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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그때 그사람들 첫 공판

등록 2005-11-24 21:36수정 2005-11-25 15:14

표현의 자유 침해 논란이 일고 있는 영화 ‘그때 그 사람들‘이 개봉된 3일, 서울의 한 극장가에서 중년 여성들이 영화 시간을 기다리고 있다. (서울=연합뉴스)
표현의 자유 침해 논란이 일고 있는 영화 ‘그때 그 사람들‘이 개봉된 3일, 서울의 한 극장가에서 중년 여성들이 영화 시간을 기다리고 있다. (서울=연합뉴스)
#11월24일 오후 4시 서울중앙지법 민사법정 559호

박지만씨 변호인(이하 박) : 박정희 대통령이 사망하고 나서 국무위원들이 시체를 확인하는 장면에서 벌거벗은 박 대통령의 성기 부분에 누군가 모자를 올려놓는 장면이 영화 <그때 그사람들>에 나온다. 그 장면은 뭘 상징하는가?

김영진 <필름2.0> 편집위원(이하 김) : 영화 <효자동 이발사>를 보면 “각하가 곧 국가다”라는 말이 나온다. 그것처럼 국정운영 담당자에 대한 비판·풍자가 아닌가…

박 : 돌려서 말하지 말고 짧게 답해달라. 국무위원들이 시체를 확인하는데 누군가 성기 위에 모자를 올려놓는 장면은 대체 무얼 상징하나?

김 : 그렇게 영화 장면 하나하나를 현실과 등치시키지 마시고…

박 : 무엇을 상징하는지 말해달라…

김 : 화면 자체가 국가권력에 대한 상징이다


박 : 국가권력이 성기로 상징됩니까?

김 : …

“임상수 감독의 영화 <그때 그사람들>이 고 박정희 대통령의 명예를 훼손했다”며 아들 지만씨가 영화제작사 등을 상대로 낸 영화상영금지 청구소송의 첫 공판이, 소송이 접수된지 9달만에 열렸다.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13부(재판장 조경란)의 공판개시 선언이 민사법정 559호에 울려퍼진 오후 4시 거의 모든 법원 기자들은 헌법재판소에 있었다. 원·피고 모두 불참했고 3명의 기자와 재판 견학을 나온 몇몇 법대 학생들만 듬성듬성 앉은 사이로 빈 자리가 많았지만, 피고 쪽 증인과 박지만씨 변호인의 공방이 내뿜는 열기로 공기는 뜨거웠다.

피고 ㈜명필름 쪽은 역사학자 한홍구(46) 성공회대학교 교양학부 교수와 김영진(40) <필름2.0> 편집위원을 증인으로 내세웠다. 먼저 증인석에 앉은 김 편집위원은 “이 영화의 주인공은 박정희 대통령이 아니라 대통령 주변 인물과 그 시대를 살았던 민초들, 한마디로 ‘그때 그사람들’ 모두”라고 말했다. 김 편집위원은 평론가답게 “박정희 대통령을 중점 묘사하려 했다면 고전적인 서사기법상 클라이맥스인 암살 장면이 마지막에 갔을테지만, 오히려 이 영화에서 대통령의 죽음은 극의 전개 중반에 나온다”며 ‘서사 분석’을 근거로 삼았다.

그러나 박지만씨 변호인은 “영화의 첫 머리에 부마시위를 진압하는 다큐 화면을 보여주고 바로 뒤이어 나레이터의 입을 빌려 박정희 대통령의 성생활을 묘사한 것은, 관객으로 하여금 ‘시위진압이 역사적 사실인 것처럼 사생활 묘사도 진실’이라고 믿게 하려는 연출 의도가 있지 않나”고 추궁했다. 박씨 변호인은 미국 감독 마이클 무어의 다큐멘터리 <화씨 911>과의 기법 차이도 근거로 제시했다. 그는 “<화씨 911>은 나레이션과 취재원의 인터뷰를 철저히 구분해 관객으로 하여금 제작자의 주장인지, 아니면 취재원의 주장인지 명확하게 알 수 있도록 하고 있다”고 논박하며 <그때 그사람들>의 서술방식에 문제가 있음을 주장했다.

