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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기차길옆작은학교 30년…“가난하되, 가난에 지지 않길”

등록 2018-09-08 09:28수정 2018-09-13 09:28

[토요판] 커버스토리
기차길옆작은학교 30년
지난 8월28일 저녁 기차길옆작은학교 공동체 가족들(11가구)이 카메라 앞에 모였습니다. 사진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지난 8월28일 저녁 기차길옆작은학교 공동체 가족들(11가구)이 카메라 앞에 모였습니다. 사진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인천 동구 만석동. 일제가 태평양전쟁 병참기지로 조성한 동네. 전국의 가난이 몰려와 다닥다닥 쌓인 곳. 그 땅에 공부방을 열고 아이들 곁을 지켜온 ‘기차길옆작은학교’가 올해로 30년이 됐습니다. 그 시간 동안 공부방에서 자란 아이들은 이제 부모가 되어 그들의 아이를 공부방에 보냅니다. 그 시간 동안 공부방 이모삼촌을 속 썩이던 아이들은 이제 공부방 이모삼촌이 되어 아이들을 돌봅니다. 30년 전 공부방을 시작한 작가 김중미는 그 시간 동안 120여명의 아이들을 졸업시킨 ‘큰이모’가 됐습니다. 가난으로 왁자하고 북적이던 만석동은 그 시간 동안 가난이 흘리고 간 가장 가난한 사람들만 남은 동네가 됐습니다. 아이들 뛰어노는 소리로 시끌시끌하던 동네가 조용해지고, 동네 주민들로 바글바글하던 판잣집들이 빈집이 되고, 아무도 살지 않아 적막만 수북수북 쌓인 집들이 철거돼도, 판잣집을 4차례나 옮겨 다닌 공부방은 그 골목에 그대로 있습니다. 아이들이 골목에서 사라지지 않는 한 공부방도 계속 골목에 있을 것입니다. 공부방을 찾는 생명들의 슬픔을 감지하면서도 그 슬픔에 지지 않는 이야기가 공부방에서 오늘도 생기발랄합니다. 공부방이 처음 시작된 ‘기찻길 옆’은 30년 동안 떠난 적 없는 ‘아이들 옆’이었습니다. 그 ‘옆 자리’의 30년을 전합니다.

“우리 노랑이 왔네.”

큰이모(김중미 작가·55)가 반갑게 인사했습니다.

“노랑이 밥 먹었어?”

얼굴 한가득 나른한 표정의 노랑이는 큰이모를 보는 둥 마는 둥 했습니다. 공부방(기차길옆작은학교) 2층 현관 앞 그늘에서 뜨거운 한낮 더위(8월21일)를 피하며 졸고 있었습니다. 시멘트 턱을 베개 삼아 머리를 기댄 노랑이는 늘어지게 하품만 했습니다. 스르륵 내려앉는 눈꺼풀이 무거워 노랑이의 머리가 사라락 가라앉았습니다.

노랑이는 일곱 살. 온몸이 개나리처럼 노랑노랑해서 노랑이. 공부방에서 먹고 공부방에서 자는 노랑이는 ‘집고양이인 줄 알지만 사실 길고양이’.

노랑이는 2011년부터 공부방에 왔습니다. 엄마 길고양이를 따라와 밥을 먹고 가는 새끼 고양이들 중 한 마리였습니다. 몇몇이 공부방 근처 이모들 집으로 들어가 집고양이가 될 때도 노랑이는 길에서 사는 삶을 선택했습니다. 공부방과 연결된 지붕들 어디쯤에 머물며 노랑이도 엄마가 됐습니다.

2013년 파보바이러스가 돌았습니다. 노랑이의 새끼 두 마리도 지붕에서 죽었습니다. 남은 한 마리를 입에 물고 공부방에 온 노랑이가 살려 달라며 울었습니다. 수연 이모(52)와 동훈 삼촌(49) 부부가 새끼를 안고 병원에 갔지만 구하지 못했습니다. 새끼를 모두 잃은 노랑이는 처음부터 잃을 것 없었던 아이들의 공부방을 더 자주 찾아왔습니다. 더는 엄마가 아닌 노랑이는 수연 이모를 엄마처럼 따랐습니다. 큰이모는 생각했습니다.

