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의 차를 운전하는 수행기사들에게 폭언을 해 ‘갑질 논란’을 일으킨 이장한 종근당 회장이 지난 14일 오전 서울 서대문구 충정로 종근당 본사에서 고개를 숙여 사과하고 있다. 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 회사 대표나 임원들의 차량을 운전하는 수행기사들의 입은 기업 오너들의 상상 그 이상의 ‘갑질’을 폭로하는 창구가 되고 있습니다. 수행기사들은 과연 어떤 사람들인지, 어떤 환경에서 일을 하고 있는지 알아보았습니다.
한낮 기온이 33도까지 치솟았던 21일 오후, 서울 용산역 대합실로 넥타이를 매고 회색 정장을 갖춰 입은 50대 신사가 나타났다.
“덥지 않으세요?”
“이렇게 입지 않으면 오히려 불편합니다.”
김진우(가명·57)씨는 회사 대표나 임원들의 차를 운전하는 ‘수행기사’다. 최근 몇년간 수행기사들의 입은 기업 오너들의 ‘낯뜨거운 갑질’을 세상에 드러내는 창구가 되고 있다. 이장한 종근당 회장의 차를 운전한 기사들도 이 회장이 수시로 내뱉었던 욕설과 폭언이 고스란히 담긴 녹취 파일을 <한겨레>에 제보했다. 수행기사 업계에서 종근당에 대한 평판은 좋지 않았다고 한다. ‘터질 게 터졌다’는 것이다. 김만식 전 몽고식품 명예회장, 이해욱 대림산업 부회장, 정일선 현대비앤지스틸 사장 등. 이보다 앞서 수행기사들에게 폭언·욕설을 하고 폭력을 휘둘렀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고개를 숙여야 했던 장본인들은 여럿 있다.
40대에 직장을 그만두고 귀농을 꿈꿨던 김씨는 ‘아무리 까다롭고 어려운 사람이라도’ 딱 한 명만 상대하면 힘들지 않을 거란 생각으로 10년 전 수행기사 일을 시작했다. 이후, 그는 끊었던 담배를 다시 피우게 됐다. 우리 사회에서 ‘브이아이피’(VIP)로 군림하는 이들의 추한 민낯을 목격해왔기 때문이다. “수행기사를 인격적으로, 동등하게 대해주는 분들도 많지만 종근당 회장보다 더한 경우도 있어요. 저희들끼린 출근할 때 간·쓸개를 냉장고에 넣어두고 나간다고들 합니다.”
욕설만 하지 않을 뿐…
수행기사들 가운데는 궁합이 맞는 고용주와 오랫동안 함께 일하는 사람들도 있다. 10년 동안 수행기사로 일해 온 박상민(가명·43)씨는 ‘사람만 잘 만난다면’ 꽤 괜찮은 직업이라고 했다. 그러나 좋은 사람을 만나기가 쉽지 않다. 오너가 아닌 월급쟁이 사장이나 임원들을 수행하는 경우, 모시는 분들이 ‘잘리면’ 함께 그만두는 일도 잦다.
박씨도 10년간 네 차례 이직을 했다. 최근엔 재벌 3세 경영인의 차를 몰다 며칠 만에 그만두었다. “욕만 하지 않았을 뿐, 여간 깐깐한 게 아니었다. 핸들을 앞뒤로 움직이지 마라. 에어컨 쐬지 마라. 차 트렁크에 재킷이나 물건을 넣지 마라…. 소개소에선 2시간 만에 그만둔 사람도 있었다며, 나더러 오래 버텼다고 하더라.” 지난해 고용노동부 조사 결과, 정일선 현대비앤지스틸 사장은 3년 동안 12명의 수행기사를 갈아치웠다.
궁합맞는 고용주 만나기 쉽지 않고
임원 계약 종료되면 같이 잘리기도
무리한 의전요구·황당한 지시 빈번
“간·쓸개 냉장고에 넣고 출근한다”
회삿돈으로 고용해 청소 등 잡일까지
직원 아닌 개인에게 종속된 사람 취급
오너 갑질 지탄받아도 태도 안 바꿔
“고개 숙여도 타격은 별로 없나보다”
회사가 직접 수행기사를 채용하는 경우도 있지만, 외주용역업체를 통한 간접고용이 더 많다. 김진우씨는 용역업체들의 영업 경쟁으로 기사들에 대한 처우가 악화됐다고 지적했다. 계약을 따기 위해 기사들의 임금 수준을 낮춘다는 것이다. 시장에서 선호하는 수행기사 연령은 30~40대다. 최근엔 수행기사 업계에 들어서는 20대들도 있다. 그만큼 취업 경쟁도 심해졌다. 기업이나 개인이 고용하는 수행기사들의 권익을 보호하는 단체는 따로 없다. 대체로 포털사이트에 개설된 카페를 통해 정보를 교환한다. 모시는 분들이 대학 최고위·최고경영자 과정을 수강하거나 골프 모임에 나서게 되면, 긴 대기 시간 동안 자연스럽게 다른 수행기사들과 친분을 쌓게 된다. 수행기사들 사이에서 ‘피해야 할 업체’는 이렇게 알음알음 소문이 난다. 폭언과 폭력으로 악명 높은 어느 회사 사장은 수행기사를 구하지 못해 대리기사를 불러 운전을 시키기도 한다.
