수배 중이던 김정남은 은신처 바깥으로 나오지 못했으며, 이부영은 영등포교도소에 수감돼 있었다. 하지만, 두 사람은 6월항쟁에 불을 붙인 심지였다.
6·10대회 등 항쟁 기폭제 된 천주교사제단 5·18 성명서 이부영 ‘감옥 편지’가 초석 김정남이 막후 기획 완성
영등포교도소 있던 이부영 보안계장 제보로 편지 작성 한재동-전병용 교도관 라인 김정남에 체포 이틀전 전달
고영구 변호사 집에 만세가 터지다
1987년 1월19일 박종철군 고문치사 사건과 관련해 조한경·강진규 등 고문 수사관들이 구속수감되고 있다. 6월민주항쟁계승사업회 사진집
전두환 독재정권이 막바지로 치닫던 1987년 1월14일 서울 남영동 치안본부(현재의 경찰청) 대공분실에서 조사받던 박종철(21살·서울대 언어학과 3학년)이 경찰의 물고문 도중 숨졌다. 공권력에 의한 젊은 대학생의 죽음에 국민들은 분노했다. ‘2·7 고 박종철군 범국민 추도대회’와 ‘3·3 고문 추방 국민평화대행진’이 서울과 부산, 광주 등 전국 주요 도시에서 동시에 열렸다. 시민들이 반정부 시위에 참여하는 새로운 현상이 나타났지만, 정권은 오히려 시위 확산을 성공적으로 차단했다고 판단했다. 대통령 전두환이 4월13일 특별담화를 통해 그 전해부터 불붙기 시작한 국민들의 직선제 개헌 요구를 묵살한 것은 이런 맥락에서였다. 대통령 간선제를 유지하겠다는 4·13 호헌조처에 각계각층의 저항이 거세게 일기 시작했다. 하지만, 역사는 폭발의 계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1987년 6월15일 수녀들이 명동성당 앞에서 민주화를 향한 간절한 소망의 기도를 올리고 있다. 6월민주항쟁계승사업회 사진집
일촉즉발의 긴장감만 감돌던 5월18일 저녁 명동성당에는 월요일인데도 성경책을 든 신자들이 조용히 모여들었다. 1980년 광주항쟁 희생자들을 추모하기 위한 특별미사를 올리기 위해서였다. 추기경이 집전하는 미사가 끝난 뒤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의 신부 김승훈이 단상에 올랐다. 김승훈은 십자가를 향해 허리 굽혀 절을 했다. 얼마나 간절한 절이었던지 제의가 벗겨져 김승훈의 머리를 덮었다. 마이크 앞에 선 그는 “박종철군 고문치사 사건의 진상이 조작되었다”는 성명서를 읽었다. 그의 목소리는 떨렸다.
3120자로 된 이 성명서가 가져온 파장은 막강했다.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에 대한 재수사로 범인 3명과, 은폐 조작에 관여한 대공수사단장 박처원 등 경찰 간부들이 구속됐다. 또, 전두환 후계자였던 국무총리 노신영과 정권 2인자였던 국가안전기획부장 장세동 등 정권 주축이 물러났다. 정권에 대항하는 시민 진영은 더 단단해졌다. 학생과 재야단체, 야당이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국본)라는 범국민적인 단일 조직으로 뭉쳤다. 이후 ‘6·10 범국민대회’와 ‘6·18 최루탄 추방대회’, ‘6·26 평화대행진’ 등 본격적인 6월항쟁이 이어졌다. 5월18일 사제단 성명서는 6월항쟁의 동력이었다.
