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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기록도 판결문도 없이…제주의 수많은 삶 망가뜨린 ‘엉터리 재판’

등록 2018-04-21 10:58수정 2018-04-21 11:20

[토요판] 4·3 수형인들의 마지막 재판
② 불법구금과 고문, 재판 같지 않던 재판
지난 3월19일 제주 4·3 재심 청구 사건의 2회 심문기일에 출석하기 위해 제주지법을 찾은 변호인과 수형인들. 임재성(맨 왼쪽)·김세은 변호사와 옆에 이날 당사자 진술을 한 부원휴·오희춘씨가 서 있다. 김평국(왼쪽)·현창용씨도 휠체어를 타고 나와 증인석에 섰다.
지난 3월19일 제주 4·3 재심 청구 사건의 2회 심문기일에 출석하기 위해 제주지법을 찾은 변호인과 수형인들. 임재성(맨 왼쪽)·김세은 변호사와 옆에 이날 당사자 진술을 한 부원휴·오희춘씨가 서 있다. 김평국(왼쪽)·현창용씨도 휠체어를 타고 나와 증인석에 섰다.

모든 국민은 법관에 의해 법률에 따른 재판을 받을 권리가 있다고 헌법은 말한다. 대한민국의 첫 헌법이 제정된 1948년 7월17일부터 지금까지 이 조항은 헌법에 존재한다. 헌법재판소는 여러 결정문에서 이 조항이 ‘공정한 재판을 받을 권리’를 포함하며, ‘공정한 재판이란 법률이 정한, 자격이 있고 독립하여 심판하는 법관으로부터 양심에 따라 적법절차에 의해 이루어지는 재판’이라고 해석했다.

하지만 이 헌법적 기본권은 태어난 지 반년도 되지 않아 제주에서 뿌리째 흔들렸다. 군과 경찰은 1948년 4월3일 제주에서 무장봉기가 일어나자 ‘매국 극렬분자’를 소탕한다는 명목으로 그해 겨울부터 민간인까지 대량 학살할 계획을 세우고 실행했다. 이 기간 동안 유일한 기록인 수형인 명부를 보면 1948년 12월과 1949년 7월에 열린 군사재판(고등군법회의)에서 384명에게 사형, 305명에게 무기징역, 97명에게 징역 20년, 570명에게 징역 15년, 706명에게 징역 7년, 235명에게 징역 5년, 29명에게 징역 3년, 202명에게 징역 1년이 선고됐다. 형량이 확인되지 않은 2명 등 모두 2530명이 공정한 재판을 받지 못하고 죽거나 수형소에 갇혔는데 판결문을 포함해 재판 기록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다.

유일하게 남은 증거인 제주 4·3 수형인들은 한목소리로 ‘재판 같지도 않은 재판’을 증언했다. 법적 지식과 양심에 따라 독립된 재판을 할 수 있는 판사, 수사에서 얻은 증거를 바탕으로 기소한 검사, 피고인의 이익을 위해 검사와 싸우고 판사를 설득할 변호사, 내 편이 되어줄 가족과 지인들, 재판을 감시할 언론 중 어느 하나도 그날 이들에게는 허락되지 않았다.

“자식들에게도 숨겼다”

제주 4·3 수형인들의 재심 청구를 심리하는 제주지법 형사2부(재판장 제갈창)는 5번의 심문기일 중 4번에 걸쳐 18명의 재심 청구인들의 말을 모두 듣기로 했다. 3월19일 열린 두번째 심문기일에서 김평국(88)씨가 18명 중 가장 처음으로 법정에 섰다. 70년 전인 1948년, 재판 같지도 않은 재판을 받고 징역 1년을 선고받았던 18살 소녀는 88살 할머니가 되어서야 ‘공정한 재판’을 받을 기회를 얻었다.

“제주시 아라리(현 아라동)가 위험하다고 해서 남문통으로 피난을 갔다가 언제 체포되셨죠?”(임재성 변호사)

“정복 입고 총 가진 경찰들이 들이닥쳐서 중산간(해변과 산의 중간지대로 무장대와 접촉한다는 오해를 받아 피해가 유독 컸던 지역)에서, 표준어로는 시골, 촌에서 온 사람 다 나오라고 해서 나갔죠. 어머니랑 나보다 다섯, 여덟 어린 동생이 같이 차에 탔습니다.”(김평국씨)

“경찰이 뭐라고 물어봤나요?”

