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7일 저녁 서울 마포구의 한 커피숍에 직장 ‘갑질’ 피해자 20여명이 모였다. 이들은 종이 봉투로 만든 가면을 쓰고 각자의 경험과 노하우를 공유했다. 직장갑질 119 제공
모바일 메신저 채팅방에서 회사로부터 당한 ‘갑질’ 피해경험을 공유하던 이들이 가면무도회에 ‘접속’했다. 7일 저녁 8시 서울 마포구의 한 카페에 노란 종이 봉투로 만든 가면을 쓴 20여명이 모였다. 노동자 인권보호 단체 ‘직장갑질 119’가 마련한 갑질 피해자 잡담회 ‘가면무도회’의 참석자들이었다. 이들은 지난달 1일 직장갑질 119가 출범하며 개설한 모바일 메신저 오픈채팅방에서 자신이 겪은 갑질 사연을 주고받은 사이다.
가면무도회를 주최한 직장갑질 119의 오진호 총괄스태프는 “직장에서 온갖 험한 일을 겪으면서도 불이익을 받을까봐 (피해를) 이야기하는 걸 두려워하고 무서워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이들을 위해 한자리에서 만나는 자리를 마련하게 됐다”고 행사 취지를 설명했다. 참석자들이 쓴 가면에는 울거나 화난 얼굴 표정과 함께 ‘슬픈 너’, ‘상처받은 너’ 등의 문구가 적혀 있었다. 얼굴 뒤쪽으론 ‘쓰레기직장 꼰대천국’이란 문구가 프린트 돼 있다. 이들에게 직장은 어떤 의미였을까.
지난 5년간 한 대기업에서 희망퇴직을 강요받은 닉네임 ‘닥터지바고’는 상사에게 직언을 아끼지 않는 성격 탓에 ‘사내 정치’에서 비주류로 낙인 찍혔다고 한다. 결국 희망퇴직을 강요받고 후배 여직원을 성희롱했다는 혐의까지 뒤집어 썼다고 한다. 그는 “회사가 날 내쫓으려고 후배 여직원을 성희롱한 것처럼 서류를 꾸미기까지 했다”고 분통을 터뜨렸다. 스트레스로 몸무게가 20㎏이나 빠졌다는 닥터지바고는 3년여 복직 투쟁 끝에 회사로 돌아갔다. 그러나 회사는 기획 파트에서 일하던 그를 엔지니어링 부서로 전출시켰다고 한다.
닉네임 ‘새날이 올 때까지’도 2년째 보직이 해임된 상태에서 회사를 다니고 있다. 그는 “직장갑질 119 채팅방에서 비슷한 상황에 놓인 분들과 고민을 나누며 자신을 지킬 수 있었다”며 다른 참석자들에게 고마움을 전했다. 회사는 다른데 ‘갑질’은 어찌 이렇게 비슷한지, 발언회가 이어질수록 고개를 끄덕이는 공감대가 깊어졌다.
직장갑질 119와 연대하는 김호연 공공운수노조 보육교사협의회 의장은 “제일 중요한 건 ‘갑질’ 피해자가 회사와 싸우는 이유를 명확히 아는 것”이라며 “승리가 확실치 않은 싸움인 만큼 ‘잘못된 걸 바로 잡는다’는 정당성을 스스로 세워야 가족과 주변의 지지를 받을 수 있다”고 말했다.
이날 1시간여의 ‘발언회’가 끝난 뒤 참가자들은 삼삼오오 모여 회사의 갑질에 대응하는 ‘노하우’를 공유하기도 했다. △회사에서 겪은 일을 매일 꼼꼼히 기록해라. △복직투쟁은 ‘멘탈싸움’이다. 회사의 대응에도 빈틈은 있다. 미리 겁먹지 마라. △시민단체나 언론에 제보할 땐 구조적인 문제를 부각시켜라. 억울함만 3박4일 호소해도 공론화가 안된다. 즉석에서 만들어지는 노하우가 순식간에 ‘가이드 라인’ 수준으로 꼴을 갖춰갔다.
몇 년째 권고사직 압력을 받고 있는 닉네임 ‘계룡선녀’는 “마음고생에 지쳐 직장을 그만둘까 생각도 했지만, 꿋꿋하게 싸우며 회사에서 버티고 있는 분들의 경험담을 들으며 큰 힘을 얻었다”고 말했다. 가면 속으로 희미하게 미소 띈 얼굴이 비쳤다. 복직 투쟁에 성공한 경험이 있는 닥터지바고가 다른 피해자들에게 마지막 한마디를 덧붙였다. “‘회사는 전쟁터지만 밖은 지옥’이라는 말을 꼭 명심하세요. 힘들겠지만 꼭 회사에 붙어 있으세요.”
선담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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