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기란 민주화실천 가족운동협의회 전 상임의장이 8일 오전 서울 봉천동 집에서 민가협 사무실에서 걸려온 전화를 받고 있다. 임 전 의장은 “하필 창립 20주년 기념행사를 앞두고 몸이 아파 속상하다”고 말했다. 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사랑 품은 어머니의 분노
“아직도 지켜야할 인권이…”
“차가운 거리에서 보낸 20년이었지만, 우리 엄마들의 분노는 뜨거웠고, 가슴은 따뜻했습니다!”
50대 중반, 2남3녀를 다 키우고 ‘봉사활동이나 하면서 편하게 지내자’던 한 어머니의 인생이 바뀐 것은 1984년이었다. 서울대에 다니던 막내아들 박신철(40·회사원)씨가 전두환 정권 퇴진을 주장하며 민정당사를 점거해 농성하다 구속됐다. “처음엔 막내에게 ‘나쁜 놈’이라고 했지. 그 땐 학생운동인지 뭔지 알게 뭐였겠어!”
‘내 아들’에서 ‘모두의 아들’로
아들 면회하러 구치소에 간 어머니는 처음으로 같은 처지의 어머니들이 많다는 것을 알았다. 어머니들은 자연스럽게 하나가 됐고, 이듬해인 85년 모임을 만들었다. 그 이름은 민주화실천 가족운동협의회(민가협). 엄혹했던 군사독재 시절을 관통하며 민주화 운동의 상징이 된 ‘민가협’은 이렇게 태어났다.
12일이 바로 탄생 20돌이 되는 날이다. 50대 나이에 참여했던 그 ‘어머니’ 임기란(76)씨는 이제 칠순 후반의 ‘할머니’로 변했다. 임씨의 지난 20년 삶은 곧 민가협 20년사였다. 창립 초기부터 참여해 네차례 상임의장을 맡으며 민가협 곁을 떠나지 않았다. 그 사이 군사정권이 두 번 지나갔고, 민가협도 애초 ‘내 아들·딸을 살리는 모임’에서 ‘대한민국의 아들·딸을 살리는 모임’으로 발전했다. “우리가 한 명씩 소리 지르면 경찰들이 발길질하고 방패로 찍고 그랬어. 내 아들 내 딸 살리겠다고 함께 나서게 된 거지!”
쌀 된장 이고 지고 시위대 응원 임씨가 ‘열혈 투사’가 된 것은 86년이었다. “김세진, 이재호가 분신했는데, 정권에선 ‘빨갱이, 좌경 용공’으로 몰아가고 …, 그 때 결심했어. 애들이 세상을 바꾸려다 죽는데, 엄마도 목숨을 걸고 싸우겠다고!” 이후 벌어진 수많은 굵직한 현대사의 현장마다 임씨는 있었다. “87년 6월 항쟁 때 명동성당에서 농성하는 시위단 먹인다고 쌀 두 가마니, 멸치, 된장, 오이지를 자전거에 싣고 봉천동에서 명동성당까지 갔어. 다리가 아파 질질 끌면서 들머리를 올라서는데 수백 명의 시위대가 눈에 들어왔어. 세상이 바뀐다는 기대에 눈물이 나더라고.”