우리가 자기 슬픔을 이해할 거라고 노랑이가 믿어주는구나.

계단을 내려가는 큰이모의 뒷모습이 눈꺼풀 덮이는 노랑이의 눈동자 속에서 점점 작아졌습니다.

기차길옆작은학교 ‘큰이모’ 김중미 작가가 지난 8월21일 인천 동구 만석동의 옛 공부방 앞에 섰습니다. 한국전쟁 피란민들이 지은 ‘토막집’을 고쳐 들어간 세 번째 공부방(1990~1998년)이자 그의 신혼집이었습니다.인천/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기차길옆작은학교 ‘큰이모’ 김중미 작가가 지난 8월21일 인천 동구 만석동의 옛 공부방 앞에 섰습니다. 한국전쟁 피란민들이 지은 ‘토막집’을 고쳐 들어간 세 번째 공부방(1990~1998년)이자 그의 신혼집이었습니다.인천/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옆에서, 뒤에서, 그 자리에서

태풍(솔릭)이 올라온다는 소식에도 골목은 강렬한 더위로 꽉 차 있었습니다. 큰이모가 판잣집에 공부방을 열고 아이들과 만나온 30년의 시간도 그 골목에 꽉 차 있었습니다.

만석동. 가난이 바글바글한 동네에 공부방이 있습니다. 기찻길 옆. 일제가 전쟁물자(만석동은 일제 강점기 병참기지로 조성)를 하인천역(현재 인천역)으로 실어 나르던 산업철도 옆에서 공부방(1987년 아가방으로 출발해 1988년 공부방 전환)은 시작됐습니다. 아이들 뒤. 개발이 돌아보지 않는 동네에서 달리는 속도에 올라타지 못한 아이들의 보폭에 맞춰 공부방도 기거나 걸었습니다. 그 자리. 떠나기만 하는 동네에서 공부방은 30년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옆에서, 뒤에서, 그 자리에서, 공부방은 그렇게, 다만 있어왔습니다.

가난과 이웃과 소란이 다닥다닥한 골목이었습니다. 공부방 골목 오른쪽 너머에서 조선기계제작소(1937년 설립·현재 두산인프라코어 자리)가 태평양전쟁에 내보낼 잠수함을 만들었습니다. 왼쪽 길 건너 동양방적(1932년 설립·박정희 집권기 대표적 노동탄압 사업장으로 1976년 ‘알몸시위’와 1978년 ‘똥물테러’가 벌어진 동일방직의 전신)에선 어린 여성노동자들의 손이 기계에 딸려 들어갔습니다. 잠수함을 건조하며 밥을 벌던 조선인 노동자들이 붉은 흙 위에 판잣집(괭이부리마을·일제가 붙인 이름은 ‘아카사키촌’)을 다닥다닥 짓고 살았습니다. 한국전쟁 땐 황해도에서 내려온 피란민들이 다닥다닥한 집 옆으로 다닥다닥 집을 붙였습니다. 굴뚝들이 검은 연기를 울컥울컥 토해 놓던 시절엔 논밭을 떠나 만석동 공장에 일자리를 얻은 사람들이 다닥다닥 세를 들었습니다. 그 골목을 찾아들어온 청년들이 그 골목에서 태어난 아이들의 공부방 ‘이모’와 ‘삼촌’이 되어 다닥다닥 끼어 살았습니다. 가난이 다닥다닥 모이니 고함이 버럭버럭 터졌고, 눈물이 찰랑찰랑 고일 땐 웃음도 피식피식 일었습니다.

“대인호 할머니도 안 계신데 어떻게 지내세요?”

큰이모가 경호(가명) 할머니의 안부를 여쭸습니다. 공부방 뒷집에 사는 경호 할머니가 골목에 쪼그리고 앉아 하늘을 보고 계셨습니다.