김정남 전 청와대 교육문화수석이 지난 2일 명동성당에서 1987년 6월항쟁 당시 상황을 얘기하고 있다. “박종철군 고문치사 사건 범인은 조작됐다”는 내용의 당시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 성명서 초안을 작성했던 그는 이날 인터뷰에서 “6월항쟁이 없었다면 민주화 과정에서 더 많은 학생과 시민들의 희생이 있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이부영 전 의원이 지난 2일 명동성당에서 1987년 6월항쟁 당시 영등포교도소에서 “박종철군 고문치사 사건의 범인이 조작됐다”는 내용의 비밀 편지를 쓴 과정을 밝히고 있다. 그는 “민주 교도관들의 도움을 보면서 민주화를 확신했다”고 말했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정의구현사제단 성명서는 이부영과 김정남 손에서 태어났다.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을 정권이 조작하고 은폐했다는 비밀 편지를 이부영이 감옥에서 오랜 친구이자 민주화운동 동지인 김정남에게 보냈으며, 김정남은 이를 토대로 성명서 초안을 만들어 정의구현사제단을 움직였다.
-두 분 모두 역사적 현장에는 없었는데요.
김 “이부영을 도피시킨 혐의로 당시 나도 수배 중이었어요. 역촌동에 있는 고영구(80) 변호사 집에 숨어 있었는데 그날 저녁 5·18 특별미사에 다녀온 고 변호사의 부인 황숙자 여사(2007년 작고)가 집에 들어서자마자 ‘오늘 드디어 했다’면서 만세를 부르고 박수를 쳤어요. 그 모습을 보면서 아, 됐구나 하는 안도감이 들더군요.”
“시험에 들지 말게 해달라” 야당 의원의 거절
한해 전인 1986년 5·3 인천사태의 배후 조종 혐의로 수배 중이던 민통련(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 사무처장 이부영에게 친구인 김정남이 은신처를 마련해줬다. 당시 김정남은 주요 민주인사들의 옥바라지와 뒷수습 등을 책임지는 민주화운동의 ‘막후 조율사’였다. 이부영이 최종적으로 머문 곳은 변호사 고영구의 역촌동 집이었다. 노모를 모시고 있는 고영구의 처지를 감안해 두 사람은 체포되면 원로 변호사 이돈명 집에 있었던 것으로 말을 맞췄다. 설마 원로를 구속하랴 싶어 낸 꾀였으며, 이돈명도 흔쾌히 동의했다. 하지만, 검찰은 이돈명도 범인 은닉 혐의로 구속하고, 김정남을 같은 혐의로 수배했다. 고영구는 이부영이 잡히고 얼마 뒤 김정남을 다시 자기 집으로 불러 숨겨줬다.
1987년 5월18일 광주항쟁 7주년 특별미사에서 발표된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의 성명서 초안. “박종철군의 고문치사 사건의 진상이 조작되었다”는 내용의 이 성명서는 김정남 전 청와대 교육문화수석이 작성한 것으로, 이번에 처음 공개됐다. 김정남 전 수석 제공
이부영 당시 민통련 사무처장이 1987년 영등포교도소에서 써서 비밀리에 김정남씨에게 보낸 편지. ‘박종철 군 고문치사 사건의 범인이 조작됐다’는 내용의 이 편지는 6월항쟁의 도화선이 됐다. 서울 남영동 박종철기념관에 전시되어 있는 편지 4통은 복제본이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이 “영등포교도소에서 편지를 밖으로 내보낸 뒤 어떻게 발표될까 걱정 반 궁금증 반으로 바깥 소식에 마음을 졸이고 있었어요. 사제단이 성명서를 발표한 며칠 뒤 한재동 교도관이 보도가 난 신문 쪽지를 몰래 가져다가 보여줬어요. 그제서야 일이 성사됐구나 알았지요. 그 뒤에 개각과 관련자 구속 등이 숨가쁘게 이어지고, 6월 들어가면서 데모가 확 불이 붙길래 ‘이제는 나에게 역추적은 안 되겠구나’라는 생각이 들면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죠.”
-성명서가 그날 발표되는지 알지는 못했다면서요?
김 “5·18 특별미사를 한다길래 기회가 되지 않을까 생각은 했는데 그날 할지 여부는 몰랐어요. 황 여사와 딸인 고은영(51)씨를 통해 명동성당 등으로 김수환 추기경과 함세웅(74) 신부한테 편지를 여러 차례 보냈으나 답이 없었거든요. 사제단을 신뢰하고 있었기에 일이 성사되리라 믿기는 했지만, 초조할 수밖에 없었죠.”
