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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눈앞에서 이한열이 쓰러졌다”…1987년 6월 기록한 ‘어느 전경의 일기’

등록 2017-06-11 14:20수정 2017-06-11 21:24

당시 연세대 앞에서 시위대 막았던 최아무개씨
이한열기념사업회에 일기장·전경 사진 등 전달
“나와 같은 또래…아무것도 할수없어 미안하다”
이한열 열사 피격 당시 전경으로 근무했던 최아무개(당시 22)씨가 이듬해 작성한 일기의 일부분.
이한열 열사 피격 당시 전경으로 근무했던 최아무개(당시 22)씨가 이듬해 작성한 일기의 일부분.
1987년 6월9일. 연세대학교 정문 앞에서 직격으로 발사된 최루탄을 맞고 쓰러진 이한열 열사 앞에는 그와 비슷한 또래의 전투경찰들이 있었다. 거의 매일 연세대 앞에 나가 학생 시위대를 막았던 최아무개(당시 22)씨 역시 그 중 한명이다. 최씨는 매캐했던 최루탄 냄새로 기억되는 당시 상황을 일기장에 기록했고, 30년이 지난 2017년 5월 이한열기념사업회를 직접 방문해 일기장과 전경 생활의 모습이 담긴 사진 10여장을 전달했다. 최씨는 “그날을 기억하는 것이 너무 힘들다. 인터뷰를 하면 마음이 더 무거워질 듯 하다”며 <한겨레>의 거듭된 인터뷰 요청을 끝내 거절했다.

최씨가 기념사업회에 제공한 일기 내용 가운데 이한열 열사 피격 당시 상황을 기록한 부분과, 전투경찰로서의 고뇌가 담긴 부분을 추렸다. 최씨는 “우상호 더불어민주당 전 원내대표(당시 연세대 총학생회장)가 이한열로 인해 무거운 짐을 진 듯 살아왔다고 했는데, 충분히 공감이 가는 말이다. 586세대가 져야 할 시대의 무게였다”며 “시위를 막던 풍경, 전경으로서의 고뇌 등 일기의 면면을 충분히 봐달라”고 당부했다.

■ 87년 6월, 이한열을 기억하다

이한열 열사가 산화한 이듬해인 88년 3월, 최씨는 노란 표지의 일기장을 구해 그간 메모지에만 적던 단상을 본격적으로 기록하기 시작했다. 9개월이라는 시간이 흐른 뒤였지만 연세대 앞에서 시위를 진압했던 기억은 특히 생생했다.

“87년 6월9일! 6·10을 하루 앞두고 서울을 비롯해 전국의 대학들이 동시에 출정식을 가졌다. 당연히 연세대에서도 출정식을 하고 격렬한 시위가 있었다. 그때의 상황이야 지금 상세히 기억해낼 순 없지만 그날 한열이는 우리의 눈앞에서 쓰러져갔다. 당시 우리중대(45중대)와 44중대가 정문을 담당해서 sy44탄을 동시에 쏘았었다. 한 개 중대에 사수가 15명 정도 되니까 약 30명이 함께 쏘아서 그 중 한 발정도가 너무 각도가 낮았는지 한열이의 머리에서 터진 것이었다.”(88년 3월 일기)

“시커먼 방독면 사이로 뜨거운 눈물이 흐를때도 많았고 또한 격한 분노로 그들과 맞서 욕설과 돌팔매 싸움을 하기도 한다. 화염병에 맞아 온몸이 그을린 동료를 보기도 하고 최루탄에 맞아 쓰러지는 ‘이한열’이도 보았다. 그 사건이 온나라를 진동시킬 줄은 몰랐다.”(88년 4월 일기)

이한열 열사 피격 당시 전경으로 근무했던 최아무개(당시 22)씨가 이듬해 작성한 일기의 일부분.
이한열 열사 피격 당시 전경으로 근무했던 최아무개(당시 22)씨가 이듬해 작성한 일기의 일부분.
이한열 열사는 피격 한달여 뒤인 7월5일, 최루탄 파편으로 인한 뇌손상으로 인해 숨졌다. 최씨는 일기장에 이렇게 적었다.

“다음날 중앙일보 신문엔 피흘리며 쓰러진 채 부축되어 일어서는 한열이의 사진이 실렸고 상당히 비참하면서도 충격적이고 국민의 분노를 충분히 살만한 모습이었다.(중략) 격동의 한 시기에 나와 직접 연관된 굉장한 사건이 되어버렸다. 아직도 9개월 전의 그때 함성들이 머리를 울린다. ‘민주를 사랑하는 한열이를 살려내라!’ 우리들 다리를 부여잡고 친구를 살려내라고 피를 토하듯 울부짖던 그 학생들의 모습과 함께.”(88년 3월 일기)

■ 학생과 전경, 모두 시대의 피해자였다

최씨는 시위대 반대편에 서서 괴로워해야했던 자신의 모습도 일기장에 고백했다.