“공부방에서 아이들이 시끌시끌하니까 괜찮아.”

옆집 대인호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할머니마저 요양원에 들어가신 뒤 경호 할머니는 말동무를 잃고 적적해 하십니다. ‘대인호’는 할머니 할아버지가 타던 배 이름이었습니다.

“경호는 잘 지내죠?”

“잘 있어요. 부모 복이 없어서 안타깝지.”

경호도 어렸을 때 공부방에 다녔습니다. 화물차를 운전하던 경호 아빠는 과로사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엄마는 암으로 아빠를 따라갔습니다. 할머니가 외손자인 경호를 데려와 키웠습니다. 성인이 된 손자는 인천공항에서 정비 일을 합니다.

“수요일 저녁에 침 맞으러 오세요. 안 아프셔도 오세요. 식사도 하시고 이야기도 하시고.”

할머니가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전국이 이주해온 골목이었습니다. 먼저 온 형을 따라 동생이 왔고, 가족을 따라 친척이 왔고, 친구를 따라 이름만 알던 사람이 왔습니다. 전남의 한 섬에선 동네 전체가 옮겨왔습니다. 통짜지붕(지붕이 하나인 길쭉한 건물에서 방만 나뉜 형태) 아래에서 이 방의 소리가 저 방으로 넘어갔고 이 집의 사연과 저 집의 사연이 드나들었습니다. 중미 큰이모가 공부방을 시작했을 땐 ‘얼마 만에 짐 싸는지 보자’는 눈길도 없지 않았습니다. 이웃이 되는 데는 함께 하는 시간이 필요했으나 이웃이 되고나면 함께 산 기간은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30년 전 시끄럽다며 소리 지르던 ‘초록지붕 아저씨’는 ‘초록지붕 할아버지’가 돼서도 소리를 지르지만 공부방의 시끌벅적을 일상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수도가 얼거나 지붕에 문제가 생긴 할머니 할아버지들은 공부방으로 동훈 삼촌을 찾아와 도움을 청합니다.

인천 만석동에서 이모삼촌들과
아이들 곁 지켜온 김중미 작가
가난하되 가난에 지지 않길 바라며
기차길옆작은학교 올해로 30년

1997년 아이엠에프 사태 이후
마을 공동체도 급격하게 해체
판잣집 사라져도 공부방 찾는
아이들 가난은 사라지지 않아

1995년 옛 공부방 옆에서 중3 여학생들이 둘러 앉아 소곤소곤 비밀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유동훈 제공
1995년 옛 공부방 옆에서 중3 여학생들이 둘러 앉아 소곤소곤 비밀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유동훈 제공

“이번 태풍엔 아무도 다치지 않아야 할 텐데.”

경호 할머니 댁 옆의 좁고 낡은 2층 ‘토막집’에서 큰이모는 27년 전의 태풍을 떠올렸습니다. 전쟁이 끝나면 이북 고향으로 돌아갈 생각으로 피란민들은 땅을 얕게 파고 천을 씌워 임시 움막을 만들었습니다. 귀향의 날이 멀어지면서 주민들은 나무토막들을 주워다 붙이며 ‘남쪽의 삶’을 준비했습니다. 그 토막집이 중미 이모의 신혼집이면서 세 번째 공부방(1990~1998년)이 됐습니다. 썩어가는 기둥에 각목을 덧대고 판자지붕에 슬레이트를 올려 짐을 넣었습니다. 입주 이듬해 태풍이 만석동을 때렸을 때 옆집 다락이 날아와 공부방 벽을 뚫고 들어왔습니다. 뛰어다니는 아이들의 몸무게를 더 이상 지탱할 수 없게 된 20년 전 공부방은 네 번째 집(50여m 거리의 현재 장소)으로 이사했습니다. 열기와 습기로 후끈한 옛집엔 공부방에서 태어난 인형들(공연용)이 살고 있습니다.