김정남은 성명서를 처음에는 야당(통일민주당, 동교동계와 상도동계가 함께 만든 당) 의원을 통해 국회에서 발표하려고 했다. 친분이 두터웠던 김덕룡과 홍사덕에게 국회 대정부질문 때 질의할 의원을 찾아달라고 부탁했다. 두 명은 그 내용으로 질의하겠다는 의원을 찾았다면서 원고를 써달라고 말했다. 하지만, 얼마 뒤 미안하다는 통보를 받았다. 해당 의원이 내용이 얼마나 심각한지를 알고는 ‘나를 시험에 들지 않게 해달라’면서 거절했다는 말을 들었다.
김 “그 야당 의원이 비겁하다고 지금도 생각하지 않아요. 자세한 정보 출처를 말해줄 수가 없었던데다가 내용이 정권을 무너뜨릴 수 있는 것이었으니 정말로 위험한 일이었거든요. 당시 김수환 추기경조차 사제단의 발표를 앞두고 ‘정말 조심해야 하는데’라고 여러 번 걱정하는 말을 했을 정도였어요. 어쨌든 이제 마지막으로 기댈 곳은 사제단뿐이었죠. 사제단은 최종길 교수 고문 사망 의혹 사건 폭로(1974) 때나 1975년 인혁당 사건 조작 문제 제기 때도 제가 쓴 성명서를 발표해주고, 저를 보호해줬거든요. 함세웅 신부한테 마지막으로 편지를 쓰면서는 최악의 경우는 수배 중인 김정남이 모든 것을 취재해서 보낸 거다, 우린 그 사람을 믿기에 발표한다고 밝혀도 좋다고 했어요.”
함세웅 신부가 지난달 30일 서울 경운동 ‘6월민주항쟁30년사업추진위원회’ 사무실에서 한 인터뷰에서, 6월항쟁 당시 명동성당에서 있었던 5·18 특별미사에서 박종철군 고문치사 사건이 조작됐다는 내용의 성명서를 발표한 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함 신부는 “당시 5월17일 김정남씨가 편지를 보내 ‘신부님들이 십자가를 져 달라’고 간곡하게 요청해 최종 결심하게 됐다”고 말했다. 김종철 선임기자 phillkim@hani.co.kr
“신부님이 십자가를” 함세웅을 울린 편지
김정남이 이부영으로부터 ‘비둘기’(감옥에서 몰래 보내는 편지)를 맨 처음 받은 것은 3월15일쯤이었다. 그는 편지 내용을 토대로 지나간 신문 보도 등을 참고해서 3월말~4월초에 원고지 18매짜리 성명서 초안을 완성했다. 이 초안을 서울교구 홍보국장을 맡고 있던 신부 함세웅에게 보냈다. 추기경에게도 대략적인 내용과 경위를 보냈다. 고영구의 부인 황 여사와 딸 은영이 양쪽을 수십차례 오갔다. 김정남은 30년 만에 성명서 초안을 이번에 처음으로 언론에 공개했다.
함세웅(‘6월민주항쟁 30년사업 추진위원회’ 경운동 사무실, 5월30일 인터뷰) “김정남씨가 이부영이 그런 소식을 보냈다고 하면서 사제단에서 발표를 검토해달라고 요청했어요. 그러겠다고 속으로 다짐하면서 내부적으로 의논했지요. 김수환 추기경과 상의를 했는데 추기경께서는 걱정을 하시더군요. 대담하고 과감하게 마땅히 해야 할 일이긴 한데 혹시 1975년 인혁당 관계자들에 대한 구명운동처럼 되는 거 아닌지 모르겠다면서요. 박정희 정권 때 인혁당 구명운동을 하니까 재판이 끝나자마자 정권이 목숨을 빼앗아간 사례를 들면서 전두환 정권도 포악한 정권인데 그 경찰관 두 명을 감옥에서 죽이면 어떡하냐고 말이죠. 그러는 중 한편으로는 유현석, 황인철 변호사와 만나 김정남 초안을 토대로 성명서를 다듬어 최종본을 완성했어요. 하지만, 발표를 선뜻 결정하지는 못하고 있었어요. 저도 솔직히 겁이 나서 시기를 엿봤죠.”