이한열씨가 숨졌을 때는 장지인 광주 망월동까지 따라가 시위대를 응원했다. 권인숙씨를 성고문한 경찰 문귀동씨 재판 때는 밤새 100인분의 국밥을 준비해 방청객들에게 나눠줬다. 응원 갔다가 시위에 직접 참여한 일도 부지기수다. 93년부터는 ‘고난 속의 희망’을 상징하는 보라색 수건을 두르고 ‘양심수 석방과 국가보안법 철폐를 위한 목요집회’도 시작했다. “양심수가 뭐냐고? 유식하게는 잘 몰라. 자기 신념을 위해, 민족과 통일을 위해 싸우다 감옥에 갇히거나 자유를 잃은 우리 아들들이 다 양심수지!” 20년 사이, 세상은 많이 변했다. 민가협이 힘을 보태 이끌어낸 변화들이다. 95년에는 세계 최장기수 김선명씨가 석방됐고, 2000년 9월에는 비전향 장기수 63명을 북으로 보냈다. 고문기술자 이근안씨가 고문해 간첩이라고 거짓 자백한 함주명씨의 재심을 추진해 7월 무죄 판결을 받아내기도 했다. 전두환·노태우 두 전 대통령이 법정에 섰고, 자식들과 함께 학생운동을 했던 386세대들도 국회의원이 됐다. 목요시위도 어느덧 600회를 앞두고 있다. 보안법 서슬 퍼런데, 갈길 멀었어 나이 탓에, 그리고 바쁘게 뛰어다닌 탓에 임씨의 건강은 예전같지 못하다. 그러나 그는 말한다. “민가협도 동창회 하듯 모여 옛날 얘기나 하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갈 길이 멀어. 아직도 국가보안법 서슬이 퍼렇잖아. 죽기 전까지는 싸워야지!” 한편, 오는 10일 오후 5시 한양대 올림픽체육관(02-763-2606 www.1210con.com)에서는 임씨를 비롯한 민가협 어머니들이 걸어온 20년 고난의 길을 기념하는 인권콘서트가 열릴 예정이다. 유선희 기자 duck@hani.co.kr
쌀 된장 이고 지고 시위대 응원 임씨가 ‘열혈 투사’가 된 것은 86년이었다. “김세진, 이재호가 분신했는데, 정권에선 ‘빨갱이, 좌경 용공’으로 몰아가고 …, 그 때 결심했어. 애들이 세상을 바꾸려다 죽는데, 엄마도 목숨을 걸고 싸우겠다고!” 이후 벌어진 수많은 굵직한 현대사의 현장마다 임씨는 있었다. “87년 6월 항쟁 때 명동성당에서 농성하는 시위단 먹인다고 쌀 두 가마니, 멸치, 된장, 오이지를 자전거에 싣고 봉천동에서 명동성당까지 갔어. 다리가 아파 질질 끌면서 들머리를 올라서는데 수백 명의 시위대가 눈에 들어왔어. 세상이 바뀐다는 기대에 눈물이 나더라고.”
민주화실천 가족운동협의회의 석방운동으로 풀려난 양심수들이 8일 오후 서울 종로 탑골공원 앞에서 열린 제596차 민가협 목요집회에서 민가협 회원들(왼쪽에 서 있는 사람들)에게 창립 20돌을 축하하는 장미꽃을 건네고 있다. 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이한열씨가 숨졌을 때는 장지인 광주 망월동까지 따라가 시위대를 응원했다. 권인숙씨를 성고문한 경찰 문귀동씨 재판 때는 밤새 100인분의 국밥을 준비해 방청객들에게 나눠줬다. 응원 갔다가 시위에 직접 참여한 일도 부지기수다. 93년부터는 ‘고난 속의 희망’을 상징하는 보라색 수건을 두르고 ‘양심수 석방과 국가보안법 철폐를 위한 목요집회’도 시작했다. “양심수가 뭐냐고? 유식하게는 잘 몰라. 자기 신념을 위해, 민족과 통일을 위해 싸우다 감옥에 갇히거나 자유를 잃은 우리 아들들이 다 양심수지!” 20년 사이, 세상은 많이 변했다. 민가협이 힘을 보태 이끌어낸 변화들이다. 95년에는 세계 최장기수 김선명씨가 석방됐고, 2000년 9월에는 비전향 장기수 63명을 북으로 보냈다. 고문기술자 이근안씨가 고문해 간첩이라고 거짓 자백한 함주명씨의 재심을 추진해 7월 무죄 판결을 받아내기도 했다. 전두환·노태우 두 전 대통령이 법정에 섰고, 자식들과 함께 학생운동을 했던 386세대들도 국회의원이 됐다. 목요시위도 어느덧 600회를 앞두고 있다. 보안법 서슬 퍼런데, 갈길 멀었어 나이 탓에, 그리고 바쁘게 뛰어다닌 탓에 임씨의 건강은 예전같지 못하다. 그러나 그는 말한다. “민가협도 동창회 하듯 모여 옛날 얘기나 하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갈 길이 멀어. 아직도 국가보안법 서슬이 퍼렇잖아. 죽기 전까지는 싸워야지!” 한편, 오는 10일 오후 5시 한양대 올림픽체육관(02-763-2606 www.1210con.com)에서는 임씨를 비롯한 민가협 어머니들이 걸어온 20년 고난의 길을 기념하는 인권콘서트가 열릴 예정이다. 유선희 기자 duc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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