“종근당 회장보다 더한 경우도 있어요.” 10년간 수행기사 일을 한 김진우(가명)씨는 우리 사회에서 ‘브이아이피’(VIP)로 군림하는 이들의 추한 민낯을 보았다. 게티이미지뱅크
룸미러 접고, 블랙박스 떼고
수행기사들은 뒷좌석에 모시는 분과 눈이 마주치면 안 된다고 했다. 이러한 까닭에 박상민씨는 10년 동안 룸미러를 접고 운전을 했다. 그가 운전했던 차엔 블랙박스도 없었다. 차량 내부의 대화가 녹음되는 까닭에, 블랙박스를 떼라는 요구가 있었기 때문이다. 포털사이트 수행기사 카페엔 최근 “운전을 하던 중 사이드미러를 보다 (뒷좌석에 있는 분이) 자기를 봤다는 이유로 맞았다. 어떻게 해야 하느냐”며 도움을 요청하는 글이 올라와 있다. 지난해 이해욱 대림산업 부회장은 수행기사들에게 사이드미러를 접은 채 차량을 운전하도록 하고, 핸들·브레이크 등을 부드럽게 조작하지 못하거나 앞 차량과의 간격이 벌어질 경우 심한 욕설과 폭언을 한 사실이 드러나 논란을 빚었다.
안전을 고려하지 않거나 황당한 지시로 인해 수행기사가 ‘교통법규 위반 벌점’을 떠안는 일도 잦다. 김진우씨는 급하지도 않은 상황에서, 고속도로 버스전용차선을 타라는 고용주의 지시를 따랐다가 경찰에 단속된 경험이 있다. 강남대로 길가에 차를 세운 뒤, 수행기사가 차문을 열어주기를 굳이 기다리는 이도 있었다.
“누구한테 월급 받으세요?”
회사에서 고용한 수행기사들은 그야말로 회사 업무를 하기 위한 사람들이다. 그러나 회삿돈으로 고용한 수행기사를 개인적인 일에 동원하는 이들은 여전히 있다. 수행기사를 업무 수행자가 아닌 개인에게 ‘종속된’ 사람으로 보는 것이다.
한달 전, 김진우씨는 인터넷 구인광고를 통해 중소기업 사장 수행기사 자리를 구했다. 아침 6시30분 출근하고 밤 11시에 퇴근해야 하는 조건을 지키기 위해 사장이 사는 지역으로 거처를 옮기기까지 했다. 취업이 쉽지 않은 50대다 보니, 어느 정도의 어려움은 감수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가 맡게 된 일은 운전만이 아니었다. 사장 집으로 출근해 정장을 입은 채 청소를 하고 쓰레기를 치웠다. 사장 사모의 차를 운전하진 않았지만 운행일지를 작성하란 지시를 따라야 했다. 어느 날 밤엔 현관문이 열리지 않는다는 사장의 호출전화를 받기도 했다. 퇴근한 까닭에 되돌아가긴 어렵다는 그의 말에 사장은 이렇게 대꾸했다. “누구한테 월급 받으세요?” 얼마 전 회사는 김씨에게 청소·가사도우미 일까지 포함된 업무 매뉴얼을 제시했다. 받아들일 수 없다고 하니 그만둬야 한다는 답이 돌아왔다.
수행기사들은 일명 ‘뻗치기’(대기하는 일을 일컫는 말)를 포함해 장시간 근무를 하는 경우가 다반사다. 김진우씨는 수행기사로 일을 하면서 토요일 새벽 1시에 퇴근해 당일 서울에서 전남 나주까지 장거리 운전을 강요받은 적이 있었다. 박상민씨는 하루 14시간씩 1주일 동안 90~100시간 일한 기억이 있다. 개인이 아닌 회사에서 채용한 수행기사는 근로기준법 적용을 받는 노동자다. 그러므로 법정 노동시간(주당 52시간)을 초과해 일을 시키면 안 된다. 1일 8시간, 1주 40시간을 초과하는 연장근무를 할 경우 연장근로수당을, 휴일 노동 시 휴일근로수당을 지급해야 한다. 노무법인 참터의 유성규 노무사는 “수행기사들의 대기 시간은 근무 시간으로 봐야 하다. 회삿돈으로 월급을 주면서 개인적으로 골프장을 간다든가 술을 마시는 경우에도 수행기사들에게 일을 시키니까 대기 시간이 길어지는 것으로 보인다. 외국이었다면 회사 업무와 그렇지 않은 경우를 확실히 구분해, 사적인 일에 수행기사를 동원한 경우 비용 청구를 해당 임원이나 사장한테 했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비리 사건에서 결정적 역할
함께 있는 시간이 긴 만큼 수행기사는 ‘모시는 분’의 일거수일투족을 알게 된다. 굵직한 비리 사건 수사 과정에서, 수행기사들에 대한 조사는 필수다. 지난 4월 삼성전자 이재용 부회장 재판에서 ‘비선 실세' 최순실씨가 박근혜 전 대통령의 옷뿐만 아니라 화장품부터 잠옷·주스 등 소소한 것까지 구입해 챙겨준 정황이 공개됐다. 박영수 특별검사팀이 최씨의 운전기사 방아무개씨로부터 확보한 진술이었다.
