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전 대통령이 지난 5월23일 왼쪽 옷깃에 수인번호 ‘503번'을 달고 서울중앙지법 417호 대법정에서 재판 시작을 기다리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법원이 지난 27일 김기춘 전 청와대 비서실장 등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관련자들의 1심 선고를 하며 박근혜 전 대통령을 문화예술계 지원 배제의 공범이 아니라고 판단한 부분을 두고 논란이 인다. 특히 재판부가 박 전 대통령에게 ‘보수주의 표방’이라는 이념적 정체성을 부여한 뒤, 이념에 따른 편파적 국정 수행은 문제가 없다는 식의 면죄부를 줬다는 비판이 나오고 있다.
31일 서울중앙지법 형사30부(재판장 황병헌)의 판결문을 보면, ‘보수 대통령의 국정 기조’라는 표현이 등장한다. 앞서 박 전 대통령은 2013년 회의나 송년 만찬 등에서 “좌편향 문화예술계에 문제가 많다”, “좌파들이 가진 문화계 권력을 되찾아 와야 한다. 나라가 비정상”이라고 말한 바 있다. 재판부는 이를 ‘국정 기조’로 정리하며 “대통령은 보수주의를 표방해 당선됐고, 보수주의를 지지하는 국민을 그 지지 기반으로 하고 있다”고 전제한 뒤 “대통령이 문화예술계 지원사업과 관련해 ‘좌파에 대한 지원 축소와 우파에 대한 지원 확대’를 표방한 것 자체가 헌법이나 법령에 위반된다고 볼 수 없다”고 밝혔다. 재판부는 또 “이런 국정 기조를 강조하고 그에 따라 정책 입안과 실행을 지시한 것을 두고 범행을 지시하거나 기능적 행위지배 의사를 표현한 것으로 볼 수는 없다”고 덧붙였다. 보수를 표방한 대통령이므로 좌파 배제 정책을 펼칠 수 있고, 구체적 지시를 하지 않은 이상 공범은 아니라는 논리다.
이를 두고 법원 내부에서조차 ‘재판부가 대통령에게 특정 이념 성향을 부여하고, 이념에 따라 권한을 행사할 수 있도록 면죄부를 줬다’는 비판이 일고 있다. ‘보수 대통령’이라 반대 이념을 가진 이들을 배제하는 정책을 주문해도 괜찮다는 논리로 해석될 여지가 있기 때문이다. 대통령에게 정치적 중립을 가질 공무원으로서 책무보다, 특정 이념 성향을 가진 정치인의 정체성이 우선한다는 걸 전제로 한 것이기도 하다. 지방법원의 한 부장판사는 “국민을 대표하는 최고위직 공무원인 대통령이 이념을 앞세워 무엇이든 주문할 수 있다는 식으로 비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좌파 지원 축소 기조가 헌법에 위반되지 않는다’고 한 부분을 두고도 장영수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불합리한 기준을 갖고 특정 정치 성향을 배제하는 행위는 차별받지 않을 권리인 헌법상 평등권을 정면으로 위배한 것”이라고 짚었다.
박 전 대통령이 문화예술계 지원배제 행위를 보고받고 관련 지시를 내렸지만 ‘범행에 가담하지 않았다’고 판단한 것을 두고도 논란이 인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박 전 대통령이 ‘부산국제영화제 예산 삭감 방안’, ‘문제 단체 조치내역 및 관리방안 보고서’ 등을 서면 등으로 보고받은 뒤 “흔들림 없이 추진하라”는 취지의 지시를 했다고 인정했다. 또 “(학교도서관에 종북 성향) 책이 단 한권도 비치돼선 안 된다”, “보조금이 정치 편향적인 것에 지원되면 안 된다”고 구체적으로 지시한 사실도 인정했다. 그러나 재판부는 “구체적으로 어떤 내용이 어떤 절차를 거쳐 대통령에게까지 보고됐는지 알 수 없다”는 논리를 폈다. 박 전 대통령이 직접 ‘보조금’, ‘종북 도서’ 등을 언급했다 해도, 지원배제 행위를 특정해 범행을 이끈 건 아니란 논리다.
하지만 법조계에선 재판부가 대통령의 권한 범위를 지나치게 좁게 해석했다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 서울지역의 한 판사는 “대통령의 말 한마디가 곧 구체적 정책으로 연결되는 현실을 외면했다”고 꼬집었다. 또 ‘좌파 지원 축소는 정당한 국정 기조’라고 보면서 이를 이행한 실무자들만 유죄로 판단한 것은 모순이란 지적도 나온다. 고법의 한 판사는 “‘좌파 배제’라는 기조가 정당하다고 판단한 이상, 이를 기반으로 한 정책 실행 행위만 유죄라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며 “‘국정 기조를 따랐다’는 김 전 실장 쪽 논리를 받아들이면서도 김 전 실장을 최종책임자로 본 것도 다소 모순이 있다”고 짚었다.
전종익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헌법학)는 이번 판결에 대해 “국가권력이 문화 분야를 지원하다 보면 편향성이 생길 수밖에 없고, 그런 우려를 해소하기 위해 헌법학계는 물론 사회 전체가 수많은 토론과 고민을 통해 ‘기금 조성’ 등의 제도를 마련해왔던 것”이라며 “재판부가 한마디로 ‘보수정부가 보수를 지원한 게 뭐가 문제냐’고 일갈해버린 것은 ‘문화’와 ‘국가권력’의 관계에 대한 사회적, 헌법적 논의의 진전을 일거에 원점으로 돌려놓은 가벼운 처신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현소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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