“시골에서 누가 와서 무슨 소리를 하더냐고 하는데 모르겠다고 하면 한 대 때리고, 조금 쉬었다 또 물어봐서 모르겠다고 하면 큰 매로 때리고. 매로 개 때려잡는 것처럼 말로 할 수 없이 맞았습니다.”

“경찰서에는 얼마나 있었나요?”

“매는 사흘 맞고 유치장에 열흘 살았나. 그러다 나가라고 해서 졸졸 따라가니 좀 넓은 데 들어가서 재판실이래요, 거기가. 군인 세명이 좀 높은 석에 왔다 갔다 하면서 서 있더라고요. 현수막이 걸려 있었어요. 제77조 내란죄. 그거 하나는 기억에 있어요. 재판이라는 걸 받는데, 죄인 누구누구 불러다가 호명하거나 무슨 죄냐고 물어본 것도 없고 오늘이 무슨 날이라고 하는 것도 없고. 거기 써 붙인 것만 보고 내란죄라는 죄로 벌을 받고 있구나 하는데 다 끝났다고 다 가라고. 그게 뭔지 모르겠습니다. 그게 재판이라는 건지 뭔지. 뭔 죄를 지어서 몇 년을 받았는가 모르고 나가라니까 그냥 나갔습니다.”

“유치장에서 보름 살다가 어디로 가셨죠?”

“운동장 마당으로 나오라고 해서 여자는 여자대로, 남자는 남자대로 줄줄이 앉으라고 하더니 포승줄을 가져와서 왼쪽 손목을 다섯명씩 쫙 묶어요. 이거 묶어 뭐하냐고 하니 배에 실을 거라고 합디다. 배를 타고 내려보니 목폰데 기차를 타고 전주 형무소에 왔다고 하대요.”

“형량은 언제 들었어요?”

“징역을 살아도 몇 년인지 모르고 사는 갑갑한 일도 있냐고 간수한테 그랬더니 1년이라고 말해줬습니다.”

평소에 말을 잘하던 오희춘(85)씨는 증인석에 앉자 거꾸로 긴장하기 시작했다. 변호사의 질문을 잘 알아듣지 못하거나, 제주도 사투리만으로 대답해 재판부가 통역의 도움을 얻기도 했다. 재판부는 당사자 진술을 시작하기 전 “재판해보니 제주 팔순 할머니가 증언하는데 솔직히 거의 못 알아들어서 제주도에 오래 사신 분께 통역을 부탁드린다”고 말했다.

“1947년께 선생님과 친구는 오희진이라는 사람이 육지에 가서 물질(해녀)하게 해주겠다며 종이에 이름을 적으라고 했었죠?”(김세은 변호사)

“네. 지장까지 찍어서 육지 갈 희망만 가졌는데 그게 나중에 남로당(남조선노동당) 가입자가 돼서 충격을 많이 받았지.”(오씨)

“1948년 10월에 단장이라는 사람이 하효리사무소로 데려갔죠?”

“네. 가보니까 해녀들이 아니고 다 남자라서 잘못됐다는 걸 그때야 깨달았습니다.”

“남로당 가입서라는 걸 모르고 해녀 모집서로 알고 찍었는데 탈이 났다는 거죠?”(재판장)

“열여섯살에 어머니 품에만 살면서 촌에서 밭하고 집밖에 모르고 살았는데 남로당이 뭔지….”

“그리고 경찰서로 가셨죠?”(김 변호사)

“서귀포 경찰서에 갔는데 오희진씨가 다 자기 때문에 잡혀 왔다고 설명해서 따귀 한번 안 맞았어요. 2주 정도 있다가 관덕정 근처로 옮겨와 한 열흘 살았는가. 공판을 받았죠.”

“재판을 어디에서 받았는지 기억나세요?”

“장소가 관덕정 마당인가…. 교실 강당 같은 데 갔는데 군인이 서이쯤 앉아 있었어요. 이름만 호명하고 형은 안 매겼어요.”