2012년 자신이 대주주로 있는 저축은행에서 1000억원대의 불법대출을 받은 혐의 등으로 기소돼 징역 8년형을 선고받은 김찬경 전 미래저축은행 회장은 수사 과정에서 회삿돈을 챙겨 중국으로 밀항하려다 해경에 붙잡혔다. 검찰과 해경은 김 전 회장의 운전기사를 통해 밀항 계획을 입수할 수 있었다.
물론 수행기사들이 마냥 갑질에 당하기만 하는 건 아니다. 고용주의 ‘약점’을 악용하는 사례도 있다. 이름을 밝히길 꺼린 노무사는 “주유비를 부풀려 일종의 ‘카드깡’을 하는 것으로 보이는 임원 수행기사를 회사가 함부로 건드리지 못하고 지켜보기만 하는 경우도 있다”고 전했다. 지난해 초 경남 창원시에 본사를 둔 주류회사 무학에서 최재호 회장의 차를 운전했다 퇴사한 수행기사는 언론을 통해 “최 회장이 폭언 등 부당한 행위를 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무학 쪽은 ‘돈을 주지 않으면 회장의 횡포를 폭로하겠다'고 협박했다며 그를 검찰에 고발했다. 결국 해당 기사는 공갈미수 혐의로 기소돼 법정에서 징역 10월의 실형을 선고받았다.
“얼마나 당했으면 녹취까지…”
지난해 수행기사들에게 폭언을 퍼붓고 심지어 폭행까지 행사해 사회적으로 지탄을 받은 기업 오너들이 대거 등장했다. 이장한 종근당 회장은 이러한 사태에 아랑곳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박상민씨는 종근당 수행기사들에 대해 “얼마나 당했으면 녹취까지 했겠느냐”며 안타까워했다. 왜 비슷한 문제가 반복되는 것일까? “문제가 터져도, 걔네(기업 오너)들한테는 별로 타격이 없나 봐요.” 김진우씨가 씁쓸한 말투로 말했다.
물의를 일으킨 기업 오너들은 피의자 신분으로 수사를 받았다. 검찰은 피의자가 처벌받아야 할 필요성이 있다고 판단하면 기소해 재판을 받게 한다. 다만, 벌금·과료·몰수형이 적절하다고 보이는 경미한 사건에 대해 법원에 정식 재판이 아닌 서면심리만으로 진행하는 약식명령을 청구할 수 있다. 이러한 제도를 약식기소라고 하는데, 이 경우 피의자들은 공개된 법정에 서지 않아도 된다. 검찰은 김만식 전 몽고식품 명예회장, 정일선 현대비앤지스틸 사장에 대해 근로기준법 위반 혐의 등으로 각각 벌금 700만원, 300만원에 약식기소했다. 근로기준법 위반·강요미수 혐의를 받았던 이해욱 대림산업 부회장에 대해서도 벌금 1000만원에 약식기소했지만, 법원은 사안의 중대성을 고려해 이 부회장을 정식 재판에 회부했다. 이 부회장은 사건 수습 과정에서 서울지방고용노동청에 폭행 피해를 당했다고 말한 수행기사를 불러 “검찰에 넘어가 우리 둘이 싸우면 싸움이 안 된다”는 말을 하고 취업을 방해할 것 같은 태도로 진술을 번복하게 하려는 시도를 했으나, 피해자는 이에 응하지 않았다. 지난 4월 서울중앙지법 형사19단독 박재순 판사는 “피해자의 피고인에 대한 용서, 피고인의 자백과 반성 등을 고려해” 이 부회장에게 벌금 1500만원을 선고했다.
기업 위기관리 전문가인 김호 더랩에이치 대표는 오너의 갑질은 회사가 알고 있어도 관리하기 어려운 ‘리스크’일 것이라고 보았다. 안하무인 오너들에게 직언을 할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며, 설령 말을 한다 하더라도 오너들이 귀를 기울이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언론·소셜미디어 등 공공 영역을 통해 피해자들이 직접 이야기를 하면서 사회적 문제로 떠오른 것이다. 오너들의 갑질은 가해자들이 스스로 줄이기 어렵다. 피해자들이 연대해 지속적으로 문제를 제기하고 정부나 정치권에서 ‘경고’ 사인을 주어야 갑질이 줄어들 것”이라고 말했다.
박현정 기자
saram@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