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일 오전 서울 종로구 \'일제강점하 강제동원피해 진상규명위원회\' 사무실에 피해신청을 하러 나온 천상근(오른쪽·63)씨가 1942년 군속으로 끌려가 해방 뒤 45년 8월 \'우키시미호\'를 타고 귀국하다 배의 침몰로 숨진 아버지의 사진과 제적등본을 들고 있다. 황석주 기자
일제 강제동원 피해접수 첫날
“한일협정 다시해야” 목청도
일제 때의 징용·징집 등 강제동원 피해에 대한 신고·신청 접수 첫날인 1일, 서울 신문로 세안빌딩 9층 ‘일제 강점하 강제동원 피해진상 규명위원회’ 민원실. 체감온도 영하 22도의 살을 에는 추위에도 이른 아침부터 한 맺힌 과거를 떨쳐내려는 사람들의 발길이 이어졌다. 이날 접수는 오전 9시부터였지만, 한 시간 전부터 20여명이 모여들어 30분 앞당겨 시작됐다. 첫 신고를 한 사람은 여섯살 때 일제에 의해 강제 징용된 아버지를 따라 사할린으로 갔다 영주귀국한 백만기(73·안산시 사동 고향마을)씨. 백씨는 “한-일 협정 당시 군속 청구권 문제 등만 다뤘고, 사할린 동포와 위안부, 원폭 피해자 등은 전혀 다루지 않았다”며 “한-일 협정을 다시 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충남 금산에서 새벽기차를 타고 왔다는 한찬구(77)씨는 1944년 여름 23살의 나이에 징병으로 끌려간 형(한은구)을 대신해 서류를 냈다. 형이 끌려간 뒤 어머니는 날마다 역에서 아들을 기다리다 자바 전선에서 전사했다는 소식을 들은 뒤 쓰러져 앓다 4년 만에 세상을 떴다. 이곳을 찾은 사람들마다 노랗게 빛바랜 흑백 가족사진과 그들의 나이만큼이나 때가 묻은 각종 공문서, 빼곡이 모아놓은 신문스크랩 등을 한아름씩 들고 왔다. 천상근(63·동대문구 휘경동)씨는 두툼한 서류 봉투에서 그동안 모아두었던 아버지(천영철) 사진과 우키시마호 관련 기사를 꺼냈다. 일본 해군 군속으로 일했던 아버지는 해방된 해 8월22일, 우키시마호에 탔다 의문의 폭발·침몰로 세상을 떠났다. 당시 아버지는 2대 독자였고, 그때 어머니는 23살이었다. 일본군에 강제징용돼 만주에서 근무하다 소련군 포로가 돼 3년 동안 수용소 생활을 한 뒤 귀국한 원아무개(80·서울 서초구 방배동)씨 등 13명은 러시아가 발급한 근로증명서를 첨부해 눈길을 끌었다.
임명순(49)씨는 시아버지와 친정아버지가 모두 강제동원 피해를 당했다고 신고해 주위 사람들의 눈시울을 적시게 했다. 아버지가 일제에 징용으로 끌려갔다는 정귀순(52)씨는 “어머니가 지난 월요일 돌아가신데다, 집에 불이나 사진 하나 남은 게 없다”며 민원실 앞에서 목이 터져라 울어 보는 이들을 안타깝게 했다. 이날 오후 4시께는 태평양전쟁 희생자유족회 전국 지부장 20명이 회원 1700여명의 신고서류가 든 20개의 서류 꾸러미를 들고 위원회를 찾아 공동으로 접수시키기도 했다. 경기 화성시 남양동에서는 한 동네 주민 22명이 이날 동사무소에 피해를 신고했다. 이날 전국 지방자치단체 접수창구에도 문의전화와 함께 신고가 빗발쳤지만 추운 날씨 탓에 창구는 비교적 한산했다. 부산 동래구청에 신고한 김아무개(76)씨는 16살 때인 44년 9월 고향인 울산에서 농사를 짓다 강제징집돼 경남 진해의 일본군 부대에 끌려가 6개월 동안 훈련을 받은 뒤 진해 가와무라부대에 배속돼 도로공사 등 노역을 했다고 말했다. 울산 남구 옥동에 사는 정영화(81·여)씨는 당시 24살이던 오빠(정두화)가 42년 울산 장생포에서 고래잡이 배를 타던 중 강제징용을 당해 해군에 입대한 뒤 43년 4월 남양군도 방면에서 전사했다는 통지를 받았다고 신고했다. 전남 강진 출신 김광수(80·광주시 남구 주월동)씨는 “45년 2월21일 일본군의 해군 진해훈련소에서 근무하다 오른쪽 눈을 다쳐 일본 규슈 해군병원으로 옮겨져 치료를 받았으나 실명했다”고 신고했다. 이날 저녁 6시 접수 마감 결과, 진상조사 신청 1건과 피해자 신고 2573건이 각각 집계됐다. 한편, 규명위원회는 신청서 작성 방법을 도와주는 사람들을 배치하지 않아 신고자들의 불만이 높았다. 신고자들은 이 곳을 찾은 사람을 위해 대필해 주거나 상담을 전담하는 도우미가 필요하다고 한목소리를 냈다. 규명위원회 민원실에선 홍보부족 탓에 3~4개에 이르는 각종 서류를 준비하지 못해 발걸음을 되돌리는 사람이 있었다. 일부 시·군에서는 피해접수 창구가 제대로 마련되지 않아 혼선을 빚기도 했다. 또 전화문의는 폭주했지만 일선 시·군에서 전담인력 부족 등의 문제점을 드러내기도 했다. 이희자 태평양전쟁피해자 보상추진협의회 상임대표는 “과거를 규명하는 작업은 이제부터 시작”이라며 “정부는 명확한 진상을 규명하는 데 최대한 노력해 피해자의 명예 회복과 피해 보상에 적극 나서야 한다”고 강조했다. 광주 부산 울산/안관옥 최상원 김광수, 정혁준 기자 jun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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