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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들키면 바람, 안 들키면 ‘환승’

등록 2017-12-24 09:29수정 2017-12-24 10:39

[토요판]이런, 홀로!?
환승이별

어쨌든 겉보기엔 나와의 관계를 정리한 뒤 시작한 연애이니 문제 될 것은 없고, 실제로 환승이별이었던들 헤어짐 전에 이미 그네들의 관계가 시작됐는지 나로선 알 수가 없다. 그걸 알았으면 바람이었겠지. 게티이미지뱅크
어쨌든 겉보기엔 나와의 관계를 정리한 뒤 시작한 연애이니 문제 될 것은 없고, 실제로 환승이별이었던들 헤어짐 전에 이미 그네들의 관계가 시작됐는지 나로선 알 수가 없다. 그걸 알았으면 바람이었겠지. 게티이미지뱅크

얼마 전 회사 동료가 자신이 제작하는 영상의 패널로 나와줄 수 있느냐고 물었다. 그 영상의 주제는 ‘환승이별’이었다. 환승이별을 한 사람들과 환승이별을 당한 사람들이 나오는 그런 영상이었다. 환승이별이란 두 사람이 연애 뒤 헤어짐을 맞이했을 때, 아주 빠른 속도로 다른 사람을 만나는 것을 뜻하는 조금은 오래된 신조어다. 헤어짐이 다가오기 전 관계의 말미쯤 다른 사람과 썸을 타거나 헤어진 직후 바로 다른 연애를 시작하는 걸 요즘은 환승이별이라 부른다. 말 그대로 연애 관계에서, 한 사람에서 다른 사람으로 ‘공백’ 없이 환승한다는 뜻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그렇듯, 상대의 환승이별 여부는 약간의 추측에 기반하는 경우가 많다. 왜냐하면 어쨌든 겉보기엔 나와의 관계를 정리한 뒤 시작한 연애이니 문제 될 것은 없고, 실제로 환승이별이었던들 헤어짐 전에 이미 그네들의 관계가 시작됐는지 나로선 알 수가 없다. 그걸 알았으면 바람이었겠지. 그래, 좀더 솔직히 말하면 들키면 바람이고 안 들키면 환승이겠지!

여전히 알 길은 없다

아무튼 나 역시 약간의 추측에 기댄, 상대의 환승에 ‘환승당해버린 적’이 있다. 헤어짐의 징조가 뚜렷하던 연애 끄트머리쯤이었다. 늦은 시간, 이자카야에서 한바탕 크게 싸우고서 눈물을 펑펑 흘리고 있던 그때 갑작스레 울린 (당시) 애인의 폰에 뜬 어떤 이름. 나와 장거리(연애)를 하던 사이에 부쩍 친해졌다던 그 사람. 요즘 좀 자주 만난다던 그 사람. 둘이 친구라고 하니 한번도 그 사이를 의심해본 적이 없었는데, 급히 거절을 누르고 폰을 정리하는 모습에 순식간에 뒤통수를 맞은 듯한 느낌이 들었다. 유난히 그랬던 이유를 나도 모른다. 그냥 그냥. 그땐 그냥 그런 느낌이 들었다. ‘아 이거 뭔가 이상하다.’

그 끝은 뻔했다. 얼마 안 있다 우린 몇 번을 더 다투고 헤어졌다. 그리고 또 얼마 안 있다 에스엔에스(SNS)엔 그 둘이 다정히도 함께 찍은 사진이 올라왔다. 환승의 패턴이 늘 그러하듯, 헤어진 지 얼마 되지 않은 시간 동안엔 잠잠하다 일정 시간(자신만의 유예 기간)만 지나면 기다렸다는 듯이 사진들이 쏟아졌다. 그제야 조각들이 맞춰졌다. 다른 친구들과 함께 같이 갔다던 스키장이 혹시?… 다른 친구들과 함께 갔다던 여행이 혹시?… 다른 친구들과 함께 갔다던 드라이브가 혹시?!….

들키면 바람, 안 들키면 ‘환승’
환승이별 여부는 추측에 기반한다
그제야 조각들이 맞춰졌다…

혼자가 싫어 환승하는 사람들
연애를 채근하는 세상에서
당장은 조금 힘들더라도
숨 한번 고르는 시간 가졌으면

사실 아직도 그들이 바람을 피웠는지, 아니면 헤어진 뒤에야 감정이 갑작스럽게 싹트고 순식간에 연애까지 하게 됐는지 나는 알 길이 없다. 딱히 알고 싶지도 않다. 그러므로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도 그렇듯 그의 환승이별 여부도 결국 나의 약간의 추측에 기반한다. 물론 그것은 차인 나에게 언젠가부터 확신이 돼버렸다. 환승당한 다른 친구들도 크게 다를 바는 없었다. 6년이나 사귄 애인이 시간을 갖고 생각해보자던 도중 직장 동료에게 환승해버린 일, 헤어지기 전부터 다른 사람과 연락을 이미 하고 있던 일.

