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서초동 대검찰청에서 검찰 깃발이 태양 아래 펄럭이고 있다. 김태형 기자 xogud555@hani.co.kr
수백억원대 자금으로 사채업을 하던 민아무개(55)씨는 2012년 4월 이자소득세(회계연도 기준 2006∼2009년) 24억원을 탈루했다며 국세청으로부터 고발당했다. 두 차례에 걸쳐 이 사건을 조사한 검찰은 민씨를 기소하지 않았다. 2009년부터 2016년까지 두 차례에 걸쳐 6년여 동안 해외에 머물렀는데, 이 기간 조사 한번 받지 않은 상태에서 공소시효 5년(2015년5월)이 훌쩍 지나버렸다고 본 것이다. 그가 2016년 3월 밀입항을 하다 해경에 적발됐을 땐 이미 탈세 혐의 공소시효가 지난 상태였던 셈이다. 당시 조사과정에서 국내 체류 기간을 늘리려고 거짓 진술을 하다 들통나 얼굴을 붉혔던 민씨만 머쓱해진 상황이 돼 버렸다. 불기소 사유도 석연치 않지만, 검찰이 이 사건 공소시효를 고무줄처럼 수차례 변경해 온 것으로 확인돼 논란이 예상된다.
해외에 몰래 나간 조세범에 검찰 “범죄 의식 없다” 결론
서울중앙지검 형사4부(부장 한석리)는 민씨의 조세범처벌법 위반 혐의가 검찰에서 ‘공소권 없음’으로 처분(2016년 11월)된 사건을 재수사해 달라고 지난해 8월 접수된 진정사건을 9개월여만인 지난달 29일 공람 종결했다고 7일 밝혔다. 그러면서 “이 사건 공소시효를 기존 2016년 7월20일에서 2015년 5월31일로 정정한다”고 덧붙였다. 민씨는 2009년 5월부터 2011년 7월까지(1차 출국) 이어 2011년 10월부터 2016년 3월까지(2차 출국) 해외에 체류했는데, 앞선 수사에서 공소시효에 포함하지 않았던 1차 출국까지도 공소시효에 포함해 그만큼 만기 시기를 앞당긴 결과다.
검찰 관계자는 “출국 당시 해당 사건으로 처벌받을 가능성을 인식했다고 보기 어려울 경우 처벌을 면할 목적으로 국외에 있었다고 볼 수 없다는 것이 대법원 판례”라고 설명했다. 조세벌처벌법은 친고죄로 국세청의 고발이 있어야 처벌이 가능한데, 민씨의 1, 2차 출국이 모두 국세청 고발(2012년 4월) 이전에 이뤄져 그 기간 공소시효를 정지할 수 없다는 설명이다. 다만, 2011년 8월 국세청이 세무조사에 착수했으며 2013년 1월 검찰 조사과정에서 민씨의 변호인이 선임된 사실이 있지만, 검찰은 이에 대해서도 “두 경우 모두 민씨가 조사 사실을 알았다는 사실을 입증할 증거가 없다”고 설명했다.
위 형사사건에서 검사는 1차 출국의 경우 처벌을 면할 목적이 인정된다고 판단하여 2016. 7. 20. 경으로 공소시효를 연장하였으나, 위에서 살핀 바와 같이 1차 출국 당시에도 피진정인에게 위 조세범처벌법위반 사건으로 인한 처벌을 면할 목적으로 국외 도피하였음을 인정하기 어렵기에 1차 출국 기간에 대한 공소시효 정지는 부당하므로 위 형사사건의 공소시효를 2015. 5. 31.로 정정한다.(2018년 5월29일 진정내사 사건 처분결과 중 일부분)
공소시효 15년→16년→20년→16년→15년 네 차례 변경돼
검찰은 민씨 조세 사건 공소시효를 이뿐 아니라 모두 네 차례 변경한다. 검찰이 기본적인 공소시효 계산을 잘못했다고 스스로 인정한 셈이다. 국세청 고발 때 2015년 5월(①)에서, 2013년 1월 민씨 소재파악이 되지 않자 1차 출국 기간을 제외해 2016년 7월(②)로 변경한 뒤, 2016년 5월 민씨가 밀항으로 해경에 구속되자 2차 출국 기간도 제외해 2020년 11월(③)로 바꿨다가, 2016년 8월 민씨 밀항 사건에 대해 1심 법원이 “밀항 의도가 명백히 입증 안 됐다”고 언급하자 또다시 2016년 7월(④)로 변경하며 불기소 처분했고 이번 재조사로 다시 2015년 5월(⑤)로 다시금 변경했다. 문제는 공소시효가 늘었다 줄었다 하면서 수사 기회는 날아갔고, 24억원이라는 거액의 세금을 가로챈 탈세범은 그사이 조사 한번 없이 자유의 몸이 됐다는 사실이다.
‘범인이 형사처분을 면할 목적으로 국외에 있는 경우 그 기간 동안 공소시효는 정지된다’(형사소송법 253조 3항)
처벌 면할 목적이 아닌데 왜 위험 감수하며 몰래 입·출국했나?
민씨의 불기소 처분을 단순한 검찰의 단순 착오나 ‘운 좋음’으로 넘기기에는 의심스러운 않은 대목들이 많다. 2011년 10월 2차 출국 당시 민씨는 자기 운전기사의 여권을 불법으로 위조해 수사기관에 적발될 위험까지 감수해 가며 해외로 빠져나간다. 또 2016년 3월 중국 닝보항에서 경남 거제 고현항까지 몰래 밀입항을 할 때는 바지선 9일간 물탱크 격벽 통로에 숨어 준비한 생수만 마시며 버티기까지 했다. 특히, 민씨는 밀항 건으로 부산지검에서 조사를 받으면서 2차 출국 시기를 조세 사건 공소시효(2015년 5월)를 조금 지난 시기인 “2015년 8월”이라고 주장했지만, 이후 여권 위조 사실이 드러나면서 거짓말인 것이 들통나기도 했다.
