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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원세훈 재판, 청와대 각본·대법원 연출 법정드라마?

등록 2018-06-10 10:02수정 2018-06-10 11:39

[토요판] 뉴스분석 왜?
‘원세훈 재판 거래’ 의혹의 재구성

국정원 댓글공작 대선개입 사건
박근혜 정부의 ‘아킬레스건’
법원행정처 재판과정 지속 관찰

‘김영한 일지’ 1심 결과 유출 정황
2심 유죄 뒤 우병우 ‘전합 희망’
대법원 전합 13:0으로 파기환송
20일 뒤 양승태, 박근혜와 독대

파기환송심, 고의로 시간 끌기
행정처, 재판장과 심리내용 통화
결국 정권 교체 뒤 확정판결
양승태 대법원장 시절 법원행정처 소속 판사들이 사용하던 저장매체에서 나온 문건들로 사법행정권 남용 논란이 일고 있다.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숙원사업인 상고법원 입법 추진을 위해 주요 사건 재판을 박근혜 정부와 거래했다는 의혹, 판사 성향을 분류해 뒷조사를 한 의혹 등이 제기되고 있다. 대표적인 의혹 사건인 원세훈 전 국정원장 선거법 위반 사건을 당시 실제 재판 진행상황, 검찰 관계자 증언, 법원행정처 문건 등을 토대로 재구성해보았다.

양승태 대법원장이 지난해 9월22일 서울 서초구 대법원에서 열린 퇴임식에 참석하고 있다. 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양승태 대법원장이 지난해 9월22일 서울 서초구 대법원에서 열린 퇴임식에 참석하고 있다. 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박근혜·최순실 특검부터 이명박 정부 수사까지 검찰의 ‘직권남용 권리행사 방해죄’ 처리 기준을 보세요. 최근 불법 사찰 공작팀을 운영한 혐의로 이종명 전 국가정보원 3차장 구속영장이 청구됐는데, 피의자 이종명이란 이름을 ‘그 분들’로 갈아끼워도 무리가 없어보일 정도던데요. 이 상황에서 무슨 재주로 수사받지 않고 넘어 가겠습니까.”

법조인 출신으로 과거 정부에서 장관급 정무직 공무원을 지낸 ㄱ 변호사가 양승태 전 대법원장의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을 두고 내놓은 관전평이다. 여기서 ‘그 분들’이란 후배 판사들을 시켜 재판 독립성 훼손으로 이어질 수 있는 부적절한 정보를 수집해 보고하도록 만든 법원행정처 고위직 판사들을 가리킨다. 그들의 행태가 부하들에게 불법 사찰을 시킨 국정원 간부들과 빼닮았다는 것이다. ㄱ 변호사는 “형평성 차원에서라도 대법원이 자체 조사만 하고 넘어갈 사안은 결코 아니다. 더욱이 대법원이라면”이라고 말했다.

이번 사건의 본질은, 양승태 대법원이 청와대로부터 상고법원이라는 열매를 따내고자 사법행정권을 남용해 박근혜 정부가 관심 갖고 있던 주요 사건의 재판에 영향력을 행사했는지, 재판 정보가 사전에 재판부 외부로 유출됐는지로 요약된다.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 관련 특별조사단’(이하 조사단)은 조사보고서를 통해 “일부 흔적은 있지만 재판 개입은 없었다”고 밝혔다. 전국 법원장들 역시 지난 7일 “재판 거래 의혹 제기는 근거가 없다”는 입장을 냈다.

과연 그럴까. 조사보고서에서 거론된 ‘원세훈 전 국정원장의 공직선거법 위반 사건’(이른바 ‘국정원 댓글공작 대선개입 사건’. 이하 ‘국정원 사건’)을 표본으로 실제 수사·재판 진행과정에서 제기됐던 의혹들을 법원행정처가 생산한 문건과 비교해 재구성해보았다. 법원행정처가 국정원 사건과 관련해 작성한 문건은 검찰 기소 이후 2014년 1월부터 2016년 7월까지 총 12건에 이른다. 2013년으로 거슬러 올라가보자.

