ㄱ(48)씨는 2013년 내연 관계에 있던 ㄴ(41)씨를 상대로 각서를 한장 썼다. 자신이 죽으면 ㄴ씨와 사이에서 낳은 아들 ㄷ(6)에게 재산 일부를 넘기기로 하고, 15억원 상당의 부동산 근저당권까지 설정했다. 그런데 2015년, 친생자 관계 확인 소송을 맡은 법원이 친부인 ㄱ씨가 한달에 200만원씩 양육비를 줘야 한다고 결정하며 변수가 생겼다. 사후 재산을 넘기기로 약속한데다 양육비까지 부담하게 된 ㄱ씨는 각서 내용을 철회하겠다며 소송을 냈다.
상속을 약속하는 각서를 작성해놓고 한쪽이 마음대로 이를 철회할 수 있을까? 언제든 유언자가 내용을 바꿀 수 있는 유증(유언에 의해 사망 뒤 재산을 물려주는 것)이라면 가능하다. 그런데 ㄱ씨가 맺은 것은 사인증여계약(사망으로 인해 효력이 발생하는 증여 계약)이다. 재산을 넘기는 시기를 ‘사망 시점’으로 설정했기 때문에 내용은 유증과 매한가지이지만, 혼자서 하는 유증과 달리 사인증여는 두 사람이 ‘계약’을 맺는 형태다. 상속을 약속받은 사람 입장에선 유증보다 안정적이다. 이런 취지에 비춰볼 때, ㄱ씨의 마음이 바뀌었다고 해서 계약 자체를 손바닥 뒤집듯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재판부는 장고 끝에 친생자 관계 확인 소송 내용에 주목했다. 애초 ㄱ씨가 쓴 각서는 ㄷ이 ㄱ씨 친생자로 등록되지 않은 상황에서 ㄱ씨 사후 ㄷ의 양육과 상속을 지원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그런데 2015년 소송으로 ㄷ이 ㄱ씨의 친자라는 게 확인됐고, 매달 200만원의 양육비도 지원되니 법적인 보호 장치가 어느 정도 마련됐다는 게 법원 판단이었다. 서울고법 민사32부(재판장 박형남)는 “재산을 주고받는 사람 사이에 법률관계의 변경이 있고, 그로 인해 사인증여계약 목적이 충분히 달성될 수 있다면 사인증여를 철회할 수 있다고 보는 게 타당하다”고 판결했다고 14일 밝혔다.
증여와 유증 사이 ‘회색지대’에 있는 사인증여에 대해 법원이 유증 쪽 손을 들어준 것이다. 다만 서초동의 한 변호사는 “사인증여도 형식상 계약인 만큼 명확한 변수가 없는데도 무조건 철회할 수 있다는 뜻은 아니다”라고 했다.
현소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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