문 : 피의자의 주장에 의하면 피의자는 2011 7. 경에 국내로 추방된 후 2015. 8 초에 중국에 밀항을 할 때까지 국내에 있었다는 것인데 맞나요?
답 : 네 맞습니다.
문 : 피의자가 위 4년 동안 국내에 있었다는 것을 입증할 자료는 있나요.
답 : 없습니다.
(중략)
문 : 피의자는 위 4년 동안 휴대폰을 사용하지 않았나요.
답 : 네,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문 :4년 동안 휴대폰도 없이 생활하였다는 것이 말이 된다고 생각하나요.
답 : 정말입니다. (2016년 4월 부산지검 진술조서 중 일부분)
민 씨 “거지 같이 살며 5천만원 빌려 밀항했다”면서 거액 들여 검사장 출신 변호사 선임
민씨는 또 여권위조를 해 가면서까지 밀출국한 이유에 대해서도 “채권자들에게 발각될 것이 두려워 더 이상은 한국에 있을 수 없고, 채권자들에게 탄로가 날 우려도 있고 해서 밀출국을 하게 됐다”고 말했다. 또 한국으로의 밀입국 비용 5천만원도 “중국에 있는 ‘김상호’에게 빌렸다”고 하는 등 자신이 궁핍한 사정이었음을 호소했다. 조사과정에서 그는 출국 후 줄곧 중국에 머물렀고 “정말 거지 같이 살았다”고도 말했다.
하지만 이후 검찰이 제시한 통신 내역 등의 물증 앞에 인도네시아에서 한 현지 법인의 도움을 받아 체류했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사실 “밀항 비용까지 빌려야 했다”던 민씨는 부산지검에서 진술할 당시 퇴직한 지 두 달밖에 안 된 검사장 출신 전관 변호사를 선임한 상태였다. 이후 지난해 서울중앙지검 조세 사건 조사과정에서도 역시 전관 변호사를 선임했다. 돈을 빌렸다는 ‘김상호’에 대해선 “연락처도 기억나지 않고, 찾을 수도 없을 것”이라는 등 납득하기 어려운 답변을 늘어놓지만 당시 부산지검은 더 추궁하지 않았다. 그가 왜 밀항을 감행했는지 계속 의문이 남는 대목이다. 이번 조세 사건 재조사 과정에서 민씨는 ‘(공소시효가 약간 지난) 2015년 10월께 처남으로부터 조세 사건 수사를 받고 있다는 사실을 들어 알게 됐다’는 취지로 진술했고, 역시 받아들여졌다.
문 : 김상호(밀입국 비용 5천만원을 빌려준 이)는 현재 어디에 있나요.
답 : 중국 북경에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문 : 김상호의 연락처는 모르나요.
답 : 네, 정말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문 : 수소문을 하면 알 수 있는 것이 아닌가요.
답 : 못 찾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중략)
문 : 500만원을 가지고 중국에서 생활하기가 힘들었을 것 같은데, 피의자가 중국에서 생활비를 어떻게 조달했나요?
답 : 나름대로 중국에서 일도 하고 해서 조달했습니다.
(중략)
문 : 그래도 피의자가 가진 500만원과 일을 해서 번 돈으로 생활했다는 진술이 믿기가 어려운데 어떤가요?
답 : 사실입니다. 정말 거지 같이 살았습니다.(2016년 4월 부산지검 진술조서 중 일부분)
해경·경찰 “민씨, 공소시효 도과 목적으로 밀출입국 명백”
검찰 외에 민씨 사건을 조사한 해경과 경찰이 모두 2차 출국을 ‘공소시효 도과 목적’이라고 판단하고 있다. 지난해 3월18일 남해해경청이 작성한 수사기록은 이렇다. “2015년 7월20일이 공소시효 만료 예정임. 피의자는 조세범 처벌법 위반 혐의로 기소될 경우 중한 처벌형이 예상되자 공소시효 도과 시점까지 해외 밀출국을 감행한 것으로, 밀출국 사실을 자백할 경우 공소시효가 연장될 것을 우려, 밀출국과 관련된 일체의 진술을 거부하며 묵비권으로 일관하고 있는 것으로 추단됨.”
당시 남해해경청 관계자는 “민씨가 계속 한국에 있었던 것으로 꾸미려 했던 정황을 포착해 이런 사실도 조서에 남겼다”고 말했다. 또 조세 사건을 맡았던 서울 수서서 관계자도 “기소가 가능하다고 봐서 검찰에 기소의견 송치했다”고 했다.
검찰 안팎에선 이런 사건 처리를 두고 이견이 나온다. 검찰 한 관계자는 “사건 기록 첫 장에 적어서 가장 중요하게 챙기는 게 공소시효”라면서 “공소시효가 왔다 갔다 하면서 수사가 적절하게 이뤄지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부장검사 출신 한 변호사도 “검찰이 그간 각종 범죄에서 공소시효를 최대한 늘리려고 했던 것과 비교할 때 이번 사건에서 수사 의지가 약한 것 아니냐는 비판을 받을 만 한 것 같다. 적극적으로 보고 재판에 넘겨봤어야 하는 거 아닌가 생각된다”고 지적했다.
현재 이 사건 진정인은 서울고검에 진정에 대한 항고 절차를 준비하고 있다.
김양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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