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당시 대통령이 2015년 5월7일 오전 경기도 평택시 고덕면 고덕국제화계획지구 내 삼성전자 반도체 평택 단지 기공식에 참석해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삼성그룹 경영권 승계와 관련해 박근혜 전 대통령 항소심 재판부의 판단 중 특별히 눈에 띄는 것은 ‘삼성의 구체적 청탁도 존재했다’고 봤다는 대목이다. 다른 재판부와 달리 경영권 승계라는 ‘포괄 현안’ 외에 이를 떠받치는 ‘개별 현안’의 존재는 물론, 일부 현안에 대해서는 부정한 청탁도 있었다고 적극적으로 판단한 것이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과의 면담 당시 박 전 대통령이 ‘삼성 현안’으로 인식했는지를 면밀히 따져 내린 결론이기 때문에 대법원에서 어떤 판단을 내릴지 주목된다.
서울고법 형사4부(재판장 김문석)는 지난 24일 박 전 대통령에게 징역 25년을 선고하면서 경영권 승계를 위한 이 부회장 쪽의 ‘부정한 청탁’이 있었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2015년 7월25일 단독면담) 당시 피고인과 이 부회장 사이에 ‘승계 작업’이라는 현안과, 이와 관련해 막강한 권한과 지위를 가진 피고인의 우호적 입장에 관한 공통의 인식이 형성돼 있었다. 단독면담 직전에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에 대한 박근혜 정부의 결정적인 도움이 있었으며, 단독면담 이후에도 승계 작업에 대한 우호적인 기조는 계속 유지됐다”는 게 재판부의 판단이다.
재판부는 특히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 △엘리엇 등 외국 자본에 대한 경영권 방어 강화 추진 △합병에 따른 신규 순환출자 고리 해소를 위한 삼성물산 주식 처분 최소화 등 ‘성공한 개별 현안’은 물론, △삼성생명의 금융지주회사 전환 계획 금융위원회 승인 추진 등 ‘실패한 개별 현안’ 모두 삼성 경영권 승계와 연결됐다고 판단했다. 2015년 ‘박근혜-이재용 단독면담’ 전후 개별 현안에 대한 잇따른 정부의 우호적 조처들이 판단 근거가 됐는데, 재판부는 ‘엘리엇 현안’의 경우 ‘부정한 청탁’까지 인정했다.
2015년 추진된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은 이 부회장의 경영권 승계 작업의 핵심 중 핵심이었다. 합병 전 이 부회장은 제일모직 최대 주주였지만, 핵심 계열사인 삼성전자 지분의 4.06%를 보유한 삼성물산 주식은 하나도 없었다. 반면 정부 입김이 크게 작용하는 국민연금관리공단(공단)은 삼성물산 주식 11.21%를 보유하고 있었다. 주식 합병 비율이 제일모직에 유리할수록 이 부회장이, 삼성물산에 유리할수록 공단이 이익을 얻는 상황이었다.
이에 재판부는 “피고인과 청와대 참모진은 공단 의결권 행사 과정에 보건복지부를 부당하게 개입시켜, 공단이 삼성물산 주주총회에서 합병에 찬성하는 의결권을 행사하도록 했다. 이는 합병 성사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고 판단했다. 합병 뒤 이 부회장은 삼성물산 지분 16.5%를, 총수 일가까지 포함하면 30.4%를 보유해 삼성전자에 대한 영향력을 키울 수 있었다.
단독면담 전 이미 합병 결정이 이뤄진 탓에 재판부는 개별 현안 중 하나인 ‘합병’에 대한 청탁은 없었던 것으로 봤다. 대신 ‘합병 이후’를 겨냥한 청탁을 인정했다. 재판부는 박 전 대통령이 이 부회장과의 단독면담 이틀 뒤인 2015년 7월27일 안종범 청와대 경제수석에게 “합병 과정에서 문제가 되었던 엘리엇 사태 관련 대책을 마련해보라”고 지시한 사실도 인정했다. 당시 삼성물산 주식을 보유했던 미국계 사모펀드 엘리엇은 합병에 반대하며 주주총회 부결을 시도해 삼성의 ‘골칫거리’였다. 박 전 대통령은 당시 주주총회 없이도 이사회 결의만으로 소규모 합병을 가능하게 하는 ‘기업활력 제고를 위한 특별법’(원샷법) 입법 통과를 당시 여당이던 새누리당을 통해 거듭 강조하기도 했다. 이 법안이 통과되면 합병 과정에서 삼성물산 주주인 엘리엇의 영향력을 차단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합병 과정에서 불거진 ‘신규 순환출자 고리 해소를 위한 삼성물산 주식 처분’ 현안도 청와대 개입으로 삼성에 유리하게 결론 났다고 재판부는 판단했다. 애초 공정거래위원회 실무자들은 삼성전기와 삼성에스디아이(SDI)의 삼성물산 주식 1000만주(1조4500억원 상당) 처분 의견으로 보고서를 작성해 2015년 10월14일 정재찬 당시 공정거래위원장의 결재를 받았다.
그러나 불과 두달 뒤인 같은 해 12월23일 정 위원장은 기존 결정을 ‘반토막’냈다. 삼성에스디아이 주식 500만주 처분만 결정한 것이다. 재판부는 “업무 처리 과정에서 (당시) 장충기 삼성 미래전략실 사장, 안종범 경제수석 및 이수형 미전실 부사장과 최상목 비서관 간 연락이 빈번하게 이루어진 점을 보태보면 (청와대) 경제수석실은 처분 주식 수 최소화 방향성을 가지고 결정 과정에 개입했다. 안 전 수석의 업무 처리에는 피고인의 지시와 승인이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밝혔다. 김민경 기자
salmat@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