“징역 1년은 언제 들었어요?”

“전주 형무소에 간 다음에 차에서 내려놓으면서 누구누구 1년 그렇게 말했어요. 형무소에서는 죽지 않고 살았구나 희망만 가지고 살았지요.”

“오희진씨도 같이 재판받았습니까?”(재판장)

“그 사람은 서귀포에서 총살 맞았지….”

1930년생 김씨와 1933년생 오씨가 1948년 12월 겪은 일은 비슷하다. 두 사람은 영장 없이 경찰에 끌려가 불법구금을 당했고, 재판의 외형조차 갖추지 못한 재판으로 형무소에 1년 동안 수감됐다. 재판에 대한 증언은 판결문이 없는 제주 4·3 수형인들에게 유일한 재판 기록이나 다름없다. 불법 체포·구금과 고문처럼 검사나 사법경찰관의 직무에 관한 죄를 저질렀다면 재심 사유가 된다. 다만 김씨는 고문을 증언하는 반면 오씨는 맞지 않았다고 진술했다. 재판부는 이날 “어떤 경우도 고문 등의 가혹 행위는 정당화될 수 없다. 다만 고문 없이 구금만 문제 삼는 청구인들은, 당시에 필요했던 일종의 선별작업이 지연됐다면 직무에 관한 죄인지 약간 의문점이 있다”고 지적했다.

“총 든 경찰들이 들이닥쳐선
중산간 사람들 다 나오라고…
사흘 매 맞고 군인 세명이 재판
형무소 가서야 징역 1년이라고”

“징역 5년 받고 형무소에서 6·25
북한군에 끌려갔다 유격대 남파
전향서? 쓰라니까 썼지…
살아있는 동안 명예회복 하고파”

감옥살이로도 억울했던 두 사람은 여자라는 이유로 더 많은 상처를 받아야 했다.

“대통령 생일인가 나라에 경사가 있어서 열달 만에 석방됐는데 징역살이 맛을 배 탈 때 느끼고 울었어요. 석방증을 내야 배를 타는데, 그걸 내밀려니 예쁜 아가씨가 얼마나 창피한지…. 집에 와서 친척분이 나댕기지 말라고 해서 진짜 울 안에서만 살았습니다. 그런 게 싫어서 대전에서 결혼했지요.”(김씨)

“감옥에 있던 게 창피해서 몰래 집에 왔더니 아버지, 어머니가 죽은 딸이 돌아왔다고 부둥켜안고 울었습니다. 하지만 가족 누구한테도 수감생활에 대해서는 일체 말을 안 해서 친자식들도 재판하기 전에는 감옥생활 했던 걸 몰랐습니다. 죄 없이, 억울함을 일생 품어 살았으니 법에 따라 판사님이 판단해주세요. 부탁합니다.”

오씨가 마지막 말을 마치고 마음이 풀어진 듯 편하게 웃자 재판장도 “수고 많으셨다”며 웃었다.

불법 체포·구금, 고문 등 가혹 행위, 판결문과 기록 없는 허술한 재판은 모든 4·3 수형인의 공통점이다. 여기다 한국전쟁이 겹치면서 국군이 된 부원휴(79)씨와 북한군에 끌려간 된 현창용(86)씨의 엇갈린 삶은 켜켜이 쌓인 한국 현대사의 비극을 그대로 보여줬다.

1929년생인 부씨는 제주 농업중학교에 다니던 1948년 12월 군인에게 끌려갔다. 몸이 아파 집에 요양하던 둘째 형이 이유 없이 총살당한 것이 불과 2~3개월 전이었다. 군대 막사에서 전기고문 당하고 얻어맞다 기절하면 물을 뿌리는 고문 속에서 그들은 “삐라를 뿌렸느냐” “산에 협조했냐”고 추궁했다. 막사에서 2주 있다 군인 세 사람이 있는 ‘법원’에서 “내란죄 77조에 해당된다”는 말만 듣고 돌아온 부씨는 4~5일 뒤 인천 소년 형무소로 보내졌다. “사복 입은 인솔자가 호명하면서 누구는 20년, 10년, 5년 그랬습니다. 저한테는 징역 1년 해서 아이고 살았다, 뒤지지는 않는구나 했었죠.” 억울한 옥살이라도 죽는 것보다 기뻤던 시대였다. 부씨는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1950년 8월에 13연대에 입대해서 덕유산 그런 데서 공비 토벌도 하다가 3년6개월 일하고 몸이 안 좋아져서 제대했습니다”라고 말했다.