김 편집위원의 “노”라는 ‘멍군’에 박씨 변호사의 “왜곡 아니냐”는 ‘장군’은 계속됐다. 특히 박씨 변호인은 “박 대통령의 성기 위에 모자를 놓는 장면은 의도된 명예훼손 아닌가”라고 따졌고, 김 편집위원은 “그건 영화적 상징일뿐”이라고 답했다. 몇번의 실랑이 끝에 박씨 변호인은 상기된 목소리로 따져물었다. “국가권력이 성기로 상징됩니까?” 김 편집장은 이에 황당해하며 답을 못했고, 변호인도 머쓱한 듯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당시 전두환씨가 책임자로 있던 합동수사본부의 조사자료와 다른 묘사는 모두 허위”라는 박지만씨쪽의 주장을 반박하기 위해 한홍구 교수가 증인석에 올랐다. 박지만씨 쪽은 △ 박 전 대통령을 여색을 밝히는 인물로 묘사한 것이 명예훼손이며 △ 술자리, 여자관계등 망자의 ‘사생활’을 소재로 삼은 것이 명예훼손이라고 주장했고, 한 교수는 이를 조목조목 반박했다. 한 교수는 “박 전 대통령의 여자관계가 복잡했다는 가수 심수봉씨 자서전 등 여러 10·26 관련자들의 증언에 신빙성이 있다”고 증언했다.

한 교수는 특히 “유신 말기 박 대통령의 술자리, 여자 문제는 보호받을 가치가 있는 ‘사생활’이 아니었다”고 주장했다. 10·26 당시 술자리는 개인적인 술자리가 아니라 차지철씨 등 정권의 실세들이 모인 자리였고, 연예인 등 접대여성 관련 업무를 중앙정보부 의전담당관이 맡은 점을 보면 국민의 세금으로 만들어진 술자리였다는 것이다. 이어 그는 “박 대통령이 재혼했을 때 영부인이 가질 힘을 두려워해 박 전 대통령 주변의 어느 참모도 그의 재혼을 바라지 않았고, 그래서 더 열성적으로 여성들을 조달했다”고 증언했다. 박 전 대통령의 죽음은 , 권력과 여성 그리고 유신 말기 청와대 권력구조의 ‘삼차함수’가 낳은 ‘구조적 결과’라는 분석이었다. 그는 “오히려 진보진영은 이 영화에 대해 ‘박정희를 너무 우아하게 묘사했다’고 많이 비판했다”며 “나 역시 이 영화가 인혁당 사건으로 8명을 사형시켰던 박 전 대통령의 부정적인 모습을 ‘죽였고’, 너그러운 인물로 잘 묘사했다고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박씨 변호인은 명필름 쪽이 증거로 낸 도서 대부분이 10·26이 터진 훨씬 이후에 씌어져 실제 현장 조사에 근거하지 않았을 가능성을 지적했다. 그러나 한 교수는 대표적인 박정희 지지자인 <월간조선>의 조갑제씨조차 자신의 책에서 육영수 여사의 발언을 인용하며 박 전 대통령의 여자관계가 복잡했음을 증언하고 있다고 반박했다.

한 교수는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는 박 전 대통령의 발언을 인용하며 증언을 마무리했다. “그는 스스로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라고 말합니다. 저는 박정희 대통령에게는 ‘지킬 명예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박 전 대통령과 같은 공인에 대해서는 역사적 평가가 있을 따름이고, 그 평가는 속세의 법정이 아니라 역사의 법정에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나같은 역사학자가 법정에 서있는 현실이 서글픕니다.” 증언을 마치는 그의 표정은 씁쓸해보였다. 그러나 박씨 변호인은 안경을 연신 추어올리며 “평가와 명예훼손은 엄연히 다른 것”이라며 “박 전 대통령은 지킬 명예가 없다”는 한 교수의 마지막 발언을 계속 문제삼았다.

한 교수의 표현을 빌리자면, ‘역사의 법정’에는 영원한 승자도 영원한 패자도 없다. 그러나 바깥세상에서 아직 박 전 대통령의 공과를 따지는 사이, ‘속세의 법정’에서는 누군가의 손이 올라갈 것이다. 그러나 승자가 누군든 ‘역사의 법정’에서마저 승소했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다음번 ‘속세의 법정’은 새달 15일 11시에 열린다.

고나무 기자 dokk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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