동그라미를 넓히는 일

지난해 노랑이는 많이 아팠습니다. 배가 커다랗게 부푼 몸으로 공부방에 왔습니다. 자궁 감염이 심각한 노랑이를 의사도 살릴 수 있을지 장담하지 못했습니다. 노랑이는 자궁을 떼어내고 위아래 송곳니 하나씩만 남기고 이빨을 들어내는 큰 수술을 받았습니다. 수연 이모가 숟가락으로 물과 밥을 떠먹이며 간호했습니다. 겨우 건강을 되찾은 뒤부터 노랑이는 공부방 주위를 떠나지 않았습니다. 수연 이모가 공부방에서 아이들을 보고 있으면 창틀에 앉아 나도 봐달라며 칭얼거립니다. 이모가 늦은 밤 골목 초입의 집으로 돌아가면 건물 앞까지 따라갔다 공부방으로 돌아와 잡니다.

노랑이의 이야기는 지난 30년간 공부방을 졸업한 아이들(120여명)의 이야기와 다르지 않았습니다. “공부방이 길 위의 생명들을 소중하게 품는 것은 공부방 아이들에게 ‘너희도 소중하다’는 사실을 말없이 보여주는 일”이라고 큰이모는 믿었습니다.

지난 8월21일 공부방 2층 현관 앞에서 더위를 피하며 졸고 있는 길고양이 노랑이. 슬픈 일이 있을 때마다 공부방 이모삼촌들에게 의지해온 노랑이는 이제 공부방 주위를 떠나지 않습니다. 인천/이문영 기자
지난 8월21일 공부방 2층 현관 앞에서 더위를 피하며 졸고 있는 길고양이 노랑이. 슬픈 일이 있을 때마다 공부방 이모삼촌들에게 의지해온 노랑이는 이제 공부방 주위를 떠나지 않습니다. 인천/이문영 기자

“동그랗게 앉자.”

노랑이가 2층에서 졸며 수연 이모를 기다리고 있을 때 수연 이모는 1층에서 초등부 아이들에게 말하고 있었습니다.

“둘러 앉아서 효정(가명·10)이가 하는 말 좀 들어볼까.”

현찬(가명·9)이가 효정이 옆에서 콧물을 훌쩍였고, 재권(가명·13)이는 효정이 맞은편에서 고개를 숙였습니다. 장기알로 알까기를 하던 아이들도 알을 내려놓고 조용해졌습니다.

“효정이는 양말로 맞았을 때 마음이 어땠어? 기분 나빴으면 나빴다고 말해줘야 현찬이도 재권이도 다신 안 그럴 거야.”

현찬이와 재권이가 편 먹고 양말을 효정이 얼굴에 던졌습니다. 현찬이와 재권이에겐 장난이었지만 효정이도 재미있어야 장난이었습니다. 공부방 1층에 ‘사람 동그라미’가 그려졌습니다. 동그랗게 앉은 아이들과 이모삼촌들은 서로의 각진 마음을 솔직하게 이야기하며 서로에게 동글동글해졌습니다. 공부방의 30년은 아이들 누구 하나 밖으로 밀려나지 않도록 동그라미의 품을 넓히는 일이었습니다.

공부방이 변함없이 골목에 있는 동안 골목은 크게 변했습니다. 노랑이가 넘나드는 지붕들 아래로 아무도 살지 않는 집들이 많아졌습니다. 가난으로 넘치던 동네가 가난마저 떠난 동네가 됐습니다. 같이 모여 포구에서 가져온 굴(일당벌이)을 까고, 같이 모여 배추를 다듬어 김장을 하고, 같이 모여 공부방 부모회를 하던 골목에 빈집임을 확인하는 ‘안내문’이 주르륵 붙어 있습니다. 1997년 외환위기 때부터 동네가 급격하게 해체됐습니다. 아이를 노부모에게 맡긴 부부가 일자리를 찾아 일본으로 밀항했다는 이야기가 한 집 건너 한 집으로 들렸습니다. 만석동 주변 공장들이 문을 닫자 부모들은 정규직 일자리를 잃고 저임금 하청노동자가 됐습니다. 골목에서 떠들썩하게 공유했던 삶의 짐들은 각자의 집으로 들어가 ‘보이지 않는 것’이 됐습니다.

