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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불의한 국가권력에 스러진 이들의 슬픈 역사의 현장

등록 2018-08-23 05:01

광주 운정동 '국립5.18민주묘지' 르포
새하얀 면사포 쓴 웨딩드레스 차림의 신부
고등학교 교복 차림의 앳된 얼굴들…
묘역은 신군부에 희생된 이들의
비통하고 애달픈 이야기들로 가득
광주 북구 운정동의 국립5·18민주묘지에 마련된 최미애씨의 묘역. 최씨의 영정사진 뒤로 광주 풍영초등학교 4학년6반 학생들이 가져다 놓은 종이 카드가 놓여 있다. 김경욱 기자
광주 북구 운정동의 국립5·18민주묘지에 마련된 최미애씨의 묘역. 최씨의 영정사진 뒤로 광주 풍영초등학교 4학년6반 학생들이 가져다 놓은 종이 카드가 놓여 있다. 김경욱 기자
희생자들의 무덤은 살아 있는 자의 넋을 흔들어 놓았다. 수많은 역사의 무덤 앞에는 그곳에 잠든 이의 사진이 하나하나 놓여있었는데, 사진 속 얼굴들은 금방이라도 말을 걸어올 것처럼 생생했다. 지난달 10일, 광주 북구 운정동 국립5·18민주묘지는 잿빛 먹구름 아래에서도 한여름의 빛으로 푸르렀다.

최미애씨는 그 고요한 땅에 잠들어 있었다. 사진 속 그는 새하얀 면사포를 쓴 웨딩드레스 차림이었다. 광주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5월의 신부’가 바로 그다. 이는 밝고 경쾌한 이름이 아닌, 슬픔과 통곡의 이름이다. 1980년 광주5·18민주화운동 당시 그는 계엄군의 총격으로 숨졌다. 5월21일 고등학교 교사인 남편을 마중나간 자리에서였다. 최씨는 계엄군이 쏜 총에 머리를 맞고, 그 자리에서 숨졌다. 스물세 살 만삭의 몸이었다. 8개월 된 생명도, 엄마와 함께 스러졌다. 변변한 사진이 없어, 결혼식 때 웨딩드레스를 입고 찍은 사진이 최씨의 영정 사진이 됐다. 남편은 아내에 대한 그리운 마음을 묘비에 꾹꾹 눌러 새겼다. “여보 당신은 천사였소. 천국에서 다시 만납시다.”

묘역에 놓인 사진 가운데는 고등학교 교복 차림의 앳된 얼굴들도 있다. 춘태여상(현재 전남여상) 3학년 박금희 학생, 광주상고(동성고) 1학년 안종필 학생, 송원여상(신의여고) 3학년 박현숙 학생 등이다. 박금희 학생은 시민들에게 헌혈해달라고 호소방송을 하는 차량을 보고 광주 기독병원에서 피 흘리는 시민들을 위해 헌혈하고 집으로 돌아오던 중 계엄군의 총에 맞아 사망했다. 안종필 학생은 5월 27일 전남도청을 지키다 계엄군의 총격에 목숨을 잃었고, 박현숙 학생도 5월21일 소형버스를 타고 전남 화순으로 희생자들을 위한 관을 구하러 가던 중 주남마을에서 군인들이 난사한 총에 사망했다.

국립5·18민주묘지에 마련된 최미애씨의 묘비 뒷편. 김경욱 기자
국립5·18민주묘지에 마련된 최미애씨의 묘비 뒷편. 김경욱 기자
봉분 없이 비석만 세워져 있는 묘도 있다. ‘행방불명자 묘역’에는 유해를 찾지 못한 67명의 빈무덤(가묘)이 마련돼 있다. 80년 당시 7살이던 이창현군도 그중 한 명이다. 이군은 80년 5월19일 광주에서 실종된 뒤, 여태 발견되지 않고 있다. 이군의 아버지 이귀복(82)씨는 지난 38년 동안 아들의 주검을 찾아 전국 각지를 헤맸다. 생업은 팽개친 지 오래다. 당시 마흔네 살의 아버지는 이제 여든둘이 됐다. 이대로라면 아들은 저승에서야 만나게 될 것이다. “우리가 만날 날이 멀지 않은 것 같다. 이번에 만나면 다시는 헤어지지 말자”라고 아버지는 지난 5월13일 아들의 빈무덤을 찾아와 말했다. 아버지의 시린 마음은 묘비에서도 고스란히 전해진다. 이군의 묘비에는 “7세의 나이로 학교를 다닌 지 2개월, M16총상, 공수부대, 내 아들 창현이를 아버지 가슴에 묻는다. 망월동에 고이 잠들어라”라고 적혀있다.