-언제 최종적으로 결정한 건가요?
함 “주일날인 5월17일이었어요. 당시 주일에는 제가 구파발 성당에 미사를 집전하러 갔거든요. 그런데 그날 거기까지 황 여사가 쫓아왔어요. 더 피할 수 없구나 싶어 깜짝 놀랐죠. 황 여사가 가져온 김정남씨 편지에는 ‘이게 참 중요한 사건이고, 사제단이 이 책무를 맡아야 된다, 그리고 우리 민족의 운명이 사제단의 어깨에 있다, 이것을 공개하면 포악한 전두환 정권을 붕괴시킬 수 있다, 전두환 정권을 물리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이것을 공개하는 것이다, 이 일을 신부님들이 감당해야 한다, 십자가를 져야 한다’는 내용이었어요. 그것을 읽고는 ‘그래, 할 수밖에 없구나’ 결심했지요.”
함세웅은 야당을 통한 폭로가 무산된 것을 알고는 추기경과 상의하면서 5·18 특별미사를 준비했다. 2부에서는 사제단의 성명을 발표한다는 잠정 계획이었다. 당일 기자들에게 미사 뒤에 뭔가 중요한 게 있을 것이라고 예고도 했다. 만일의 경우에 대비해 전주의 문정현 등 사제단의 다른 신부들에게도 참석을 요청했다. 여차하면 대신 낭독할 사람들이었다.
-그 편지 역시 명문이었군요. 그 편지를 보관하고 있는지요?
함 “그때는 증거를 남기면 안 되니까 읽고는 바로 불태워 없앴죠. 아무튼 그날 미사 뒤에 곧바로 홍제동 성당으로 김승훈 신부님한테 갔지요. 그런데 김 신부님의 어머님이 눈치를 채고 자리를 비켜주지 않는 거예요. 우리 둘이 만나면 뭐 뻔하니까요. 제가 ‘둘이 할 얘기가 있으니 어머님 나가세요’ 했더니, ‘내가 다 알아’ 하면서 안 나가시는 거예요. 그러다가 어머니가 ‘어제 꿈을 꿨는데 우리 아들이 웅덩이에 빠졌다, 기도를 하니 성모님이 아들을 구해줬다’면서 ‘내가 함 신부가 우리 아들 신부한테 하는 얘기 다 알어 그러니 있어야 해’ 하길래, ‘성모님이 구해줬으니 됐잖아요, 그러니 걱정 말고 가세요’라고 권해서 다른 방으로 모셨어요.
김 신부님한테 그동안의 과정을 자세히 말씀드리고 ‘내일 미사가 끝나자마자 성명서 발표는 신부님이 하세요, 그리고 모든 책임을 지셔야 합니다’라고 얘기했죠. 김 신부님은 기쁘게 ‘내가 이번에 책임지마’라고 하셨고요. 그때는 구속을 각오했지요. 저는 홍보국 사무실에 온 뒤 성명서 1천장을 복사하도록 했어요. 그러고는 밤 11시반쯤 김수환 추기경께 갔는데 다음날 할 강론을 쓰고 계셨어요. 평소와 달리 강론을 저한테 보여줬는데 제가 그동안 읽고 들은 추기경님 강론 중에 제일 강했어요. 저는 ‘좋습니다’ 하고는 ‘내일 이렇게 합니다’라고 계획을 말씀드렸어요. 추기경은 저들이 경찰관들을 죽이면 어떻게 하느냐고 또 걱정을 하시더군요. 저는 ‘그렇게는 못 합니다. 아무리 독재여도 절차 없이 두 사람을 막 죽이지는 못한다고 변호사들이 확신하고 있습니다, 내일 추기경님은 미사 뒤에 빠지시면 우리가 그다음에 알아서 하겠습니다’라고 말씀드리고 나왔어요.”
