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소이유서 ‘늑장’ 제출로 항소기각 위기에 놓였던 김기춘(78) 전 청와대 비서실장이 직권으로 조사하겠다는 법원 판단으로 기사회생했다.
서울고법 형사3부(재판장 조영철)는 26일 김 전 실장 첫 공판준비절차를 열고 “피고인의 항소이유서는 제출기간이 지나 적법하지 않지만, 이 사건의 경우 직권조사사유 범위 내에서는 본안을 심리할 필요성이 있다”고 밝혔다.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기획·집행을 총괄한 혐의(직권남용) 등으로 1심서 징역 3년의 실형을 받은 김 전 실장은 특검법이 규정한 제출기한(8월29일 자정)을 넘겨 30일 새벽 항소이유서를 제출했다. 이 경우 재판부는 항소를 기각하고 제때 제출한 쪽 주장만 살피는 것이 원칙이지만, 원심 판단을 다시 살필 사유가 있다고 판단되면 직권으로 조사할 수 있다.
이날 김 전 실장 쪽은 고발의 부적법성 등을 직권조사사유로 들었다. 김 전 실장은 국회 국정조사 특위에서 위증한 혐의로 지난 1월17일 고발됐는데, 특위는 1월15일 이미 활동이 끝났기 때문에 고발 자체가 적법하지 않다는 주장이다. 또 직권남용 혐의 공소사실이 특정되지 않았단 주장도 나왔다. 반면 특검은 “직권조사는 형식적·절차적 사유에 한정되는데, 이 부분에 대해선 1심에서 충분한 공방이 이뤄졌으므로 또다시 불필요한 논쟁을 하는 것은 맞지 않는다”며 사유가 없다고 맞섰다.
재판부는 “직권조사사유가 있고, 특검도 항소한 만큼 본안 심리를 여는 게 마땅하다”고 봤다. 다만 “심리는 특검의 항소이유와 피고인 쪽 직권조사사유를 중심으로 할 것”이라고 했다. 서울 지역의 한 부장판사는 “직권조사 범위가 명확히 정해진 것은 아니지만, 대개 절차적인 면이 문제가 되는 만큼 해당 부분을 집약적으로 다루느냐가 관건이 될 것”이라고 했다. 공판준비절차 땐 피고인이 나오지 않아도 되지만 이날 김 전 실장은 하늘색 수의를 입고 헝클어진 머리로 출석해 50여분간 재판을 지켜봤다. 첫 공판은 다음달 17일 열린다.
현소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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