2013년 6월14일 원세훈 기소

박근혜 전 대통령은 2012년 말 대선 과정에서 불거진 국정원 사건 탓에 큰 정치적 부담을 안고 취임했다. 국정원 직원들이 박근혜 후보에게 유리하게 댓글을 달아 당선을 도왔다는 의혹은 그의 아킬레스건이었다. 청와대에서 원 전 원장의 공직선거법(이하 선거법) 유·무죄 여부에 신경을 곤두세운 이유다. 2013년 수사 당시 채동욱 검찰총장은 사석에서 “정권의 레지티머시(정당성)와 직결되는 문제”라고 말하기도 했다. 청와대는 법무부를 통해 ‘원 전 원장의 선거법 위반 혐의 적용 불가’ 입장을 전달하며 검찰 특별수사팀을 압박했다. 채 전 총장은 “흑을 백으로 바꿀 수는 없다”(당시 수사팀 관계자 전언)며 선거법 위반 혐의를 적용해 원 전 원장을 불구속기소했다. 2013년 6월14일의 일이다.

이 날을 기점으로 청와대의 핵심 관리 대상은 검찰에서 법원으로 이동한다. 이제 관건은 판결문에 ‘선거법 무죄’라는 글씨를 새기는 일이었다. 이 날은 법원 태도가 바뀐 시점이기도 하다. 국정원 수사 당시 법원은 수사팀이 청구한 계좌, 통신기록, 압수수색 영장을 거의 다 발부해줘 수사에 협조적 기류가 강했다. 그런데 선거법 유·무죄 판단의 열쇠를 쥐게 되자 머릿 속이 복잡해졌다. 거래의 측면에서 보면, ‘국정원 사건 카드’를 손에 쥔 양승태 대법원이 ‘상고법원 카드’를 들고 있던 청와대와 대등하게 협상테이블에 앉게 된 분기점이기도 하다.

원세훈 전 국정원장이 지난해 9월26일 오후 검찰 조사를 받기 위해 서울 서초동 서울중앙지검으로 소환돼 호송차에서 내리고 있다. 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원세훈 전 국정원장이 지난해 9월26일 오후 검찰 조사를 받기 위해 서울 서초동 서울중앙지검으로 소환돼 호송차에서 내리고 있다. 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2014년 9월11일 원세훈 1심 무죄

검찰 특별수사팀과 원 전 원장 변호인의 1심 법정 공방은 1년3개월가량 치열하게 전개됐다. 이 사이 역린을 건드린 채동욱 검찰총장과 윤석열 특별수사팀장은 각각 혼외아들 의혹과 검찰 지휘부와의 마찰 문제로 국정원 사건에서 배제됐다. 당시 검찰 고위 관계자는 “국정원 쪽이 여러 차례 ‘윤 팀장이 재판에 들어오지 못하게 해달라’는 요청을 청와대에 전달한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1심 사건을 맡은 서울중앙지법 형사21부(재판장 이범균)는 2014년 9월11일 “법관의 양심에 따라 공정한 결론을 내도록 최선을 다했다”며 원 전 원장의 선거법 위반 혐의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다. 선거 때 특정 후보를 지지하는 댓글을 달더라도 선거에 개입할 ‘의도’만 없었다면 선거법이 위반이 아니라는 논리였다.

법원행정처가 1심 과정에서 만든 문건은 총 4건이다. 법원행정처가 이처럼 특정 사건을 지속 관찰하는 경우는 이례적인 일이다. 1심 선고를 2주일 가량 앞두고 생산된 ‘원세훈 사건 개요’란 제목의 문건에는 “증거 능력 인정과 관련한 재판부 판단의 의미(재판에의 영향)”, “기재된 내용이 선거운동으로 인정될 수 있는지 여부” 등의 대목이 등장해 1심 선고 결과 파악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1심 선고 결과가 사전에 청와대에 유출된 정황은 고 김영한 전 민정수석 업무일지에 등장한다. 선고 당일 김기춘 전 청와대 비서실장의 지시 사항을 뜻하는 '장' 아래에는 원 전 원장을 뜻하는 '元-2.6y, 4유, 停3''라고 쓰여 있다. 원 전 원장은 이 메모 그대로 징역 2년6월, 집행유예 4년, 자격정지 3년이 선고됐다. 이 메모가 기록된 청와대 비서관 회의는 오전에 열렸고, 선고는 오후 4시께 결과가 나왔다. 이후 9월25일 김영한 전 민정수석의 업무일지에는 ‘원세훈 판결 세미나→법원 겁주기. 고급 협박’이라고 적혀 있다. 민정수석실이 1심 결과를 분석해 항소심 과정에서 법원에 영향을 끼치라는 지시로 추정된다.