1932년생 현창용(86)씨도 1948년 9월 서북청년단과 경찰이 갑자기 집으로 찾아와 영문도 모른 채 학교로 끌려갔다. “폭도와 연락했느냐, 삐라를 뿌렸냐, 무허가 집회를 했느냐고 경찰이 심문하기에 그런 사실이 없다고 사실대로 얘기했습니다. 그때부터 고문을 시작한 겁니다. 넓은 가죽대(벨트) 2개를 가지고 양쪽에 한 사람씩 두 사람이 서서 옷을 벗겨놓고 번갈아 치는 겁니다. 등이 새까맣게 물들었습니다. 죽는 건가 보다고 속으로 생각했습니다. 그 뒷날은 물 주전자에 소나 돼지가 먹는 물을 갖다가 코로 부었습니다. 그 다음날은 또 바른대로 이야기하지 않으면 죽여버린다고 구식 소총을 가지고 공포를 세방 쐈습니다. 그리고 숙소로 돌아왔는데 밥해주는 아주머니가 거기서 예 한마디만 하면 다 집으로 돌아가는데 너도 예 한마디만 하라고 해서, 뒷날에 가서 물으니 예 하고 대답했습니다. 대답하니 백지에다 지장을 찍으랍니다. 그렇게 고문이 끝났습니다.”

현씨도 세 명이 앉아 있는 장소에서 ‘재판’을 받았다고 했다. 변호사로 보이는 사람이 “관대한 처벌을 바란다”고 말했다. 징역 5년을 들은 건 제주도에서 목포를 거쳐 인천 형무소에 도착한 다음이었다. 춥고 씻지 못하는 고통보다 더 큰 고통은 배고픔이었다. 그런데 1950년 6월25일 전쟁이 일어났고 북한군은 6월28일 서울을 점령했다. 인천 형무소를 함락한 북한군은 현씨를 평양으로 데려갔다. “15일인가 20일 동안인가 제식 교육을 받았습니다. 집에 가고 싶다고 생각할 시간도 없었습니다.” 현씨는 북한 유격대원이 되어 남쪽으로 돌아왔고 1951년 체포돼 1954년 무기징역형을 확정받았다.

출소 1년 전인 1973년 현씨는 전향문을 작성했다.

“전향문은 직접 작성하셨어요?”(김 변호사)

“아니 아니… 거기서 쓰라고 해가지고.”(현씨)

“어떻게 쓰라고 말하던가요?”

“대충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참… 오래돼서 잘 모르겠습니다. 허허….”

“전향문에는 좌익사상자로 지목받게 된 동기로 ‘고향에서 해방 이후 좌익사상에 휩쓸릴 때 동네 청년으로부터 좌익 선전을 받고 참가했다’고 적혀 있어요. 인천 형무소 가기 전에 좌익 운동에 참여한 적이 있으세요?”

“없습니다. 그때는 좌익이고 우익이고 그런 거 모르고….”

“실제로 하지도 않았는데 왜 적으셨어요?”

“허허….” 현씨는 허탈한 웃음만 지었다.

“한국전쟁 때 스스로 월북해서 북한군이 됐나요?”

“그런 거 없습니다.”

“너무나 억울합니다”

제주 4·3도, 한국전쟁도 부씨와 현씨가 원했던 건 아니었지만 두 사건은 두 사람의 삶을 휘저어놓았다. 하지만 국군이 됐든 북한 유격대가 됐든 두 사람이 원하는 건 같았다.

“억울한 누명에 평생 한이 서렸습니다. 제가 나쁜 짓을 한 게 아닌데 누명을 써서 너무나 억울합니다. 존경하는 판사님께서 어떻게 선처를 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부씨)

“인생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이 재판으로 명예가 회복되는 걸 살아 있는 동안 꼭 봤으면 좋겠습니다.”(현씨)

제주/글·사진 김민경 기자 salma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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