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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나보다 술을 더 사랑할 순 없으니까…

등록 2017-12-16 10:32수정 2017-12-17 09:15

[토요판] 이런,홀로!?
술꾼, 혼술 그리고 와인

술꾼 남친과 헤어진 뒤
술이 궁금해졌다
술을 향한 갈망은 분노가 됐고
술을 알면 알수록 무서워졌다

혼자 살기에 혼자 마시는 술
그렇게 와인이 또 궁금했지만
시련 끝에 마음을 비웠다
술을 좋아하지만 술꾼은 아니니까
와인은 향이나 색상, 마실 때의 느낌과 맛, 마시는 방식까지도 아름답다. 글라스에 담긴 자태만 봐도 어쩐지 외로움이 희석되는 것 같다. 게티이미지뱅크
와인은 향이나 색상, 마실 때의 느낌과 맛, 마시는 방식까지도 아름답다. 글라스에 담긴 자태만 봐도 어쩐지 외로움이 희석되는 것 같다. 게티이미지뱅크

혼자서 술을 마시는 것을 일컬어 속칭 ‘혼술’이라고 한다. 반면에 여럿이서 술을 마시는 행위를 이르는 단어는 존재하지 않는다. 술은 여럿이서 함께 마시는 것이 보통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혼자 술을 마시는 것은 위험한 습관으로 간주되고 쉽게 중독과 결부되기도 한다. 그런데 술꾼들과 어울려보고 나서 알았다. 술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위험한 것은 맞지만 함께 마시는 사람의 유무만으로 위험성을 판단할 수 없다는 것을. 술의 위험성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파티 걸은 상처받지 않아, 아무것도 느낄 수 없거든.’(Party girls don’t get hurt, can’t feel anything.)

오스트레일리아의 싱어송라이터 시아는 히트곡 ‘샹들리에’로 술 때문에 불행해진 사람의 심정을 노래했다. 가사의 화자는 자신이 ‘시간 보내기용 사람’인 것을 알면서도 전화벨이 울리면 사랑을 느낀다고 고백한다. 꼭 술 취한 사람의 감정 상태처럼 극적인 분위기의 곡을 듣고 있으면 술꾼들과 어울렸던 시절이 연상된다.

나는 술꾼이 될 수 있을까

한때 나와 가장 가까웠던, 골치 아픈 술꾼. 그가 사건의 발단이었다. 지금은 헤어진 예전 남자친구는 세상 누구보다도 술을 사랑했다. 그는 매주 금요일마다(물론 다른 요일에도) 새벽까지 마셔댔고 다음날 늦은 오후가 돼서야 식당이나 카페에서 마주할 수 있었다. 그때마다 나로부터, 아니 세상으로부터 차양을 닫아버린 것 같던 눈을 아직 잊지 못한다. 나는 그를 사랑했지만 그는 나보다 술을 더 사랑했던 것 같다. 그게 우리의 비극이었다.

술 때문에 사귀던 남자하고도 끝냈는데 역설적이게도 다른 무엇도 아닌 술이 필요했다. 동시에 엉뚱한 생각이 들었다. 나는 과연 술꾼이 될 수 있을까? 이왕 이렇게 된 김에 술, 정확히는 술꾼의 생리에 접근해보는 건 어떨까. 그렇게 해서 술은 새로운 도전 과제가 됐다.

얼떨결에 술꾼 하나와 친해진 나는 곧 술꾼에게 둘러싸였다. 술꾼들에겐 이상한 결집력이 있다. 절대로 나타나지 않을 것처럼 거절했던 사람도 밤이 깊으면 모두 모여서 하나로 뭉친다. 그러므로 술꾼 하나를 아는 것은 머지않아 술꾼 여럿을 한꺼번에 만나게 될 것이라는 강력한 암시와도 같다. 마치 문제 많은 남자와 결혼하면 문제 가족이 풀 패키지로 달려오는 것과 마찬가지다. 돌이키고 싶을 때는 이미 늦었다는 면에서도 그 둘은 비슷하다.

보통 술꾼이라고 하면 자제력이 없고 제멋대로인 사람을 떠올리기 쉬운데 그들은 의외로 멀쩡하다. 아니, 멀쩡하게 보이도록 위장할 줄 알았다. 대표적인 위장술은 술을 마셔도 업무에 지장을 주지 않고 틈틈이 운동까지 하는 부지런함이다. 그들은 또 뜬금없는 엄격함으로 위장하기도 한다. 이를테면 어떤 술꾼은 절대로 안주를 먹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내세우면서 술만 마셔댄다. 또 어떤 술꾼은 과음한 다음날 종일 굶으면서 소화기관을 학대한다. 그것이 자기만의 정화의식라고 우기면서. 실제로 술을 많이 마시는 사람들에게 음식 섭취와 관련된 각가지 형태의 기이한 강박증이 나타나곤 한다. 이런 위장술은 절제력의 과시이자 마음만 먹으면 술을 절제할 수 있다는, 그들 나름의 항변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하지만 술꾼이 아무리 엄격함을 내세워봤자 그것은 신뢰로 이어지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미 가족과 애인, 친구와의 약속을 어겼고 자신마저 실망시킨 지 오래이기 때문이다. 숙취 때문에 출근길 전동차 안에서 설사할 뻔한 사람이 하는 말을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결국 술에 대해서 알면 알수록 술이 무섭다는 생각만 들었다. 술을 너무 사랑하게 되면 언젠가부터 자신보다 술을 더 사랑하게 되는데 그게 술이 가진 가장 강력한 힘이다. 그만큼 술은 매혹적이고 집요하게 술꾼을 사로잡는다.

