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63년 현충사 충무공 영정 앞에서 연설 중인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분석] 박정희는 왜 ‘현충사’에 지극정성을 쏟았나?
서울 광화문 현판을 둘러싼 논란이 충남 아산 현충사 논란으로 ‘남하’했다. “현충사는 이순신 장군 사당이라기보다 박정희 기념관 같은 곳이다. 그것 자체도 60~70년대 당시 건축양식을 반영한 사당이라는 의미가 있으니 손 댈 생각이 없다.”(유홍준 문화재청장, 김형오 한나라당 의원과의 편지 공방에서)
박정희 깎아내리기를 넘어서 그의 딸까지 흔들려 한다는 ‘정치적 음모론’ 앞에서도 10년째 진행중인 ‘경복궁 복원 프로젝트’의 원칙론을 내세우며 꿋꿋하게 버텨온 유홍준 문화재청장도 ‘현충사=박정희 기념관’이라는 자신의 발언은 그만 거둬들이고 말았다. 이번엔 한나라당과 보수신문뿐 아니라 누리꾼(네티즌)까지 공격에 가세했다.
한홍구 교수 “현충사 성역화는 ‘동백아가씨’ 금지곡 지정과 관계”
그러나 현충사가 온전히 이순신 장군 사당의 의미로만 해석될 수 없다는 견해가 넓게 자리잡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는 “유홍준 청장의 발언이 공직에 있는 사람으로서 지나친 표현일 수는 있어도 그 취지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고 말했다. 무엇보다 현충사를 민족의 성역으로 만든 장본인이 다름아닌 박정희다. 현충사에 쏟아부은 박정희의 정성은 지극했다. <반동적 근대주의자>의 저자인 전재호 서강대 사회과학연구소 연구교수는 “박정희는 현충사 성역화 관계관 회의에도 직접 참석했고, 성역화 공사 현장에도 여러차례 다녀갔다”고 말했다. 네차례에 걸쳐 사당을 중건하고 기념관을 신축했으며, 그 결과 10만6천평이던 성역이 42만5천평으로 늘어났다. 현충사 관리소장은 이사관급인 예비역 준장이 임명됐다. 전두환 집권 뒤 이 자리가 부이사관, 서기관급으로 차츰 낮아진 데서도 현충사에 대한 박정희의 각별한 애정은 역설적으로 드러난다. 박정희가 사랑한 건 현충사가 아니라 이순신 장군, 그리고 그와 관련된 모든 것이었다. 대통령 재임 18년 동안 충무공 탄신일 행사에 14번을 참석했다. 전국의 충무공 관련 유적을 모두 보수했고, 광화문 네거리를 비롯해 전국 곳곳에 이순신 장군상을 세웠으며, 현판도 여러개 썼다. 노산 이은상의 책 <충무공 발자국 따라 태양이 비치는 길로>라는 책에는 ‘민족의 태양’이라는 휘호와 함께 이은상의 시를 직접 필사해 싣게 하기도 했다. 한홍구 교수는 “박정희의 현충사 성역화 동기는 가수 이미자의 ‘동백아가씨’를 금지곡으로 만든 동기와 닿아 있다”고 설명했다. 박정희에게 현충사 성역화와 ‘동백아가씨’금지 조처는 일본과 관련한 그의 원죄에 깊이 뿌리를 두고 있다. 만주국 장교 출신에다 한·일수교협정을 돈으로 바꾼 그에게 씌워진 ‘친일’의 그림자를 걷어낼 자신만의 ‘극일 카드’가 필요했다는 얘기다. ‘동백아가씨’는 1963년 발표된 이미자의 최고 히트곡이지만, 발표 2년 뒤인 65년 방송금지 처분을 받고 68년엔 음반 발매가 중단되는 수난을 겪었다. 곡조가 일본 가요인 엔카를 빼닮았다는 게 금지 이유였다. 그러나 우리나라 트로트 가요 자체가 엔카 풍인 걸 감안하면 ‘동백아가씨’는 본때 보이기의 희생카드였다. 박정희는 65년 일본과 수교를 맺은 뒤 국민의 거센 반발을 무마하려고 자신의 민족의식을 과시할 상징조작이 필요했고, 가장 만만한 대중가요가 선택된 것이다. ‘동백아가씨’는 이런 어처구니없는 이유로 20년 이상 금지곡으로 묶여 있다 87년 6월항쟁 뒤에야 겨우 ‘복권’됐다. 전재호 교수도 “박정희는 일본을 물리치고 문관들에게 핍박받은 이순신 장군을 동일시 대상으로 상징조작해 자신의 친일파 경력과 군사 쿠데타 경력을 희석시키려 한 것”이라고 분석했다.