1987년 6월11일 시위대 일부가 명동성당 앞 주차장에서 잠시 휴식시간을 내고 어깨춤을 추고 있다. 6월민주항쟁계승사업회 사진집
1987년 6월14일 보다 못한 어머니들이 전경들에게 장미꽃을 꽂아주며 최루탄 발사를 중지하도록 부탁하고 있다. 6월민주항쟁계승사업회 사진집
보안계장 안유의 용감한 제보
이부영이 영등포교도소에서 “友村(우촌·김정남의 아호)前(전), 모든 것은 잘 돼 가는 줄 아네. 오늘은 아주 중요한 이야기가 있어 급히 몇자 적어 보내네. 박군 건으로 구속된 조·강 건은 완전 조작극이야.”로 시작되는 첫번째 편지를 쓴 때는 그해 2월23일이었다. 박종철 고문 살인범으로 구속된 조한경과 강진규가 진짜 범인이 아니며(재수사 결과 조와 강 역시 고문에 가담한 것으로 최종 밝혀짐), 진범 3명은 따로 있다, 조와 강이 심경 변화를 일으키자 경찰이 입막음하려고 시도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3월1일자로 쓴 추신에서는 “직접 범인의 이름은 조의 반원으로서 경위 황정웅, 경사 방근곤, 이정오 경장”(반금곤과 이정호의 오기)이라고 적었다. 또, 2월27일 검사 안상수가 찾아와 조한경으로부터 그러한 내용을 다 파악한 뒤 “어느 쪽이 유리한지 잘 알아서 판단하라”고 윽박질렀다는 사실도 전했다. 은폐·조작된 핵심적인 내용이 고스란히 담겼다.
이부영은 두 경찰관이 의정부교도소로 이감(3월7일)된 후에도 추가로 알아낸 내용을 4월3일과 4월7일치 편지에 담아 김정남에게 전달했다. 이부영은 편지에서, 한두 신문에 제보해서 당국의 조작 내용이 알려지도록 하는 방법을 제안했다. 하지만, 김정남은 더 안전한 방식인 야당 의원이나 정의구현사제단을 통한 폭로를 기획했다.
-교도소에서 어떻게 그런 내용을 다 파악했어요?
이 “어느 날 낮에 안유(72) 보안계장이 면담하자고 나를 부르더군요. 안 계장은 1970년대 <동아일보> 자유언론선언 사건으로 내가 서대문구치소에 수감돼 있을 때부터 알던 사이인데, 교도소에 문제가 있으면 나를 가끔 불렀어요. 시위로 잡혀 들어온 대학생들이 교도소에서도 가만히 있지 않았거든요. 학생들을 좀 달래달라고 부탁하곤 했어요. 바깥의 시위에 맞춰서 나도 동조 단식을 하던 때였어요. 그는 나에게 ‘단식을 이제 그만하라, 학생들 좀 조용히 있게 해달라’고 요청하더군요. 그러다가 안 계장이 정색을 하면서 ‘큰일났다, 이러다가 나라 망하겠다’고 하더군요. 무슨 소리냐고 물었더니 ‘자기들이 고문해서 (박군을) 죽여놓고 그것을 조작했다, 가장 중요한 수사기관에서 조작하고 거짓말하니 나라 망하는 것 아니냐’면서 자기가 직접 보고 들었던 일을 쭉 얘기하더군요. 메모를 할 수도 없고 해서 기억을 했지요. 그러고는 안 계장에게 ‘여보게, 자네 나한테 이 얘기를 안 한 것으로 하자, 나와 면담한 기록도 다 없애라’고 했어요.” 그해 1월20일 사건이 검찰로 넘어감에 따라 조한경과 강진규는 영등포교도소에 입감됐다. 이들이 배치받은 여사동에는 공교롭게도 이부영이 먼저 들어와 있었다. 이부영은 처음에 이들에게 “젊은 학생을 고문해서 죽게 한 게 말이 되느냐. 