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사 생활 14년을 정리한 저의 책이 정의가 무엇인지를 생각하는 한 계기가 되길 바랍니다.”
대전고검장마저 구속된 1993년 동화은행 비리, 5공과 6공 비리, 대선 비자금 수사 등 굵직굵직한 사건을 도맡은 전직 스타 검사는 책 <성역은 없다>를 발간한 이후 1993년 문화방송(MBC)과의 인터뷰를 이렇게 끝냈다. 그는 과소비로 떠들썩했던 1990년, 외부의 갖은 압력을 뿌리치고 이례적으로 밀수품들을 애용해온 고위층 부인 200명을 소환 조사했다.
책 제목에서 역설적이게도 한국 사회에 아직 성역이 존재함을 시사해 이목을 끌기도 했다. 그는 책을 통해 사정 수사 도중에 검찰 간부까지 구속되자, 수사 확대를 우려한 정권에 의해 고위층 뇌물 수수 사실이 확인된 계좌 추적 자료를 들고도 성역 없는 수사를 이루지 못했다고 회고했다.
그런데 이 스타 검사는 27일 30대 여성이 사는 집 근처에서 공기업 법인 카드를 집중적으로 과다 사용한 의혹을 받고 있다. 바로 함승희 강원랜드 전 대표이사 얘기다. (
▶관련 기사 : 함승희, ‘30대 여성’ 집 근처서 강원랜드 카드 314번 긁었다)
함승희 당시 검사가 밝혀낸 고위층 부인 200명의 호화 밀수품 수사 자료 화면. 문화방송 갈무리.
그는 사법시험 합격 후 서울지검 특수부 검사 시절 1년간 조직 폭력배 280명을 구속하여 이름을 날렸다. 1988년 새마을 사건 비리로 전두환의 동생인 전경환을 구속하기도 했다. 생각이 바른 검사, 천생 검사라는 소리와 함께 고집 세고 다루기 어렵다는 평을 받았다. 1993년 동화은행 수사 당시 김영삼 전 대통령 선거 자금이 알려지는 등 사건이 커지자 국외 연수를 떠났는데, 당시 수사 확대를 버거워한 정권에 의한 조처라는 말들이 나왔다. 그는 드라마 <모래시계>와 영화 <범죄와의 전쟁>에서 조직 폭력배를 소탕하는 검사의 실제 모델로도 유명하다. 홍준표 전 자유한국당 대표가 검사 시절 슬롯머신을 수사하는 데도 조언을 주기도 했는데, 홍 전 대표는 자신이 쓴 책에서 검찰에서 존경하는 선배로 함승희 전 검사를 거론했다.
변호사로 변신한 함 전 대표는 이후 김대중 정부 때 정치에 입문했다. 2000년 새천년민주당 공천을 받아 16대 국회의원이 됐다가 2007년 새누리당 대선 후보 경선과정에서 김기춘 전 대통령 비서실장의 설득으로 민주당을 탈당해 박근혜 캠프에 합류했다. 2008년 4월 총선에서 친박연대 공천심사위원장과 최고위원을 지냈고 그해 5월 박근혜 싱크탱크로 불린 ‘포럼 오래(오늘과 내일)’를 만들었다. 그가 국외 출장 때 동반했으며 함께 법인 카드를 집중 과다 사용했다는 의혹이 일고 있는 여성 손아무개씨는 포럼 오래 사무국장이다.
함승희 전 강원랜드 대표이사가 실제 모델이 된 영화 <범죄와의 전쟁> 스틸컷. 영화 쇼박스 제공
그는 2014년 12월 강원랜드에 취임하고 나서도 부패와의 전쟁을 선언했다. 대표이사 취임 직후 금품 수수 등 부정을 저지른 임직원은 즉시 금품 제공자에게 전액을 돌려주고 여의치 못하면 내부 감사실로 자복하라고 지시했다. 그는 업무보고 자리에서 “회사의 국민적 이미지가 대단히 부정적이다. 부패범죄에 대해 가혹하리만치 엄단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내부 감사 기구를 확충해 본부장과 임원급을 보임하고 두 개 팀에 회계 감사와 직무 감찰 등 역할을 부여하며 기능을 대폭 강화하였다.
강원랜드에서 부정부패 척결의 칼을 빼 든 그는 금품수수와 횡령 등 혐의자 14명을 포착하고 이 가운데 회사에 끼친 손해가 큰 직원 6명을 형사 고발하기도 했다. 디자인 용역업체로부터 금품수수와 향응을 받은 직원 등이 포함됐다.
그는 또 최흥집 전임 대표 시절인 2012~2013년 이뤄진 대규모 신입 부정 채용 실태를 보도한 <한겨레> 기사를 사실로 인정하고 지난해 9월 “미개한 범죄가 발생했다”며 공식 사과했다. 2년 동안 공채된 신입 518명 가운데 95%가 강원랜드 내·외부 청탁에 의해 별도 관리됐고 권성동 자유한국당 의원도 청탁 명단에 포함됐다는 보도에 발 빠른 인정을 한 것이다. 함 전 대표는 정부 지시로 해당 사건 감사를 진행하고 검찰에 수사를 의뢰하기도 했다. 또 <한겨레>와의 인터뷰에서 검찰 수사 결과를 비판했다.
“최흥집 전 사장을 불러 청탁자가 누구냐 묻는 건 기초인데, 내외부 성명 불상의 다수에 의한 청탁이라고만 하니, 너무 불성실한 태도다.”
그는 검사 시절 정의롭고 수사 잘하는 스타 검사로 이름을 날렸고, 강원랜드에 취임해서도 직원들의 부정부패에 대처하고 철저히 수사를 의뢰하는 일관적인 면모를 보였다. 그러나 그의 결말은 살아온 공적과는 달랐다.
2014년 12월 강원랜드 대표에 공식 취임한 뒤 3년 동안 서울에서 636차례 법인 카드를 사용했는데 절반에 가까운 314건을 손 국장이 사는 방배동 서래마을에서 사용했다. 법인 카드 주요 사용 업소는 대부분 해당 여성 손씨의 집에서 도보 3분 거리 내에 있었다. 함 전 대표의 의혹을 보도한 27일치 <경향신문>을 보면, 함 전 대표는 비서를 일요일에 불러내 아들이 먹고 싶은 역삼동 ‘쉑쉑버거’를 사오게 하고, 손씨의 반려견을 돌보게 하는 등의 갑질을 하기도 했다. 그는 타인들의 부패에 정의로운 사람이었으나, 자신의 갑질과 부도덕에는 관용적이었다.
박유리 기자
nopimuli@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