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3년 마흔세 살의 마리아 몬테소리. 1년 전 죽은 어머니를 애도하기 위한 상복을 입고 있다.
[토요판] 혼수래 혼수거
16. 마리아 몬테소리(1870~1952)
“내 인생은 어른들에게는 알려지지 않은 세계에 바칠 것이다. 그것은 바로 어린이들의 세계다.”
스물여섯의 마리아 몬테소리는 어느 날 로마 인근 공원에서 거지 모녀의 모습을 목격한다. 엄마가 비탄에 젖어 구걸하는 동안 서너살 된 딸은 땅바닥에 주저앉아 행복이 넘쳐나는 표정으로 알록달록한 종잇조각을 가지고 놀고 있었다. 그 묘한 순간이 몬테소리의 마음에 파문을 일으켰던 걸까. 이탈리아 최초의 여자 의대생이며 여의사로 촉망받던 그는 그 뒤 삶의 방향을 교육학자로 돌려 평생을 ‘어린이다움’에 대해 탐구했다.
1870년 이탈리아 중부 안코나의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무남독녀였던 그는 어려서부터 집안의 적극적인 지원으로 학업에 매진했고, 1890년 금녀의 영역이던 의대에 입학한다. 그의 의대 입학을 둘러싸고 많은 일화가 전해지는데, 입학을 허락할 때까지 수년 동안 교육부 장관을 만나 설득하기도 하고, 교황에게 직접 탄원서를 썼다고도 한다. 강의실의 남학생들이 야유하면 그는 굴하지 않고 “사랑하는 친구 여러분! 더 큰 소리로 외쳐요. 그러면 나는 점점 더 높이 올라갈 테니”라고 답했다고.
그의 ‘뚝심’은 어머니 영향이 컸다. 전통을 고수했던 아버지와는 달리 ‘깬’ 여성이던 어머니 스토파니는 어려서부터 총명했던 마리아가 대부분의 여성처럼 남성의 그늘 아래서 살아가길 원치 않았다. 이미 유명인이었던 딸이 미혼모가 됐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동료 의사인 주세페 몬테사노와 사랑에 빠져 아들을 낳았으나 양가의 반대로 결혼을 할 수는 없었다. 스토파니는 딸의 사회적 지위가 망가질 것을 우려해 마리아의 아들을 은밀히 양부모에게 보내버린다. 마리아는 1912년 어머니가 죽고 나서야 청소년으로 성장한 아들을 되찾을 수 있었다. 원망스럽지 않았을까? 그러나 그는 어머니가 죽은 뒤 애도의 표시로 평생 검은 상복을 벗지 않았다.
자기 아들을 키울 수 없었던 개인적 불행은 여성, 어린이, 빈자들을 위한 사회 운동으로 승화됐다. 1907년 3~6살 노동자 자녀들을 위해 로마의 빈민촌에 지어진 ‘카사 데이 빔비니(Casa dei Bambini·어린이의 집)는 현대 어린이집의 시초가 되었고, 오늘날 전 세계적으로 유명해진 ‘몬테소리 교육법’은 통제의 대상이기만 했던 어린이를 개성을 지닌 인격체로 보는 혁신을 가져왔다. 어린이의 자율성을 강조했던 그는 “교육은 ‘박제된 나비’ 같은 아이들에게 핀을 뽑고 자유롭게 하늘을 나는 법을 알려주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여성의 인권에도 관심이 깊었다. “남자와 마찬가지로 여자도 하나의 개인이자 자유로운 인간으로 사회적인 노동을 담당하는 한 구성원이 되어야 한다.” 1896년 26살의 나이에 독일 베를린에서 열린 국제여성권리대회에 이탈리아 특사로 파견되기도 했던 그는 ‘어린이집’의 보급을 통해 이전까지는 엄마들만 짊어졌던 육아·양육을 사회의 과제로 인식하게 하였다.
1, 2차 세계대전, 스페인 내전 등을 겪으면서도 그의 왕성한 활동은 82살로 생을 마감할 때까지 계속됐다. 영국, 미국, 프랑스, 독일, 스페인, 인도 등을 여행하며 강연과 교사 양성에 평생을 바쳤고, 그의 제자들은 그를 ‘어머니’라 부르며 따랐다고 한다. 같이 살면서도 조카나 친척으로 소개됐던 아들 마리오도, 몬테소리가 70살이 되던 해 공식적으로 아들의 자리를 되찾는다.
김지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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