한-일수교를 돈으로 바꾼 만주국 장교 출신에다 쿠데타 집권한 ‘일본콤플렉스’
친일 그림자 걷어낼 ‘극일카드’로 이순신 동일시…‘동백아가씨’는 ‘아닌밤 홍두깨’ 물론 박정희의 이순신 사랑은 개인적 취향과 무관하지 않을 수도 있다. 전재호 교수는 “박정희는 자신의 책 <우리 민족이 나아갈 길>에서 조선역사를 아주 부정적으로 설명하면서도 이순신 장군 등 몇몇 인물을 유독 존경하는 인물로 꼽고 있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자신이 좋아하는 특정한 역사적 인물을 성웅화하고 관련 유적을 성역화하는 것 자체가 역사와 문화재를 사유화하는 행위라는 비판을 피해갈 수는 없다. 현충사에 일본 사무라이를 상징하는 ‘금송’을 개인취향에 맞춰 잔뜩 심어놓은 것도 이런 사정과 무관하지 않다. 이런 점에서 박정희의 현충사 성역화와 광화문 현판은 같은 맥락 위에 놓여 있다. 강임산 ‘한국의 재발견’ 사무국장은 “임금이 건물 내력을 써서 내리면 이를 판각해서 건물 내부에 걸어놓은 경우는 있어도 현판을 직접 쓴 사례는 없다”며 “대통령이니까 건물 현판을 쓴다는 발상은 전제군주시절에도 하지 못했던 것”이라고 말했다. 전재호 교수는 “박정희가 현판을 쓴 것은 임금이 서원에 편액을 내려 ‘사액서원’을 만드는 조선시대 전제군주적 행태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말했다. 광화문은 문화유산이 개인의 상징조작 도구가 됐다는 점에서도 현충사와 공통점이 있는 것으로 지적된다. 강임산 국장은 “광화문은 세종로에서 경복궁을 거쳐 청와대로 이어지는 국가권력 상징공간의 관문”이라며 “박정희는 불에 타 사라진 광화문을 재건함으로써 자신의 권력에 정당성을 부여하려 한 것으로 보인다”고 해석했다.
“광화문 현판은 임금이 서원에 편액 내려 ‘사액서원’화 하는 전제군주적 행태” 광화문이 돌 대신 콘크리트로 지어진 사정도 이런 의도와 무관하지 않다. 강 국장은 “68년 준공 당시 ‘대한뉴스’를 보면 ‘산업화로 얻은 우리 기술을 이용해 콘크리트로 복원하게 됐다’는 내용이 나온다”며 “콘크리트 광화문은 국가동원 개발시대의 이데올로기를 선전하고 있는 셈”이라고 말했다. 또, “그나마 광화문의 위치와 각도가 총독부 건물에 축을 맞추는 바람에 제자리에 재건되지 못했다”며 “이는 자신의 친일행적을 가리려는 상징조작 의도에도 불구하고 어쩔 수 없는 한계를 드러낸 것”이라고 덧붙였다. ‘경복궁 복원 프로젝트’에 따라 현판 교체가 추진되고 있는 뻔한 사정을 알면서도 한나라당과 보수언론이 개인의 상징조작으로 얼룩진 유적의 복원작업에 한사코 반기를 드는 것은 아직 한국사회가 상징조작으로 지탱됐던 과거 권력의 기득권에서 온전히 놓여나지 못했음을 보여준다.
