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제 수호를 정권 수호로 착각하는 검사가 있다. 그러나 ‘정통 공안’은 체제 수호를 위해 노력한다.”
2010년 대표적 공안통인 황교안 대구고검장은 법조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이렇게 말했다. 탄핵으로 종지부를 찍은 박근혜 정부에서 법무부 장관과 국무총리를 지낸 그는, “공안검사가 정치적이고 정권 입맛을 맞추기 때문에 인사가 잘 풀린다고 한다. 명예를 걸고 말하는데 사실이 아니다. 정권 입맛이 아닌 체제에 맞추는 것”이라고도 했다.
체제와 정권 수호의 첨병이었던 검찰 공안부(公安部)가 55년 만에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 대검찰청은 11일 대검 공안부를 공익부(公益部)로 바꾸는 직제명칭 변경안을 확정했다. 또 대검 공안기획관은 공익수사지원정책관으로, 대검 공안1∼3과는 안보수사지원과, 선거수사지원과, 노동수사지원과로 바꾸기로 했다. 오는 16일까지 일선 지검·지청 공안검사들의 의견을 듣고 있지만 변경 방침은 사실상 굳어진 것으로 알려졌다. 대검 공안부 명칭 변경이 최종 확정되면 일선 공안부 명칭도 바뀌게 될 것으로 보인다.
공안부라는 명칭은 1963년 12월 서울지검(현 서울중앙지검)에 정보·감찰·중앙정보부를 담당하는 ‘공안부’가 생기면서 한국 현대사에 처음 등장한다. 당시 노동법 관계 사건은 ‘특수부’ 소관이었지만, 이후 공안부는 대공 사건은 물론 노동·학원·선거·집회·시위 사건 등을 자신의 업무로 쓸어담으며 덩치와 영향력을 키웠다. 이명박·박근혜 정부에 이르기까지 공안정국·신공안정국을 주기적으로 선보이며 보수정권 국정운영의 한 축을 맡는 끈질긴 생명력을 이어갔다. 특수부와 함께 검찰 엘리트 코스로 통했고, 고위직 승진과 정계 진출의 발판이 됐다.
전두환·노태우 정권 시절 최전성기를 구가한 공안검사들은 김대중 정부로 첫 정권 교체 뒤 대대적인 ‘사상개조’를 당하는 ‘수모’를 겪기도 했다. 체제 수호와 인권 보장의 조화를 내건 ‘신공안’이 들어서자 기존 공안검사들은 ‘구공안’으로 퇴출된 것이다. 2000년 남북정상회담 이후에는 국가보안법 적용에도 큰 시각차를 드러냈다. 그 무렵 구공안 검사가 신공안 부장검사에게 “부장은 대한민국이 아닌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검사냐”고 따진 일화는 유명하다. 그는 이명박 정부 들어 구공안이 다시 득세하자 검찰 고위직에 올라 신공안정국을 주도했다. 구공안 출신인 한 대표적 공안통은 당시를 떠올리며 “공안적 정통성이 부족했던 ‘신공안 10년’은 공안의 단절을 가져왔다. 이는 안보 공백 10년을 만들어 공안 수사를 어렵게 만들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공안통 전성기는 ‘좌파와의 전쟁’을 벌인 박근혜 정부 때 다시 찾아왔다. 임기 첫해부터 김기춘 대통령 비서실장, 홍경식 청와대 민정수석, 황교안 법무부 장관으로 이어지는 ‘공안 트리오’를 내세워 법질서 확립을 명분으로 한 좌파 색출에 권력기관이 총동원됐다. 통합진보당 해산에 이어, 2007년 남북정상회담 대화록 ‘사초 실종’ 해프닝까지 총대를 메고 기소하는 것은 공안검사의 몫이었다.
문재인 정부 들어 남북관계가 급속히 진전되자 기존 공안통이 설 자리는 좁아졌다. 대검은 공익부 명칭 선정 이유에 대해 “공익은 사회 일반과 사회적 약자 보호를 상징하는 용어이고 안보·선거 업무 전반을 아우르는 명칭으로 적합하다. 친근하고 따뜻한 이미지로 변모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대검은 일선 공안검사들의 거부감을 달래기 위해 제러미 벤담과 존 스튜어트 밀의 공리설, 존 롤스의 공익 개념까지 인용했다. 특히 “선거·노동 사건을 공안적 시각에서 편향되게 처리한다는 오해와 비판을 불식하는 효과가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고 밝혔다. 노동 사건을 ‘사회적 약자인 근로자와 이들의 사회적 기본권 보장’으로 규정하는 등 부서 명칭뿐만 아니라 업무 성격에도 ‘대전환’을 시도했다.
다만, 법조계에서는 공안부 명칭 변경보다 그동안 ‘공안적 시각’에서 벌인 각종 사건 처리 등에 대한 반성이 우선돼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공안통이 아닌 ‘공익통’ 출현을 기대하려면 시간이 필요해 보인다.
김남일 김양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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