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지성 삼성그룹 전 미래전략실장이 지난 1월9일 서울 강남구 대치동 박영수 특별검사팀 사무실에 출석하고 있다.
“저는 삼성그룹 경영 전반을 책임집니다. 이 부회장에게 보고하고 지시받는 관계가 아닙니다.” (최지성 전 삼성그룹 미래전략실장)
“그룹 회의나 식사 때 최지성 실장이 항상 상석에 앉습니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이 부회장은 (지배력 강화라는) 오해를 사기 싫고, 헤지펀드와 소모적 싸움을 벌이기 싫다며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에 반대하기도 했습니다.” (최지성)
“(합병에 대해) 최 실장님께 다시 검토해보면 어떻겠냐 제의 드린 적은 있지만, 제가 상사 분야에 고집할 만한 지식이 없었기에…(관철하지 못했습니다).” (이재용)
지난달 31일부터 나흘간 이어진 ‘삼성 뇌물’ 재판 피고인신문에서,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을 포함한 삼성 임원들은 하나같이 최지성 전 삼성그룹 미래전략실장을 그룹의 총지휘자로 지목했다. 정유라 씨에 대한 ‘핀셋’ 승마지원은 물론,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 등 그룹 현안도 최 전 실장 등이 알아서 했다는 것이다. 삼성 쪽 논리대로라면, 최 전 실장은 이 부회장의 ‘코치’이자 그룹의 ‘전략가’의 위치를 넘어선다. 반대로 이 부회장은 박근혜 전 대통령과의 세 차례 단독면담에 ‘삼성 대표’로 참석했지만, 실제 역할은 박 전 대통령 말을 최 전 실장에게 전하는 ‘메신저’에 불과하게 된다. 이 부회장을 보고·지시·결정 체계에서 완전히 분리해 오너의 실형 선고만큼은 막겠다는 전략이다.
기업 총수를 보호하기 위해 임원들이 ‘셀프 덤터기’를 쓰는 상황을 법원이 대면하는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2013년 최재원 에스케이(SK)그룹 수석부회장이 형인 최태원 회장을 보호하려 횡령 등 혐의를 뒤집어쓰려 했던 적이 있다. 그러나 최 회장은 끝내 실형을 피하지 못했다.
최 회장은 선물옵션 투자 목적으로 계열사 자금 수백억 원을 빼돌린 혐의(특경가법의 횡령·배임)를 받았다. 함께 기소된 최 부회장은 1심에서 “형 몰래 벌인 일”이라며 총대를 멨지만, 법원은 최 회장의 영향력에 더 주목했다. 수백억 원에 달하는 계열사의 출자금액이 불과 하루 만에 결정됐는데, 최 부회장은 계열사에 이런 영향력을 미칠 만한 지위에 있지 않다는 것이었다. 법원은 “공범에게 대부분의 책임을 전가하는 변명으로 일관했다”며 최 회장에게 징역 4년의 실형을 내렸다.
항소심에서 에스케이 쪽은 전략을 바꿨다. 최 부회장이 “1심에서 형을 보호하기 위해 (선물투자를 지시했다고) 허위진술(자백)을 했다”는 취지로 말했고, 최 회장도 말을 바꿔 “(펀드 조성에) 일부 개입했다”고 인정했다. 하지만 법원은 최 회장에 대한 원심 양형을 유지하는 가운데 최 부회장에게도 징역 3년 6월을 선고했다. 법원은 “최 회장과 최 부회장이 그때그때 자신들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진실과 허위 사이를 넘나들면서, 마치 자신들이 가진 능력이라면 진실과 허위를 바꾸고 수사 기관과 법원을 마음대로 조종이라도 할 수 있는 듯한 태도를 보여왔다”고 꼬집었다.
삼성의 이번 재판 전략을 두고도, 대부분의 증거가 삼성 주장의 반대 방향을 가리키면 오히려 불리할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한 고법 판사는 “책임 회피를 위한 조직적 입 맞추기로 판명 날 경우, 재판부가 법원을 속이려 했다고 했다고 보고 형을 가중할 수 있다”고 했다. 또다른 판사는 “경제적 이해를 공유하는 관계에서 한쪽이 ‘독박’을 쓰려고 하면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고 했다.
특히 이를 위해 재판 막바지에 이르러 기존 진술까지 뒤집는 경우 외려 재판부의 의구심을 살 수 있단 분석도 있다. 장충기 전 미전실 차장은 “이 부회장이 2차 대통령 면담(2015년 7월) 직후 ‘청와대에서 받은 자료’라며 (최씨 운영의) 동계스포츠영재센터 사업계획서가 담긴 봉투를 전달했다”고 특검서 진술했다가, 피고인신문 때 “안종범 전 청와대 정책조정수석이 자료를 준 것 같다”고 말을 바꾸면서도 만남 장소나 상황을 특정하지 못했다. 이 부회장이 영재센터 지원에 관여하지 않았다고 강조하려는 의도로 읽힌다. 서울지역의 한 판사는 “통상 수사 기관 진술보다 법정 진술의 신빙성을 더 높게 치지만, 피고인신문 진술은 증언과 달리 위증죄 적용을 받지 않는 데다가 대개 ‘혐의 부인’이란 기존 변론을 되풀이하는 것과 마찬가지기 때문에 그 자체만으론 그다지 신빙성을 갖지 못한다”고 짚었다.
현소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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