그러나 알고 보면 당신들도 독재의 희생자다. 당신들에게 무리한 일을 시킨 그들이 잘못이다. 그러니 젊은 학생의 명복을 빌어주라”고 훈계하기도 했다. 별 반응이 없었지만, 수감 직후부터 그들 방에서는 찬송가와 성경 읽는 소리(조한경)나 흐느껴 우는 소리(강진규)가 자주 들렸다. 가족이 면회 온 날은 더 심했다. 두 명은 시간이 갈수록 더 흔들렸으며, 가족들에게 ‘모든 진실을 털어놓겠다’고 말했다. 이런 소식을 들은 경찰은 경정 유정방 등 대공수사단 간부와 동료들을 보내 이들을 압박하고 회유했다. ‘그대로 입을 다물고 있으면 조기에 석방되도록 해주고, 목돈도 만들어 주겠다’(실제로 박처원 치안감은 4월2일 면회에서 조한경과 강진규 명의로 각각 1억원씩 예금된 통장을 보여줌)고 했다. 앞서 경찰은 자신들의 면회에 교도관이 참관하지 말 것을 요구했다. 규정을 들어 교도소 쪽이 거부하자, 경찰은 중견 간부가 입회할 것과 내용을 일체 기록하지 말 것을 요구했다. 보안계장 안유가 유정방 등의 면회에 참관하게 된 이유였다.
이틀 늦었더라면 역사 다를 수도
-딥스로트(비밀 제보자)는 안유 계장이었군요. 그가 얘기한 것은 혹시 실수 아니었나요?
이 “세월이 많이 지난 뒤 안유한테 ‘나한테 얘기하면서 그 내용이 밖에 나갈 줄 몰랐느냐’고 물어봤어요. 그랬더니 그가 ‘형이 그걸 가만히 묻어뒀겠어?’라고 반문하더군요. 그 소식이 바깥으로 전해질 것을 그도 짐작하고 있었던 거죠. 그는 참 양심적이었고, 민주인사들에게 잘 대해줬어요. 그가 현직에 있을 동안에는 일체 얘기를 안 했다가 지난 2012년 25주년 때에야 얼굴을 공개했죠. 그 뒤 퇴직 간부들이 그를 왕따시킨다고 해요. 상을 주지는 못할망정 배신자라고 욕한다는 얘기를 들으니 마음이 많이 아프죠.”
-편지는 언제 쓴 건가요?
이 “안유를 만나고 난 뒤 내 방으로 돌아와서 그날 저녁 근무자인 한재동(70) 교도관을 불렀어요. 교도관들은 근무지를 자기들끼리 융통성 있게 바꿀 수가 있었어요. 한재동 교도관 역시 그전에 징역살이할 때부터 친했는데 정의감이 아주 강한 사람이었어요. 그에게 필기구와 종이를 달라고 부탁했더니 재생갱지와 볼펜 심(옥방에서는 감추기 쉬운 심을 주로 사용)을 구해주더군요. 기억나는 대로 적어 김정남씨에게 전해달라면서 한재동씨에게 건네줬지요. 다른 교도관들에게 그 후 상황을 들을 때마다 편지를 써서 내보냈어요. 당시 영등포교도소는 김성진 법무장관이 방문(2월28일)해서 보안을 강조할 정도로 비상이었어요. 편지를 잠시라도 방 안에 둘 수가 없었거든요. 물론 안유와 한재동 두 사람에게는 서로에 관한 얘기는 일절 하지 않았죠. 두 명 다 나를 따로 돕고 있었지만, 서로의 존재를 알아서 좋을 일은 없잖아요.”
한재동은 도피 중인 김정남의 소재지를 알 길이 없었다. 할 수 없이 교도관 동료였던 전병용(71)에게 전했다. 이른바 ‘민주 교도관’이었던 전병용도 수배 중이었다. 그즈음 교도관을 그만둔 전병용은 연희동 집에 김정남의 요청으로 이부영과 장기표 등을 숨겨줬다가 장기표가 붙잡히는 바람에 그도 범인 은닉 혐의로 쫓기고 있었다.