박정희가 콘크리트로 재건하고 현판 쓴 광화문
총독부 건물을 기준으로 삼아 인왕산-경복궁 축과 충돌 전재호 교수는 “4·19 이후 이승만 동상을 끌어내리는 것은 아무 문제제기 없이 정당화됐는데도 박정희가 숨지고 20년이 지나 영등포 문래공원의 박정희 흉상을 제거하자 난리법석이 벌어진 건 박정희 정권 당시 권력이 아직도 기득권력을 장악하고 있기 때문”이라며 “18년이라는 초장기 집권 탓에 박정희가 문화유적에 남겨놓은 흔적도 그만큼 많은데, 이를 하나씩 하나씩 바로잡아 나가려는 움직임이 있어서 그나마 다행”이라고 말했다. 박정희가 만든 역사도 역사고, 문화재 또한 문화재가 아니냐는 주장도 존재한다. 그러나 강임산 국장은 “애초 누울 자리를 보고 발을 뻗은 게 아니기 때문에 원래대로 돌려놓는 건 당연하다. 다만 광화문 현판도 역사의 한 기록인만큼 떼어내서 따로 잘 보관한 뒤 많은 사람들이 보고 그 뜻을 나름대로 헤아리게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강 국장은 “자신의 취약한 정통성을 가리려고 역사적 인물과 유적을 상징조작에 가장 많이 동원한 사람이 박정희이기 때문에 문화재 바닥에선 도저히 그를 피해갈 수 없다”며 “그가 남긴 것들도 적절히 재평가한 뒤 이를 활용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개발할 필요가 있다”고 덧붙였다. 박정희의 역사와 박정희의 유산은 이제 제자리를 찾아주고 제대로 감상할 수 있게 해야 할 때라는 얘기다. <한겨레> 온라인뉴스부 안영춘 기자 jona@hani.co.kr
그러나 현충사가 온전히 이순신 장군 사당의 의미로만 해석될 수 없다는 견해가 넓게 자리잡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는 “유홍준 청장의 발언이 공직에 있는 사람으로서 지나친 표현일 수는 있어도 그 취지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고 말했다. 무엇보다 현충사를 민족의 성역으로 만든 장본인이 다름아닌 박정희다. 현충사에 쏟아부은 박정희의 정성은 지극했다. <반동적 근대주의자>의 저자인 전재호 서강대 사회과학연구소 연구교수는 “박정희는 현충사 성역화 관계관 회의에도 직접 참석했고, 성역화 공사 현장에도 여러차례 다녀갔다”고 말했다. 네차례에 걸쳐 사당을 중건하고 기념관을 신축했으며, 그 결과 10만6천평이던 성역이 42만5천평으로 늘어났다. 현충사 관리소장은 이사관급인 예비역 준장이 임명됐다. 전두환 집권 뒤 이 자리가 부이사관, 서기관급으로 차츰 낮아진 데서도 현충사에 대한 박정희의 각별한 애정은 역설적으로 드러난다. 박정희가 사랑한 건 현충사가 아니라 이순신 장군, 그리고 그와 관련된 모든 것이었다. 대통령 재임 18년 동안 충무공 탄신일 행사에 14번을 참석했다. 전국의 충무공 관련 유적을 모두 보수했고, 광화문 네거리를 비롯해 전국 곳곳에 이순신 장군상을 세웠으며, 현판도 여러개 썼다. 노산 이은상의 책 <충무공 발자국 따라 태양이 비치는 길로>라는 책에는 ‘민족의 태양’이라는 휘호와 함께 이은상의 시를 직접 필사해 싣게 하기도 했다. 한홍구 교수는 “박정희의 현충사 성역화 동기는 가수 이미자의 ‘동백아가씨’를 금지곡으로 만든 동기와 닿아 있다”고 설명했다. 박정희에게 현충사 성역화와 ‘동백아가씨’금지 조처는 일본과 관련한 그의 원죄에 깊이 뿌리를 두고 있다. 만주국 장교 출신에다 한·일수교협정을 돈으로 바꾼 그에게 씌워진 ‘친일’의 그림자를 걷어낼 자신만의 ‘극일 카드’가 필요했다는 얘기다. ‘동백아가씨’는 1963년 발표된 이미자의 최고 히트곡이지만, 발표 2년 뒤인 65년 방송금지 처분을 받고 68년엔 음반 발매가 중단되는 수난을 겪었다. 곡조가 일본 가요인 엔카를 빼닮았다는 게 금지 이유였다. 그러나 우리나라 트로트 가요 자체가 엔카 풍인 걸 감안하면 ‘동백아가씨’는 본때 보이기의 희생카드였다. 박정희는 65년 일본과 수교를 맺은 뒤 국민의 거센 반발을 무마하려고 자신의 민족의식을 과시할 상징조작이 필요했고, 가장 만만한 대중가요가 선택된 것이다. ‘동백아가씨’는 이런 어처구니없는 이유로 20년 이상 금지곡으로 묶여 있다 87년 6월항쟁 뒤에야 겨우 ‘복권’됐다. 전재호 교수도 “박정희는 일본을 물리치고 문관들에게 핍박받은 이순신 장군을 동일시 대상으로 상징조작해 자신의 친일파 경력과 군사 쿠데타 경력을 희석시키려 한 것”이라고 분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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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수교를 돈으로 바꾼 만주국 장교 출신에다 쿠데타 집권한 ‘일본콤플렉스’