“더 솔직히 말하면 용감했던 것이 아니라, 나라의 치안을 위해 시위를 막은 것이 아니라, 일단은, 그 많은 군중앞에 내가 살아야겠다는 처절한 반항이었다. ‘자칫하면 죽는 전투경찰도 수도 없는데’라는 두려움과, 나라에 대한 걱정과, 나에게 돌을 던져대는 사람들에 대한 분노가 뒤섞여서 6월 한달은 제 정신이 아니었다.”(88년 3월20일 일기)

“‘민주’를 위하여 죽어간 수많은 젊은이들… 모두가 나와 같은 또래인데 도대체 난 부끄럽기 짝이 없다. 이 시대의 아픔에, 난 얼마나 같이 아파하고 어떻게 살아 왔는가! 내가 중년이 되어 나의 아들 앞에서 부끄럽지 않아야 한다. 바로 몇일전에도 서울대 젊은 친구가 명동에서 투신자살을 하고, 이 나라 한반도의 민주화를 촉구했다. 아- 이 슬픈 현실이, 이렇게 서러운 내 나라가. 난 아무것도 할수없음이 미안하다. 죽어간 친구는 나와 같은 나이던데… 잔인한 역사의 5월은 어느메쯤 나의 푸른 신록의 5월이 될 것인가.”(88년 5월18일 일기)

이한열 열사 피격 당시 전경으로 근무했던 최아무개(당시 22)씨가 이듬해 작성한 일기의 일부분.
이한열 열사 피격 당시 전경으로 근무했던 최아무개(당시 22)씨가 이듬해 작성한 일기의 일부분.
이한열 열사 피격 당시 전경으로 근무했던 최아무개(당시 22)씨가 이듬해 작성한 일기의 일부분.
이한열 열사 피격 당시 전경으로 근무했던 최아무개(당시 22)씨가 이듬해 작성한 일기의 일부분.
88년 12월29일. 최씨가 제대하면서 시위 이야기도 멈췄다. 최씨는 격동의 시기, 전경으로 보낸 2년6개월간의 소회를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다치기를 무려 4번! 나의 다리는 온통 꿰멘 자국이 수두룩하고 남은건 영광도 없는 상처뿐인가 싶다. (중략) 길거리에서 시커먼 얼굴로 식사하던 지긋한 그 생활들이 정말 싫었고 뜨거운 한 여름의 그 목마름은 또…그렇게 애를 먹었고, 많이도 싸웠는데 어떻게 난 보람이랄까, 자부심이란 것이 없고 오히려 수치심이 앞서는 것에 정말 화가 치민다.”(88년 12월29일)

글·사진 황금비 기자 withbee@hani.co.kr

<최씨 일기 원문>

■ 1988.3.20 일요일

87년 6월. 4월, 5월 초까지 잠잠하던 대학가의 상황은 중순부터 급속히 열기를 내뿜기 시작했다. 거의 연세대 정문앞에서 살다시피 하게됐다. 매일 시작도 끝도 없는 그들과의 싸움. 돌멩이와 최루탄과 자동차 경적소리. 구호소리 뒤범벅이 되면 이미 난 온몸의 허탈함과 절규하듯 나라가 이렇게 나가선 안된다는 울부짖음을 토해내기도 한다.

시커먼 방독면 사이로 뜨거운 눈물이 흐를때도 많았고 또한 격한 분노로 그들과 맞서 욕설과 돌팔매 싸움을 하기도 한다. 화염병에 맞아 온몸이 그을린 동료를 보기도 하고 최루탄에 맞아 쓰러지는 ‘이한열’이도 보았다. 그 사건이 온나라를 진동시킬 줄은 몰랐다.(중략)

더 솔직히 말하면 용감했던 것이 아니라, 나라의 치안을 위해 시위를 막은 것이 아니라, 일단은, 그 많은 군중앞에 내가 살아야겠다는 처절한 반항이었다. ‘자칫하면 죽는 전투경찰도 수도 없는데’라는 두려움과, 나라에 대한 걱정과, 나에게 돌을 던져대는 사람들에 대한 분노가 뒤섞여서 6월 한달은 제 정신이 아니었다.(중략)

밤 열한시 열두시가 지나서 내무반에 돌아와 가스로 뒤범벅된 머리와 얼굴을 물로만 적시고 모포위에 누웠을 때 우린 언제나 이런 대화를 나누었다. “오늘도 무사했구나, 내일은 어디로 가게 될까!”