-전병용씨한테 편지를 받은 때가 3월15일쯤이었다고요?
김 “전병용씨 공소장을 보면 그가 경찰에 체포된 게 3월17일입니다. 나랑 만나고 이틀 뒤에 체포됐으니 15일이었을 거예요. 그 전날 밤에 저는 미국 이민 갔다가 귀국한 친구 이영철(연세대의 6·3 사태 주역)을 만나서 서초동의 유원호텔에서 같이 지냈어요. 그러고는 아침에 고 변호사 댁으로 들어가려던 참에 전병용씨 생각이 나서 전화를 했지요. 그랬더니 ‘그렇지 않아도 며칠 동안 전화를 기다렸다. 당장 만나자’고 하더군요. 호텔로 오라고 해서 만났더니 이부영이 보냈던 편지 2통(2월23일과 3월1일치 추신)을 보관하고 있다가 한꺼번에 건네줬어요. 그 이틀 뒤에 그가 잡혔으니 그때 생각하면 정말 아찔하죠. 그 뒤에는 한재동씨한테 직접 받았고요.”
시민들의 거센 항쟁에 정권은 결국 6월29일 민정당 대통령 후보 노태우가 대통령 전두환에게 건의하는 식으로 민주화 선언을 했다. 사실상의 항복 선언이었다. 이후 야권이 김대중과 김영삼으로 분열돼 그해 12월 대선에서 전두환의 후계자인 노태우에게 패하긴 했지만, 6월항쟁은 1960년 4·19 혁명에 이은 시민들의 승리였다. 6·29 선언 뒤 김정남은 수배 해제로 집으로 돌아갔으며, 이부영은 김천교도소로 이감됐다가 1988년 초 노태우의 대통령 취임 특사로 풀려났다.
-6월항쟁의 의미를 어떻게 보시는지요?
김 “6월항쟁은 황국자 여사와 교도관들 등 보이지 않는 많은 사람들, 즉 민중의 힘으로 성공했어요. 지난겨울과 올봄에 이어진 촛불혁명과 비슷하죠. 한마디로 민중이 이뤄낸 쾌거였어요. 양김 분열 등으로 아쉬움이 있지만, 그때 6월항쟁이 없었더라면 민주화 과정에서 시민과 학생들의 희생과 고생이 더 많았을 거라고 봐요. 김대중씨가 6·29 선언 직후 ‘인간에 대한 신뢰를 느낀다’고 했는데, 그런 점에서는 저도 영예로운 역사라고 생각해요.”
1987년 6월8일 한 외신기자가 방독면을 쓰고 시위현장에서 기사를 송고하고 있다. 6월민주항쟁계승사업회 사진집
“부영이 친구, 애썼어”
이 “4월 항쟁과 80년 광주 희생, 87년 6월항쟁이 있었기에 이번에 촛불 시민혁명이 성공했죠. 그때 나를 믿고 교도관들이 아는 것을 얘기해주고, 그 위험한 편지를 운반해주는 것을 보면서 이런 사람들이 있는데 민주화가 왜 안 되겠냐는 생각을 했어요. 그런 시민의 힘으로 그 뒤 두 차례의 정권 교체에 이어 이번에 거대한 촛불 평화시민혁명이 가능했죠. 과거의 지혜가 뭉쳐 비무장, 비폭력으로 승화했죠.”
-남은 과제라고 할까, 시민들이 관심을 둬야 할 부분은 어떤 게 있을까요?
이 “민중운동과 시민운동 뒤에는 이것의 정치·사회적 제도화가 필요합니다. 이 제도화 과정에 시민들이 계속 관심을 기울여야 해요. 6월항쟁 뒤에 정치권에만 맡겨놓은 결과 5년 대통령 단임제와 국회의원 소선거구제라는 이상한 조합이 만들어졌잖아요. 이번엔 그러면 안 됩니다. 이제는 촛불 든 사람들의 목소리가 제도화에 반영되어야 합니다. 헌법 개정과 선거구제 개편 등에 시민들의 목소리가 반영되도록 목소리를 내야 합니다.”
