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짬] 영국 평화운동가 린디스 퍼시
“한국은 정말로 정말로 아름다운 나라입니다. 가는 곳마다 초록빛 풍광도 아름답지만 만난 사람들이 더 멋졌습니다. 한국의 시민평화운동이 이처럼 잘 조직돼 있다는 걸 새삼 확인했습니다. 날마다 뜻깊은 여정의 연속입니다.”
백발이 성성한 칠십 중반의 영국인 반미평화 활동가 린디스 퍼시(76)는 처음 만나는 순간부터 손을 맞잡고 솔직한 심정을 털어놓았다. 희끗희끗 빗방울이 뿌리는 지난 1일 늦은 오후 서울 종로 주한 일본대사관 앞 평화의 소녀상 앞에서 그는 미국 성조기를 거꾸로 든 채 지킴이 활동가들에게 격려와 지지의 연설을 막 끝낸 참이었다.
지난해 11월 창당한 신생 정당인 환수복지당(대표 한명희·여성 농민운동가) 초청으로 한국에 온 그는 지난달 27일부터 2주에 걸쳐 용산, 평택 오산, 양구, 옥천, 광주 망월동, 군산, 인천, 민통선, 제주, 성주 등 전국 15곳의 평화시위 현장을 둘러보는 평화기행을 하고 있다. 하루도 쉬지 않는 강행군에도 그는 전혀 지치지 않은 기색이었다.
조산사 출신 50살때 반핵활동가 변신
1990년대초 미군 핵무기 반대 계기
“영국공군 간판 걸어 미군점령 위장”
여성들 단체 결성해 ‘불법조약’ 폭로 영국 원정때 연대한 환수복지당 초청
“전국 15개 투쟁현장 돌며 배우는 중”
“나이 50살이 되던 1990년대 초 영국 공군기지에 미군의 대량살상무기가 몰래 배치된다는 사실을 알고 시위에 나선 이래 25년 동안 500번도 넘게 경찰에 연행됐고 15번이나 구속당했어요. 길게는 9개월 동안 옥살이를 했고 경찰의 폭력진압 때 다쳐 한쪽 귀의 청력을 잃었어요. 지금도 여러 재판이 진행 중이죠. 하지만 지쳐서 그만두고 싶은 적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북해 연안의 영국 동부 도시 요크에서 나고 자란 퍼시는 원래 조산사로 36년간 일했다. 90년대 초 거주지 인근 멘위스힐에 있는 영국공군(RAF)의 그리넘 코먼 기지에 미군의 크루즈 핵무기 반입을 저지하는 주민 시위에 참여하면서 평화운동가로 변신했다. “그때 여성들 6천여명이 기지를 에워싸는 인간띠 시위를 한 것을 계기로 ‘카브’(CAAB·미군기지 책임규명운동연합)란 단체를 결성했어요.”
카브의 공동창립자인 그는 지난해까지 공동대표로 단체를 이끌었고 지금은 공동 코디네이터로 국제 연대 활동에 앞장서고 있다. “우리 단체는 회원제가 아니라 자원봉사 방식으로 열린 구조로 운영해온 까닭에 대표 직함을 내려놓는다 해도 바뀌는 건 없어요. 영국 내 불법 미군기지가 모두 사라질 때까지 시위와 운동을 계속할 것입니다.”
그가 말하는 ‘불법’의 의미가 궁금했다. “그리넘 코먼 기지가 영국 공군이 아니라 미국방문부대(USVF)와 그들의 정보기관에 의해 점유되고 통제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2차 세계대전 때 미군이 연합군으로 참전한 이래로 지금껏 그렇게 위장 운영된 사실을 카브에서 처음으로 밝혀 폭로했지요.”
대전이 끝난 뒤 미군은 철수했지만 독일과 맺은 협정을 근거로 언제든 영국으로 들어와 기지를 만들 수 있는 상태였던 것이다. 특히 58년부터 미군이 차지한 멘위스힐 기지는 세계감시시스템인 에셜론(echelon)의 허브로 수많은 레이저돔을 통해 수집된 정보를 미국 국가안보국 본부로 전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이 불평등 협정을 개정하거나 파기하고자 소송을 제기해 법정 투쟁을 계속해오고 있다고 소개했다. “한국과 미국의 소파(SOFA·주둔군지위협정) 불평등 조약과 같은 겁니다.”
카브는 2000년부터 지금까지 멘위스힐 기지 앞에서 화요시위를 진행 중이다. 특히 그는 시위 때마다 미군 점령지 경계선을 넘어서거나 방호벽에 저항의 상징으로 성조기를 거꾸로 게양하는 방식으로 투쟁을 해오고 있다. “98년 영국 고등법원으로부터 이런 식으로 성조기를 사용할 수 있다는 판결을 받아냈어요.”
이처럼 끈질긴 투쟁을 통해 영국 내 12개의 미군기지 가운데 3개는 철폐되거나 앞으로 몇년 안에 폐쇄될 예정이다. 하지만 그는 “기지를 아예 없애는 게 아니라 다른 곳으로 옮기거나 또 다른 무기를 들여오고자 시도하기 때문에 투쟁을 멈출 수 없다”고 경계했다.”
2009년 아시아태평양 대량살상무기 반대와 군비경쟁 종식을 위한 국제대회 참가를 계기로 한국 평화운동과 인연을 맺은 그는 미 해군기지 투쟁 중인 강정마을을 비롯해 2014 생명평화대행진 등에 연대의 메시지를 전해오기도 했다. 그는 멘위스힐의 화요시위 현장에서도 직접 만든 ‘노 사드 인 사우스 코리아’(No THAAD in South Corea)란 팻말을 들고 1인 시위를 벌이고 있다고 소개하기도 했다. 이번 두번째 방한도 지난해 말 환수복지당 대표단이 영국을 방문해 그와 연대시위를 한 인연으로 이뤄졌다.
“영국이나 한국이나 일본이나 미군기지의 폐해는 똑같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이번 한국 평화기행에서는 뚜렷한 목표와 비전을 갖춘 젊고 열정적인 활동가들을 많이 만나 배우고 있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를 기리는 소녀상 지킴이들처럼 학생들이 인상적이다. 지금 우리의 싸움이 바로 다음 세대의 삶을 안전하게 지키기 위함이기 때문이다.”
4일 인천 맥아더 동상 앞 시위에 이어 민통선 평화마을을 답사하는 ‘백발의 여전사’는 “미국의 독립기념일인 7월4일이 전세계 미군 점령지로부터 ‘독립일’이 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ccandori@hani.co.kr
영국의 대표적인 반미평화 활동가인 린디시 퍼시가 지난 1일 주한 일본대사관 앞에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를 기리는 평화의 소녀상 지킴이들과 연대집회를 한 뒤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사진 김경애 기자
1990년대초 미군 핵무기 반대 계기
“영국공군 간판 걸어 미군점령 위장”
여성들 단체 결성해 ‘불법조약’ 폭로 영국 원정때 연대한 환수복지당 초청
“전국 15개 투쟁현장 돌며 배우는 중”
린디스 퍼시가 6월30일 충북 옥천 솔빛한의원에서 지역 여성들과 간담회를 한 뒤 함께 연대의 깃발을 들고 기념촬영을 했다. 사진 평화어머니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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