재판부 선고 결과는 판사가 법정에서 판결문 주문을 읽기 전에는 외부에 절대 공개할 수 없다. 이를 아는 사람은 담당 판사밖에 없다. 법원행정처는 왜 사전에 1심 선고 결과 파악을 위해 분주히 움직였는지, 김 전 비서실장은 어떻게 미리 선고 결과를 알았는지 의문이 제기된다.

2015년 2월9일 원세훈 2심 유죄

1심 선고 이후 수사와 재판을 이끌던 특별수사팀은 사실상 공중분해되다시피했다. 검찰 지휘부는 특별수사팀을 이끌던 박형철 당시 부팀장을 대전고검으로, 단성한 검사는 대구지검으로, 김성훈 검사는 광주지검으로 찢어놨다. 수사팀은 서울과 지방을 오가는 어려운 여건에서 재판에 임할 수밖에 없었다. 2015년 2월9일 항소심을 맡은 서울고법 형사6부(재판장 김상환)는 1심을 뒤집고 원 전 원장의 선거법 위반 혐의를 유죄로 선고하고 법정구속했다. 재판부는 “정치적 독립성을 지켜야 할 정보기관의 불법적인 선거 개입은 민주사회 최고 주권자인 국민 위에 군림하는 행위”라고 밝혔다. 법원행정처가 분주해지기 시작했다.

법원행정처가 항소심 선고를 전후로 작성한 문건 4건에는 청와대와 법원행정처가 국정원 사건을 놓고 물밑 교감을 한 정황들이 여럿 나온다. 항소심 선고 전날인 2월8일 생산된 ‘원세훈 사건 관련 검토’, 항소심 다음날인 2월10일 생산된 ‘원세훈 판결 선고 동향’이란 제목의 문건에는 원 전 원장의 선거법 유·무죄 선고에 따른 대응 시나리오가 작성돼 있다. “유죄시에는 청와대의 불만과 오해를 최소화 해야 한다”, “사법부 진의가 곡해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항소심이 청와대의 최대 관심 현안이다”, “청와대가 선고 전 항소기각을 기대하며 법원행정처에 전망을 문의했다”, “법원행정처가 재판부 의중을 파악 중이다”는 내용들이다.

특히 이 문건 안의 ‘판결 선고 후 동향과 대응 방향’ 대목은 이후 그대로 실현돼 의혹을 증폭시키고 있다.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우병우 민정수석⇒상고심 절차를 조속히 진행하고 전원합의체에 회부해 줄 것을 희망’, ‘(상고심) 기록 접수 전이라도 법률상 오류 여부 면밀히 검토⇒공직선거법 제270조 재판 기간에 관한 강행규정(3개월) 최대한 준수해 신속 처리’.

2016년 1월4일 청와대 영빈관에서 열린 ‘2016년 신년 인사회’에서 정의화 당시 국회의장의 제의로 박근혜 전 대통령(왼쪽)과 양승태 전 대법관이 건배를 하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2016년 1월4일 청와대 영빈관에서 열린 ‘2016년 신년 인사회’에서 정의화 당시 국회의장의 제의로 박근혜 전 대통령(왼쪽)과 양승태 전 대법관이 건배를 하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2015년 4월10일 원세훈 3심 파기환송, 그리고 독대

실제 원 전 원장 사건은 ‘신속 처리’ 됐다. 2015년 2월16일 대법원 3부에 배당된 뒤 4월10일 대법원 전원합의체(주심 민일영 대법관)에 회부됐고, 7월16일 대법관 13명 전원의 일치된 의견으로 유·무죄 판단을 하지 않은 채 증거능력에 관한 법리적 판단을 문제 삼아 서울고법으로 돌려보내졌다.