제31주년 5.18민주화운동 기념식이 열린 2011년 5월18일 오전 광주 북구 운정동 국립5.18민주묘지 행불자묘역에서 최연소인 당시 7살 나이로 행방불명된 이창현씨의 어머니 김말임(66)씨가 봉분도 없는 아들의 비석 앞에서 흐느껴 울고 있다. 광주/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제31주년 5.18민주화운동 기념식이 열린 2011년 5월18일 오전 광주 북구 운정동 국립5.18민주묘지 행불자묘역에서 최연소인 당시 7살 나이로 행방불명된 이창현씨의 어머니 김말임(66)씨가 봉분도 없는 아들의 비석 앞에서 흐느껴 울고 있다. 광주/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묘역은 불의한 국가권력에 희생된 시민들의 비통하고 애달픈 이야기들로 가득하다. 이곳이 그에 합당한 이름을 얻기까지는 오랜 세월이 걸렸다. 운정동 새 묘역은 1993년 5월13일 김영삼 당시 대통령의 특별담화를 통해 만들어졌다. 당시 김 대통령은 “80년 5월 광주의 희생은 이 나라 민주주의를 위한 것이었고, 오늘의 정부는 그 연장선 위에 있다”며 “망월동 묘역을 민주성지로 가꾸어나갈 수 있도록 묘역의 확장 등 필요한 지원을 다 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에 따라 정부는 1994년 5·18 희생자들의 유해를 안치한 기존 망월동 묘역(광주시립묘지) 인근 16만7770㎡ 부지에 새 묘역 조성에 들어갔고, 1997년 5월 공사를 마쳤다. 망월동 묘역에 묻힌 수많은 5·18희생자들이 새 묘역으로 옮겨졌다. 하지만 이때만 하더라도 물리적 공간만 마련됐을 뿐, 국가 차원의 예우가 이뤄진 것은 아니었다.

새 묘역이 국립묘지(국립5·18묘지)로 승격된 것은 2002년 7월 김대중 정부에서다. 서울 강북구 수유동의 4·19묘지와 경남 창원의 3·15묘지도 같은 해 국립묘지로 격상됐다. 국립현충원으로 대표되는 국립묘지에 대한 인식이 바뀐 것은 이때부터다. 국립묘지의 가치가 ‘호국’에서 ‘민주’로 확대되면서 국가 폭력에 짓밟혔거나 저항하다 희생된 이들의 묘역도 국립묘지로서 자격을 얻게 됐다. 2006년 1월, 노무현 정부는 이들 세 묘역에 ‘국립묘지’가 아니라 ‘국립민주묘지’란 이름을 붙였다.

광주 북구 운정동에 있는 국립5·18민주묘지. 사진 가운데 높이 솟은 것이 40m 높이의 5·18민중항쟁추모탑이다. 김경욱 기자
광주 북구 운정동에 있는 국립5·18민주묘지. 사진 가운데 높이 솟은 것이 40m 높이의 5·18민중항쟁추모탑이다. 김경욱 기자
이 가운데 5·18민주묘지가 가장 규모가 크다. 현재 5·18 희생자와 행방불명자 등 775명의 묘소가 조성돼 있다. 5·18민주화운동 배후로 지목돼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고문을 당한 ‘사상의 은사’ 리영희 선생과 ‘시대의 의인’이자 ‘5·18의 증인’인 홍남순 변호사도 이곳에 잠들어있다.

5·18민주묘지는 진입공간, 기념공간, 참배공간, 묘역공간, 교육 및 역사체험 공간으로 구성돼 있다. 묘역의 관문인 ‘민주의 문’으로 들어서면 ‘민주광장’(7574㎡)이 나온다. 참배식, 영결·안장식, 5·18 기념식 등 행사가 이곳에서 시작되고 끝을 맺는다. 민주광장 왼쪽으로는 지상 2층, 지하 1층의 ‘5·18 추모관’이 참배객을 불러세운다. 5·18 희생자들의 가슴 시린 사연들을 확인할 수 있는 곳이다. 특히 5·18민주화운동 당시 시민들의 주검을 감싼 비닐과 피 묻은 태극기, 도청을 지키다 계엄군의 진압 작전으로 목숨을 잃은 시민들의 유품, 계엄군이 사용한 소총과 대검, 진압봉 등이 전시돼 있다.

국립5·18민주묘지에 마련된 유영봉안소 안에는 5·18민주화 운동 때 희생된 이들의 영정사진이 놓여있다.김경욱 기자
국립5·18민주묘지에 마련된 유영봉안소 안에는 5·18민주화 운동 때 희생된 이들의 영정사진이 놓여있다.김경욱 기자
민주광장을 지나면 너른 ‘참배광장’(1만2563㎡)이 길을 연다. 그리고 그 끝에는 분향과 헌화를 할 수 있는 참배단과 40m 높이의 5·18민중항쟁추모탑이 자리하고 있다. 추모탑 너머가 희생자들이 잠들어 있는 묘역이다. 민주의 문에서 추모탑까지의 거리는 200m다. 국립5·18민주묘지관리소 관계자는 “우리나라 국립묘지 중에서 가장 긴 참배 동선”이라고 설명했다. 참배광장 동쪽으로는 묘역에 안장된 희생자들의 영정 사진을 안치한 고인돌 모양의 ‘유영봉안소’가 마련돼 있고, 서쪽으로는 ‘역사의 문’이 세워져 있다. 문 오른쪽에는 어린이와 학생들이 체험 학습을 할 수 있는 학습관이 별도로 분리돼 있다.

역사의 문을 나서면 다양한 문화 행사를 할 수 있는 공간인 야외 공연장을 지나 망월동 옛 묘지에 이를 수 있다. 옛 묘지와 새 묘지는 저마다 독립된 공간이 아니라 서로의 부분처럼 보였다. 이곳에서 만난 김은주(36)씨는 “책과 영화로만 5·18을 접했는데, 직접 이곳에 와보니 당시 광주의 실상은 훨씬 더 참혹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추모관을 거쳐 묘역에 와 보니, 희생자들의 삶이 내 것처럼 느껴져 가슴이 아프다. 그나마 이곳을 국가가 관리하고 있어 다행이란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묘역은 적막했다. 이따금 멀리서 새 울음 소리만 나지막이 들려올 뿐이었다.

광주/김경욱 기자 das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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