■ ‘연세대의 함성’(날짜 없음)

87년 5월 중순쯤이었다. 5.16과 5.17, 5.18로 이어지는 역사의 분노앞에 대학가는 해마다 5월이면 술렁대기 시작한다. 그때쯤해서 우린 사복을 입고 야간에 연세대 수색을 들어갔다.

새벽 2시! 캄캄한 밤속에 작은 기침소리 하나없이 미미한 발자욱소리만 들리고 교내로 들어갔다. 시위를 준비하는 학생들이 불을 켜놓고 화염병과 플랭카드를 만든다. 한 밤중에 고함소리가 터지고 창문이 요란하게 깨져나간다. 이따금씩 최루탄이 터지고 여학생들의 놀란 고함소리는 고막을 울린다.

그렇게 수십명을 연행하고 다음날 오전을 수면으로 때웠다.(중략)

오후 5시, 6시를 넘기면서 세브란스 정문을 맡은 중대가 자꾸 밀려서 우리가 서있는 정문까지 후퇴를 했다. 돌멩이는 이제 옆에서도 날라오는 꼴이 되어버렸다. 긴 쇠 꼬챙이로 우리가 쳐놓은 철망을 쿡쿡 쑤셔대는 학생이랑 방패로 막고 실랑이를 벌이다가 무언가 뒤통수에 둔탁한 소리와 함께 난 고꾸라지고 말았다.(중략)

거의 밤 열시가 다 돼서야 그들은 그만할 뜻을 비췄다. 정문에서 물러나면 노래한곡 부르고 그만하겠다고 했으니까-

“긴 밤 지새우고 풀잎마다 맺힌 진주보다 더 고운 아침이슬처럼...”

벌써 다 식어버린 밥과 국이 넘어 갈 리가 없고 가무룩거리는 그들의 햇불 속으로 나의 온 몸의 피곤함이 빨려드는 것 같았다.

■ ‘이한열은 저 하늘로’(날짜 없음)

87년 6월9일! 6·10을 하루 앞두고 서울을 비롯해 전국의 대학들이 동시에 출정식을 가졌다.

‘시청으로 가자!’

당연히 연세대에서도 출정식을 하고 격렬한 시위가 있었다. 그때의 상황이야 지금 상세히 기억해낼순 없지만 그날 한열이는 우리의 눈앞에서 쓰러져갔다. 당시 우리중대(45중대)와 44중대가 정문을 담당해서 sy44탄을 동시에 쏘았었다. 한 개 중대에 사수가 15명정도가 되니까 약 30명이 함께 쏘아서 그 중 한발정도가 너무 각도가 낮았는지 한열이의 머리에서 터진 것이었다.

다음날 중앙일보 신문엔 피흘리며 쓰러진채 부축되어 일어서는 한열이의 사진이 실렸고 상당히 비참하면서도 충격적이고 국민의 분노를 충분히 살만한 모습이었다. 완전 빈사상태로 이한열은 세브란스 병원에 식물인간이 되어 버렸다. 학생들은 교대로 병실을 지키며 만일의 경찰 침입에 대비했다. 나의 짐작으로도 그러지 않았다면 그 당시 어떻게 하던지 이한열을 빼돌릴려고 시도했을 가능성은 많았다. 약 20일정도가 지나 이한열은 합병증으로 사망했다.(중략)

어째든 격동의 한 시기에 나와 직접 연관된 굉장한 사건이 되어버렸다. 아직도 9개월전의 그때 함성들이 머리를 울린다. ‘민주를 사랑하는 한열이를 살려내라!’ 우리들 다리를 부여잡고 친구를 살려내라고 피를 토하듯 울부짖던 그 학생들의 모습과 함께.

■ 1988년 12월29일 목요일

제대를 했다. 데모라면 신물이 날 정도로 막아야 했던 86년 7월~88년 12월까지의 전투경찰 생활을 드디어 청산했다.(중략)

다치기를 무려 4번! 나의 다리는 온통 꿰멘 자국이 수두룩하고 남은건 영광도 없는 상처뿐인가 싶다. 그래도 휴유증이 심하게 다친 것이 없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제대를 했다. 길거리에서 시커먼 얼굴로 식사하던 지긋한 그 생활들이 정말 싫었고 뜨거운 한 여름의 그 목마름은 또…

그렇게 애를 먹었고, 많이도 싸웠는데 어떻게 난 보람이랄까, 자부심이란 것이 없고 오히려 수치심이 앞서는 것에 정말 화가 치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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