대법원은 대법관 4명으로 구성된 소부가 3개 있다. 소부에서 의견이 전원일치되지 않으면 법원행정처장(대법관)을 뺀 대법관 13명이 재판하는 전원합의체로 넘어 간다. 당시 소부에서 합의가 안 돼 회부된 전합에서 소수의견이 없는 ‘13대 0’ 판결이 난 점을 두고 뒷말이 많았다. 당시 한 검찰 관계자는 “왜 전합으로 갔는지 이해하기 힘들다. 청와대, 대법원 양쪽 모두 확실한 소득은 정치적으로 민감한 사건을 놓고 시간을 번 것 아닐까”라고 말했다. 서울고법의 파기환송심과 대법원의 재상고심 선고에 걸리는 시간을 따져보면 빨라도 대법원 확정 판결 시점을 제20대 총선인 2016년 4월16일 이후로 미룰 수 있게 됐기 때문이다.

우병우 전 민정수석의 희망사항대로 대법원 전합이 국정원 사건을 파기환송한 지 불과 20일 뒤인 2015년 8월6일 양 전 대법원장은 박근혜 전 대통령을 만나 상고법원 신설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2015년7월~2017년2월 고법의 ‘뭉개기’

선거법은 1심은 기소 이후 6개월 안에, 2·3심은 각각 전심 판결 이후 3개월 안에 선고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하지만 실제로는 이 기한을 넘기는 경우가 많다. 국정원 사건은 1심에서 대법원을 거쳐 파기환송심으로 오기까지 이미 2년이 흘렀다. 당시 법조계에선 ”파기환송심은 2016년 4월 총선 전에는 선고하지 않고, 대법원 재상고심은 박근혜 정부 임기 내에 선고하지 않을 것”이란 말이 돌았다. “국정원 사건은 유죄보다 무죄를 쓰기 더 어려운 사건이에요. 그런데 대법원도 함부로 다루기는 어려울 겁니다. 만약 무죄를 쓴다면 정권이 바뀌었을 때 사법개혁의 단초가 될 거에요. 고법 판결은 대법원이 가이드라인을 주고 관리할 겁니다.”(당시 한 검찰 관계자)

이 예측은 파기환송심을 맡은 서울고법 형사7부(재판장 김시철)의 2차 공판준비기일(2015년 10월2일)부터 현실로 나타날 조짐을 보였다. 공판준비기일은 향후 공판에서 다룰 쟁점 및 절차를 간단히 정리하는 과정인데, 재판장인 김시철 부장판사(사법연수원 19기)는 공판준비기일부터 “검찰의 입증 내용이 부실하다”며 사사건건 따져물어 재판 공정성 시비를 자초했다. 재판부는 나흘 뒤인 10월6일 법정구속돼 있던 원 전 원장을 보석으로 풀어줬다.

2015년 11월1일 4차 공판준비기일에서는 김 재판장의 편파적인 재판 진행에 검찰 쪽 박형철 부팀장이 항의 뒤 퇴정하기도 했다. 김 재판장은 법정에서 <손자병법>을 인용해 국정원 댓글 공작을 “전쟁에서 이기기 위한 탄력적인 용병술”이라고 표현하기까지 했다. 김 재판장은 고의성 짙은 공판 지연으로 계속 논란을 일으켰다. 그는 2015년 파기환송심을 맡은 뒤 해를 두 번 넘겨 사건을 끌고 가다가, 선고도 하지 못 한 채 2017년 2월 서울고법 민사부로 이동했다. 대법원의 파기환송 뒤 19개월 동안 국정원 사건을 깔고 앉아 있었던 것이다.

김 재판장의 재판 지연과 편파적 재판 진행 논란과 관련해 법원행정처가 생산한 문건 일부가 눈길을 끈다. 2015년 10월 생산된 ‘원세훈 사건 환송 후 당심 심리방향’이란 제목의 3쪽짜리 문건의 마지막 부분에는 ‘재판장, 주심판사와 통화한 내용을 정리한 것입니다’란 문구가 있다. 여기서 ‘재판장’은 김시철 부장판사를 가리킨 것으로 보인다.

2018년4월 원세훈 유죄 확정

원 전 원장 선거법 위반 사건은 파기환송심 재판부가 바뀌고 문재인 정부가 들어선 뒤인 2017년 8월30일 유죄가 선고됐다. 2018년 4월19일 대법원이 이를 그대로 확정해, 검찰이 사건을 재판에 넘긴 지 4년10개월 만에 유죄가 확정됐다. 김정필 기자 fermat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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