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일 오전 경기 파주시 보광사 경내에서 전향장기수, 남파공작원의 묘비에 곡괭이질을 하는 북파공작원단체 회원을 경찰이 제지하고 있다. 파주/이종찬기자 rhee@hani.co.kr.
“애국열사라 찬양한 묘비 불쾌” 해머들고 올라가 산산조각 내
일부 묘 유골함 그대로 드러나
5일 오전 10시30분께 영하 5℃의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100여명의 사람들이 경기 파주시 광탄면 보광사 앞에 조성된 비전향장기수 묘역 연화공원에 모여들었다. 최근 몇몇 보수단체와 일부 보수언론에서 ‘남파간첩과 빨치산을 애국열사로 찬양한다’며 문제삼은 비전향장기수 묘역 철거를 주장하는 보수단체 회원과 지역 주민들이다. 애초 이들은 오전 11시께 보광사 쪽에 자진철거 권유서를 전달한 뒤 협상에 들어갈 참이었다.
10시35분께 묘역 앞에 승합차 한 대가 멈춰서고 해머와 스프레이·페인트를 손에 든 보수단체 회원들이 뛰쳐나오면서 상황은 급변했다. 이들은 곧 묘역으로 올라가 해머로 묘비를 내려치기 시작했다. 류락진(2005년 4월 별세), 정순덕(2004년 4월 별세), 최남규(1999년 12월 별세), 금재성(1998년 별세), 정대철(1990년 11월 별세), 손윤규(1976년 4월 별세). 비전향장기수 6명의 묘비가 불과 5분여 만에 산산조각 났다. 영화배우 문근영의 외조부라서 화제가 된 류락진씨의 묘비는 흰색 유골함이 그대로 드러났다. 수십년 동안 함께 옥살이를 한 장기수 ‘동지’들이 새긴 비문에는 붉은색 페인트가 칠해졌다. 10여년 전에 세상을 떠난 한 승려를 추모하기 위해 세워진 추모비도 비전향장기수의 묘라는 ‘오해’를 받아 수모를 당했다. 보광사의 한 승려가 황급히 말리는 덕분에 이 추모비는 붉은 페인트칠을 당하는 피해를 입는 데 머물렀다.
묘비 부수기를 마친 보수단체 회원들은 묘역 곳곳에 펼침막을 걸었다. ‘간첩·빨치산이 의사·열사가 웬말이냐’, ‘남파공작원은 영웅이고 북파공작원은 역적이냐’ 등의 글귀가 적혀 있었다. 쓰러진 묘비 조각을 발로 밟고 돌에 새겨진 비문을 읽으며 비웃는 모습도 눈에 띄었다.
북파공작특수임무국가유공자파주본부 회장 최승영(50)씨는 “아직까지 북파공작원의 30% 정도만 국가유공자로 인정을 받았고 보상문제도 더디게 진행되고 있다”며 “북파요원 대접도 제대로 못하면서 남파간첩을 찬양하는 묘비를 내 고장에 세웠다는 것이 불쾌하다”고 묘비를 부순 이유를 밝혔다.
이들이 돌아간 뒤에도 보수단체 회원들은 꾸준히 묘역으로 몰려왔다. 11시50분께 나타난 대한민국애국청년동지회의 한 회원은 이미 부서진 묘비 아래 놓인 유골함을 향해 곡괭이를 날렸으나 경찰들이 말려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이후에도 상이군경회, 해병대전우회 등 보수단체들의 행렬은 계속 이어졌다.
보광사 관계자는 경찰들에게 유골만이라도 훼손되는 것을 막아달라고 신신당부했다.
경찰, 묘역훼손에 속수무책 수수방관만 협상을 중재하기 위해 경찰이 현장에 나와있었지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속수무책이었다. 적극적으로 보수단체들을 막았다가는 ‘경찰이 빨치산과 남파간첩을 두둔한다’는 비난을 사기 십상이고, 그렇다고 명백한 실정법 위반을 가만 놔두었다가는 ‘직무유기’라는 비난을 피할 수 없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허남운 파주경찰서장은 이후 대응방안에 대해 묻는 기자들의 질문에 “나중에 이야기하겠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한편 묘역 조성을 주도한 실천불교전국승가회와 비전향장기수들은 묘비들이 부서지는 순간 서울 종로구 견지동 조계사에서 묘비를 자진철거하겠다는 등의 내용으로 기자회견을 준비하고 있었다. 기자회견 도중 뒤늦게 묘비가 모두 부서졌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비전향장기수 출신 권낙기씨는 “인간의 도덕이 낮았던 옛날에도 전쟁에서 적군 사망자가 나오면 애도를 표했고, 남한군이 인민군 묘를 만들어준 예도 있다”며 “북 대표단이 남한 현충사를 찾아 고개를 숙이는 현실에서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이 아쉬울 뿐”이라고 말했다. 그는 “소모적인 색깔논쟁으로 보광사와 실천불교승가회 쪽에 피해를 줘서는 안 되기 때문에 묘비를 철거하고 유골을 다른 곳으로 옮기기로 결정했다”고 덧붙였다. 실천불교전국승가회가 주도해 지난 5월 보광사 경내에 조성된 비전향장기수 묘역 ‘연화공원’은 최근 한 보수단체가 ‘불굴의 통일애국투사 묘역’라고 적힌 묘역 표지석을 문제삼으면서 철거를 주장하고 나서 논란이 됐다. 파주/<한겨레> 사회부 유신재 기자 이순혁 기자 ohora@hani.co.kr
경찰, 묘역훼손에 속수무책 수수방관만 협상을 중재하기 위해 경찰이 현장에 나와있었지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속수무책이었다. 적극적으로 보수단체들을 막았다가는 ‘경찰이 빨치산과 남파간첩을 두둔한다’는 비난을 사기 십상이고, 그렇다고 명백한 실정법 위반을 가만 놔두었다가는 ‘직무유기’라는 비난을 피할 수 없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허남운 파주경찰서장은 이후 대응방안에 대해 묻는 기자들의 질문에 “나중에 이야기하겠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한편 묘역 조성을 주도한 실천불교전국승가회와 비전향장기수들은 묘비들이 부서지는 순간 서울 종로구 견지동 조계사에서 묘비를 자진철거하겠다는 등의 내용으로 기자회견을 준비하고 있었다. 기자회견 도중 뒤늦게 묘비가 모두 부서졌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비전향장기수 출신 권낙기씨는 “인간의 도덕이 낮았던 옛날에도 전쟁에서 적군 사망자가 나오면 애도를 표했고, 남한군이 인민군 묘를 만들어준 예도 있다”며 “북 대표단이 남한 현충사를 찾아 고개를 숙이는 현실에서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이 아쉬울 뿐”이라고 말했다. 그는 “소모적인 색깔논쟁으로 보광사와 실천불교승가회 쪽에 피해를 줘서는 안 되기 때문에 묘비를 철거하고 유골을 다른 곳으로 옮기기로 결정했다”고 덧붙였다. 실천불교전국승가회가 주도해 지난 5월 보광사 경내에 조성된 비전향장기수 묘역 ‘연화공원’은 최근 한 보수단체가 ‘불굴의 통일애국투사 묘역’라고 적힌 묘역 표지석을 문제삼으면서 철거를 주장하고 나서 논란이 됐다. 파주/<한겨레> 사회부 유신재 기자 이순혁 기자 ohor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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