주변의 환승 전문가 친구들에게 질문의 답을 재촉하니 대부분의 이유론 ‘혼자가 싫어서’를 꼽았다. 이들은 비교적 연애라는 것 자체의 종료를 두려워했다. 내가 흘린 몇 바가지의 눈물이 ‘그 사람’을 잃었다는 사실에서 온 거라면, 환승 전문가들은 그것도 그거지만 무엇보다 내 옆에 ‘아무도’ 없다는 사실을 두려워했다. 곁에 아무도 없는 상태인 것보다는 누군가와 만나는 상태가 더 나은, 그러나 지금 관계에선 충족하지 못할 때 환승 구간에 들어서기도 한다.

물론 아주 적기는 했지만, 다른 유의 환승러도 있었다. 어떤 환승러는 상대방의 지속적인 감정 폭력으로 헤어짐을 결심했지만 스스로 헤어짐을 고하지 못해, 새로운 사람이 올 때까지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어쨌거나 환승 전문가 중 많은 친구들이 실제로 새로운 사람이 옆에 오지 않는 이상 헤어지지 못한다고 답했다. 그렇다. 이들은 나와는 다른 디엔에이(DNA)를 가진 것이다!

나는 적응을 잘하는 편이었다. 아주 오랜만에 연애라는 환경에 처해도 당황하지 않고 연애에 잘 적응해나갔다. 반대로 헤어지고도 마찬가지였다. 물론 며칠을 질질 짜기는 했지만, 어쨌거나 다시 혼자가 된 일상을 잘 정돈해나갔다. 헤어짐이 슬펐던 이유는 연애의 종료 때문이 아니라, 인생에서 소중한 한 사람을 영영 잃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오히려 연애 직후엔 또다시 연애를 시작하기도 버거웠다.

그러나 환승 전문가들은 달랐다. 그 사람들은 소중한 한 사람을 영영 잃었다는 사실 외에도 무언가 문제를 겪었다. 어떤 환승 전문가는 사랑받는 느낌을 통해 자신의 자존감을 확인할 수 있는 자신의 기질 탓에, 연애의 종료란 바닥을 향해 곤두박질치는 것과 다름없다고 말했다. 또 어떤 환승 전문가는 혼자의 느낌이 두렵다고도 했다. 그러니 헤어지기 전에 미리 만날 구석을 마련해두는 거라고, 의지하고 기댈 사람이 언제나 필요한 것이라고. 또 어떤 환승 전문가는 옛 애인을 자신의 힘만으로 온전히 잊을, 그 고통을 혼자 오롯이 감내할 자신이 없다고도 말했다.

사실 환승이별이라는 주제는 늘 뜨겁고 예민한 주제다. 환승이별의 정의나 기준은 모호하고 사람들마다 다음 사람을 맞이하는 데 필요한 시간도 다르다. 동료가 제작한 영상에 출연한 패널들도 모두 다른 정의와 기준과 환승 에티켓을 들고 온다. ‘그래도 적어도 ㅇ주 뒤는 돼야’, ‘대놓고 티 내진 말아야’ 등등. 대학교 대나무숲에 환승했다고 욕을 먹었다며 억울하다는 글이 올라오면, 글쓴이가 잘못했니 사적인 연애에 왜 도덕을 들이대니 한바탕 난리가 난다.

연애가 끝나고 나면 애도의 기간이 필요하다는 주장도 있다. 그 애도의 기간에 대한 의견도 분분하다. 이만큼이나 의견이 분분하고 정해진 기준이 없으니 정답 역시 없다. 결국 연애란 언제든 깨어질 수 있는 것임을 상호 합의한 뒤에 시작하는 관계다. 깨어지지 않길 바라는 것, 상대가 환승하지 않길 바라는 것은 오로지 상대의 최소한의 선의와 배려와 예의에 기댈 수밖에 없다. 냉정하지만 그게 사실이다. 일정 기간 동안 만난 상대를 향한 도의와 에티켓은 결국 그 사람의 마음에 달렸다.

다시 올 건강한 연애를 위하여

반대로, 남에게 연애로 지청구 놓을 짬은 아니지만, 환승을 밥 먹듯이 하는 친구에게 혼자 있는 시간을 조금이라도 길러보라고 이야기한 적이 있다. 당장은 조금 힘들더라도 우선은 혼자 있는 시간을 좀 가져보라고. 혼자 있는 시간 동안 그간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보일 테고, 또 새로운 것들로 시간을 보낼 수도 있다고. 그동안 네가 더 튼튼해질 거라고. 반드시 연애를 해야만, 혼자인 시간을 벗어나야만 네가 잘 살 수 있는 건 아니라고 괜히 한마디를 얹어도 봤다. 괜찮아, 난 환승당해봤으니 이런 말 정도는 해줄 수 있어, 라며.

아무튼, 모든 환승하는 사람들이 그러진 않겠지만, 주변의 대부분 환승 전문가들은 혼자의 시간을 도저히 못 견뎌했다. 그네들도 가끔은 스스로의 연애와 이별의 방식을 부대껴했다. 어쨌거나 연애를 하지 않는 젊은 세대를 채근하는 사회에서, 지속적인 연애에 대한 갈구를 이해 못할 것도 아니지만 그래도 내 친구들이 숨 한번 고를 시간을 가졌으면 좋겠다. 혼자서도 충분히 상처받지 않고 행복할 수 있을 거라고. 오히려 다음에 올 건강한 연애를 위해 꼭 필요할지도 모르겠다고.

혜화붙박이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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