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예가이자 전각가인 고 최규명 선생이 39년 만의 재심 끝에 반공법 위반의 멍에를 벗게 됐다.
서울고법 형사1부(재판장 김인겸)는 고 최규명 선생에 대해 “반공법위반 혐의에 무죄를 선고한다”고 8일 밝혔다.
당시 천안의 한 중학교 재단이사장을 맡고 있던 최 선생은 반공법 위반 혐의 등으로 1979년 천안경찰서 경찰에 영장없이 9일 동안 구금됐다. ‘반 국가단체인 국괴를 고무·찬양했다’며 문제 삼은 발언은 모두 13건. 대부분 숙직실·교무실 등에서 동료 교사와 대화를 나눈 내용이었다. “박정권 썩었다. 지금 서울에는 대학생들이 들고 일어나 휴교 상태에 이르렀다”는 발언은 긴급조치 제9호 위반이 적용됐다. “내가 일본에 갔을 때 엔에이치케이(NHK) 티브이를 시청했는데 편집국장이 평양을 방문해 김일성을 만나는 장면이 나오더라. 김일성은 풍채가 당당해 권위 있어보였는데 편집국장은 초라해 선생 앞에 있는 학생 같더라.” 해당 발언에는 반공법 위반 혐의가 적용됐다.
한 달 뒤 검찰은 사기 및 업무상횡령 혐의를 추가 기소했다. 학교 법인의 땅에서 나온 쌀 11가마를 지어 먹었고(업무상 횡령) ‘장학생이 아닌 학생을 장학생으로 선발해 재정이 부족하다는 핑계로 국고보조금을 신청했다(사기)’고 검찰은 주장했다.
검찰의 공소사실은 모두 유죄로 인정됐다.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 자격정지 3년이 선고됐다. 긴급조치 9호가 해제되면서 항소심에서 긴급조치 제9호 위반 혐의는 면소 판결이 선고됐고 나머지 혐의는 그대로 유죄가 확정됐다. 1999년 타계한 최 선생을 대신해 대신해 2013년 아들 최호준 전 경기대 총장이 재심을 청구했다. 지난 5월 대법원이 ‘긴급조치 9호 자체가 위헌이라면 당시 수사에 기초한 공소제기에 따른 유죄 확정 판결에도 중대한 하자가 있다고 봐야 한다’고 판단하면서 재심 개시 결정이 확정됐다.
재심을 맡은 재판부는 ‘원심 판단이 사실을 오인하거나 법리를 오해했다’며 반공법 위반 혐의에 무죄를 선고했다. 재판부는 “당시 반공법을 적용하기 위해서는 객관적으로 반국가단체의 이익이 될 수 있어야 하고 주관적으로는 반국가단체에 이롭다는 인식이 있어야 한다”며 “법문의 다의성과 적용 범위의 광범위함으로 형사처벌이 확대될 위헌적 요소가 있어 국가 존립을 위태롭게 할 경우 등에만 축소해 적용해야 한다”고 전제했다.
이어 재판부는 “당시 발언 경위나 내용 등을 보면 피고인이 교사들과 대화를 나누던 중 국제 정세 등에 대해 개인적인 의견을 자연스럽게 표명하거나 자신이 경험하고 느낀 사항을 표현한 정도에 불과하다”고 밝혔다. 반국가단체의 이익이 되거나 국가 존립·안전을 위태롭게 할 만한 명백한 위험성이 있다고 보기 어렵다는 취지다. 다만 사기 및 업무상 횡령 혐의에 대해서는 징역 6개월의 집행유예를 선고했다.
이 사건을 변호한 서중희 변호사는 “사기 및 업무상 횡령에 관한 법원 판단은 아쉬움이 있다”고 말했다. 서 변호사는 “유신 말기 긴급조치 9호 위반한 이들에 일반 형사 사건도 무리해서 적용한 경우도 많았는데 이들을 파렴치범으로 몰고 가려 한 정권의 꼼수였다. 당시에도 서무과장 등의 진술이 유일한 증거였다”고 말했다.
서예가이자 전각가인 고 최규명(1919~1999) 선생은 1948년 신문 기자로 일하며 김구 선생과 평양까지 동행해 조선 정당·사회단체 대표자 연석회의, 남북 요인 회담에 참석하기도 했다. 그 뒤 서예가로 국내와 일본을 오가며 여러 차례 전시회를 열었고 돌 위에 글자를 쓰고 끌로 새기는 전각가로서도 활약했다. 고한솔 기자
sol@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