김 “그때 야권이 분열하는 바람에 결국 여러 정치적 우여곡절을 겪게 됐고, 그 때문에 기회주의가 득세하고 정의가 패배하는 사회를 바꾸지 못한 채 여기까지 왔다고 봐요. 이번 기회에 기회주의가 더는 자리잡지 못하도록 하고, 적어도 민주주의에 역행하는 일을 했던 사람들이 부끄러워할 줄 아는 사회를 만들어야 합니다. 저들이 잘했다고 떵떵거리는 사회는 반드시 바로잡아야 하는 것이 우리에게 남겨진 6월항쟁의 또 하나의 과제입니다.”
해직기자 출신의 이부영이 감옥에서 김정남에게 보낸 비밀 편지는 그의 말대로 그만이 쓸 수 있었던 “최대의 특종”이었다. 명동성당 문화관 뜰에서 대담을 마칠 즈음 “‘역사를 바꾼 편지’를 쓰고 그것을 국민에게 알린 두 분께 시민의 한 사람으로서 감사드린다”고 말했다. 김정남은 “애썼다”고 이부영에게 공을 돌렸다. 이부영은 “기자 때나 재야운동할 때나 중뿔나게 무엇을 한다고 생각하지 말고 서 있는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고자 했을 뿐”이라며 “우촌의 말대로 ‘오묘한 섭리’라고 할 수밖에 없는 천우신조가 있었던 것 같다”고 말했다.
김종철 선임기자 phillkim@hani.co.kr
김정남 전 청와대 교육문화수석(왼쪽)과 이부영 전 의원이 지난 2일 명동성당에서 1987년 6월항쟁의 의미와 앞으로의 과제에 대해 대화하고 있다. 김 전 수석은 “앞으로는 기회주의가 더는 득세하지 않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으며, 이 전 의원은 “촛불혁명이 완성될 수 있도록 정치·사회적 제도화 과정에 시민들이 참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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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부영은 누구?
<동아일보> 기자 시절 자유언론실천선언을 했다가 1975년 해직된 뒤 투옥돼 옥고를 치렀다. 이후 민중민주운동협의회 공동대표(1984),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민통련) 상임위원장과 사무처장(1985)을 지내는 등 대표적인 재야인사로 활동했다. 1986년 5·3 인천 사태 등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5차례 수감됐다. 1991년엔 이른바 ‘꼬마 민주당’ 부총재로 정계에 입문한 뒤 14, 15, 16대 의원을 지냈다. 1997년 대선 직전 합당으로 한나라당에서 의정활동을 하다가 2003년 김부겸, 김영춘 의원과 함께 탈당해 여당인 열린우리당에 합류한 뒤 당의장(2004)을 지내기도 했다. △1942년 서울 출생 △용산고, 서울대 정치학과 졸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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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남은 누구?
“찾을 수는 없지만, 그는 있어야 할 때, 있어야 할 곳에 항상 있었다.” 고은의 <만인보 12>에 실린 ‘김정남’이란 제목의 시 일부다. 1964년 6·3 사태로 감옥살이를 한 이후 그는 줄곧 재야에서 활동한 민주화운동의 ‘조율사’였다. 인혁당 사건의 진상조사, 김지하 시인의 양심선언, 박종철 고문치사 조작 폭로가 모두 그의 손을 거쳐 나왔다. “어떤 동맹국도 민족보다 더 나을 수는 없다”는 김영삼 대통령 취임사도 그가 썼다. 김영삼 정부 초 청와대 교육문화수석(2003)을 역임했다. <진실, 광장에 서다>(2005), <이 사람을 보라>(2012) 등 다수의 민주화운동사 책을 펴냈다. △1942년 대전 출생 △대전고, 서울대 정치학과 졸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