그 힘에 끌려다니기란 쉬워도 너무 쉬웠다. 분명 지난밤에 술을 마셨는데도 해가 지면 술 생각이 간절해진다. 똑같은 갈망으로 한데 모인 술꾼들은 자신이 얼마나 술을 사랑하는지 과시하기 시작한다. 과시는 술꾼들을 관통하는 정서다. 술꾼이 외로움이나 슬픔 때문에 술을 마신다고 여기는데 그것은 오해다. 오히려 그들은 역동적이고 화려하기까지 한 감정 때문에 술을 마신다. 과시와 더불어서 그들이 공유하는 정서가 또 있는데 그건 바로 분노와 오기다. 처음에는 술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시작하지만 결국 분노 때문에 끝을 본다. 기어이 술이 바닥나는 것을 보면서 곧 죽어도 이렇게 마시는 것이 옳음을 증명하려고 한다.

나 또한 분노가 많은 사람이지만 방향 없는 분노는 좋아하지 않는다. 종국에는 그것이 심각한 자기혐오를 불러온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나는 술과 술꾼으로부터 물러섰다. 술을 좋아하고 사랑할 뻔도 했지만 술꾼은 될 수 없다는 결론을 얻고서.

술과 거리를 두더라도 술이 필요한 때가 찾아온다. 혼자 살고 혼자 일하고 혼자 먹는 나는 술도 혼자 마신다. 맥주나 위스키도 마시지만 혼자 마시기에 가장 좋은 술은 와인이다. 와인은 향이나 색상, 마실 때의 느낌과 맛, 마시는 방식까지도 아름답다. 글라스에 담긴 자태만 봐도 어쩐지 외로움이 희석되는 것 같다. 이러한 와인 취미는 요리 취미와 맞물려서 더욱 증폭됐다. 음식이 완성될 즈음에 와인을 한 병 들고 찾아오는 친구는 항상 반갑다. 그런데 솔직하게 말하면 혼자서 식탁을 차리고 와인을 따르는 순간도 그에 못지않게 즐겁다. 오랜 세월 축제와 향연의 주인공이었기 때문일까? 와인을 마실 때의 가장 좋은 친구는 와인인 것 같다.

그리고 샴페인! 샴페인은 내로라하는 전설적인 술꾼들이 가장 사랑한 술이다. 다른 술을 모두 끊어도 최후까지 끊지 못하는 술이 바로 샴페인이라고 하는데 그 이유를 어렴풋하게나마 짐작할 수 있다. 샴페인은 그 자체로 너무나 완벽하고 근사해서 요리마저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가벼운 샐러드나 프로슈토(생햄), 딸기만 있어도 충분하다. 알코올 중독 때문에 요양원을 들락거린 소설가 레이먼드 카버가 쓴 단편소설에는 도넛을 안주 삼아서 샴페인을 마시는 사람이 등장한다.

그런데 이 아름다운 술은 종류가 많아도 너무 많아서 그것을 고르는 과정이 만만치 않다. 이제 술과 얽힌 도전 따위는 그만하고 싶은데 방법이 없었다. 누군가 와인을 대신 골라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암호 같은 라벨을 읽으면서 나는 지금까지 마신 와인의 맛을 복기했다. 한때 와인 고르기를 전담했던 술꾼 남자친구의 말이 드문드문 떠올랐다. 메도크, 소비뇽 블랑, 말베크 같은 단어들이 머릿속에서 마구 뒤섞이고 기미상궁 자리에 오르려는 생각시처럼 모든 감각과 기억력을 총동원했지만 역부족이었다.

꿈은 꿔볼 수 있으니까

결국 숱한 좌절과 우울한 시련이 이어진 끝에 마음을 비웠다. 와인 마니아, 전문가를 자처하는 사람들은 누구인가? 터무니없는 액수를 와인 마시는 데 쓰는 사람들이기도 하지만 와인에 대해서 알고 말겠다는 집념으로 똘똘 뭉친 사람들이 아닌가? 만약에 꽃말처럼 술말이라는 것이 있다면 와인의 술말은 ‘아는 척을 하고 말 거야!’가 될 것이다. 그렇다면 당분간은 와인을 알지 못하지만 좋아하는 사람 단계에 머물러야겠다.

그런데 이 하수조차 알고 있는 와인의 정석은 값이 나갈수록 맛이 탁월하다는 것이다. 소설가 아멜리 노통브는 <샴페인 친구>라는 작품을 썼을 정도로 샴페인을 좋아한다. 실제 경험을 바탕으로 했다는 이 소설의 주인공 아멜리와 그의 술친구 페트로니유는 샴페인을 마시면서 모험을 감행하는데 이들이 처음 만나서 마신 샴페인은 루이 뢰드레 크리스탈이다. 호기심에 가격을 검색해보니 여간해서는 맛보기 어렵겠다.

하지만 아무러면 어떤가, 꿈은 꿔볼 수 있는 것 아닌가? 그런 날이 정말 온다면 페트로니유 같은 친구와 함께해도 좋겠지만 혼자라도 상관없을 것 같다. 그날은 아마도 내 인생의 가장 기쁜 날이거나, 가장 슬픈 날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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