친일 그림자 걷어낼 ‘극일카드’로 이순신 동일시…‘동백아가씨’는 ‘아닌밤 홍두깨’ 물론 박정희의 이순신 사랑은 개인적 취향과 무관하지 않을 수도 있다. 전재호 교수는 “박정희는 자신의 책 <우리 민족이 나아갈 길>에서 조선역사를 아주 부정적으로 설명하면서도 이순신 장군 등 몇몇 인물을 유독 존경하는 인물로 꼽고 있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자신이 좋아하는 특정한 역사적 인물을 성웅화하고 관련 유적을 성역화하는 것 자체가 역사와 문화재를 사유화하는 행위라는 비판을 피해갈 수는 없다. 현충사에 일본 사무라이를 상징하는 ‘금송’을 개인취향에 맞춰 잔뜩 심어놓은 것도 이런 사정과 무관하지 않다. 이런 점에서 박정희의 현충사 성역화와 광화문 현판은 같은 맥락 위에 놓여 있다. 강임산 ‘한국의 재발견’ 사무국장은 “임금이 건물 내력을 써서 내리면 이를 판각해서 건물 내부에 걸어놓은 경우는 있어도 현판을 직접 쓴 사례는 없다”며 “대통령이니까 건물 현판을 쓴다는 발상은 전제군주시절에도 하지 못했던 것”이라고 말했다. 전재호 교수는 “박정희가 현판을 쓴 것은 임금이 서원에 편액을 내려 ‘사액서원’을 만드는 조선시대 전제군주적 행태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말했다. 광화문은 문화유산이 개인의 상징조작 도구가 됐다는 점에서도 현충사와 공통점이 있는 것으로 지적된다. 강임산 국장은 “광화문은 세종로에서 경복궁을 거쳐 청와대로 이어지는 국가권력 상징공간의 관문”이라며 “박정희는 불에 타 사라진 광화문을 재건함으로써 자신의 권력에 정당성을 부여하려 한 것으로 보인다”고 해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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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 현판은 임금이 서원에 편액 내려 ‘사액서원’화 하는 전제군주적 행태” 광화문이 돌 대신 콘크리트로 지어진 사정도 이런 의도와 무관하지 않다. 강 국장은 “68년 준공 당시 ‘대한뉴스’를 보면 ‘산업화로 얻은 우리 기술을 이용해 콘크리트로 복원하게 됐다’는 내용이 나온다”며 “콘크리트 광화문은 국가동원 개발시대의 이데올로기를 선전하고 있는 셈”이라고 말했다. 또, “그나마 광화문의 위치와 각도가 총독부 건물에 축을 맞추는 바람에 제자리에 재건되지 못했다”며 “이는 자신의 친일행적을 가리려는 상징조작 의도에도 불구하고 어쩔 수 없는 한계를 드러낸 것”이라고 덧붙였다. ‘경복궁 복원 프로젝트’에 따라 현판 교체가 추진되고 있는 뻔한 사정을 알면서도 한나라당과 보수언론이 개인의 상징조작으로 얼룩진 유적의 복원작업에 한사코 반기를 드는 것은 아직 한국사회가 상징조작으로 지탱됐던 과거 권력의 기득권에서 온전히 놓여나지 못했음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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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가 콘크리트로 재건하고 현판 쓴 광화문
총독부 건물을 기준으로 삼아 인왕산-경복궁 축과 충돌 전재호 교수는 “4·19 이후 이승만 동상을 끌어내리는 것은 아무 문제제기 없이 정당화됐는데도 박정희가 숨지고 20년이 지나 영등포 문래공원의 박정희 흉상을 제거하자 난리법석이 벌어진 건 박정희 정권 당시 권력이 아직도 기득권력을 장악하고 있기 때문”이라며 “18년이라는 초장기 집권 탓에 박정희가 문화유적에 남겨놓은 흔적도 그만큼 많은데, 이를 하나씩 하나씩 바로잡아 나가려는 움직임이 있어서 그나마 다행”이라고 말했다. 박정희가 만든 역사도 역사고, 문화재 또한 문화재가 아니냐는 주장도 존재한다. 그러나 강임산 국장은 “애초 누울 자리를 보고 발을 뻗은 게 아니기 때문에 원래대로 돌려놓는 건 당연하다. 다만 광화문 현판도 역사의 한 기록인만큼 떼어내서 따로 잘 보관한 뒤 많은 사람들이 보고 그 뜻을 나름대로 헤아리게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강 국장은 “자신의 취약한 정통성을 가리려고 역사적 인물과 유적을 상징조작에 가장 많이 동원한 사람이 박정희이기 때문에 문화재 바닥에선 도저히 그를 피해갈 수 없다”며 “그가 남긴 것들도 적절히 재평가한 뒤 이를 활용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개발할 필요가 있다”고 덧붙였다. 박정희의 역사와 박정희의 유산은 이제 제자리를 찾아주고 제대로 감상할 수 있게 해야 할 때라는 얘기다. <한겨레> 온라인뉴스부 안영춘 기자 jon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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