“여기도 오남매가 공부방 다니던 집…, 이 집 아이도 공부방 졸업해서 다른 도시로 나갔고…, 여기는 성호(가명)가 살던 집….”

빈집들을 바라보는 큰이모의 눈에 공부방으로 달려오던 아이들의 모습이 아릿했습니다. 옛 성호네 근처엔 지금도 사용하는 공동화장실이 있습니다. 공부방 초기 ‘외지인이 화장실 쓰면 우환이 생긴다’며 문 앞을 막아서던 주민들이 있었습니다. 그 화장실 문을 열어준 사람이 성호 엄마였습니다. 성호는 1989년 11t 트레일러에 치어 사망(당시 초등학교 4학년)했습니다. 공부방 앞에 자전거를 세우던 성호는 트레일러 갈고리에 옷이 끼어 바퀴 아래로 빨려 들어갔습니다.

골목 판잣집들이 사라져도 공부방을 찾아오는 아이들의 가난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노랑이가 뛰어오르지 못하는 아파트 안에서도 아이들은 여전히 만석동을 살고 있습니다. 임대아파트에서 할머니 할아버지와 살거나 엄마아빠가 맞벌이해서 돌봐줄 사람 없는 아이들이 공부방에 옵니다.

“1990년대 말까진 공부방에 오는 걸 즐거워하던 아이들이 2000년대부턴 부끄러워하기 시작”(김중미)했습니다. 만석동의 가난을 팔고 전시하려는 움직임(2015년 동구청이 추진한 ‘옛 생활체험관’이 주민 반발로 취소)이 되풀이되며 주민들을 절망시켰습니다. “어떻게든 전문대라도 보내야 한다는 생각으로 부모들이 공부방(무료)보다 학원을 택하는 일”이 자연스러워졌습니다. 아이들의 ‘말썽’도 줄어들었습니다. “악다구니를 써서라도 살아남겠다는 마음의 힘이 예전만큼 세지 않다”고 큰이모는 느낍니다. 이젠 공부방에서도 이모삼촌들이 아이들 입시를 돕습니다.

2012년 공부방 골목 윗동네가 철거되고 있습니다. 중미 이모가 쓴 <괭이부리말 아이들>의 무대가 됐던 곳이기도 합니다. 현재 이곳엔 괭이부리마을보금자리아파트(임대아파트)가 들어서 있습니다. 유동훈 제공
2012년 공부방 골목 윗동네가 철거되고 있습니다. 중미 이모가 쓴 <괭이부리말 아이들>의 무대가 됐던 곳이기도 합니다. 현재 이곳엔 괭이부리마을보금자리아파트(임대아파트)가 들어서 있습니다. 유동훈 제공

공부방 아이가 이모삼촌이 되고

“날씨가 아직 쌀쌀하고 바닷바람은 차가웠지만 (영욱이는) 오랜만에 배를 타서 그런지 기분이 좋았다. (…) 엄마와 아빠는 그저께 미리 쳐 놓은 그물을 끌어올렸다. (…) 걷어 올린 그물 속에는 물고기뿐만 아니라 쓰레기도 많았다. (…) 그물이 갑판에 올라오자 아영이가 달려들어 익숙한 솜씨로 쓰레기를 골라 바다 속으로 풍덩풍덩 던졌다. 영욱이도 아영이를 따라 똑같이 했다. (…) 엄마는 (…) 얼굴이 환해졌다.”(김중미 <내 동생 아영이>)

영욱(가명·1981년생)의 부모는 북성포구(만석동과 접한 중구 북성동) 어부였습니다. 남 속이지 않고 정직한 노동으로 남매를 키울 수 있는 일에 만족하며 열심히 바다로 나갔습니다. 영욱은 엄마아빠의 작은 배에 올라 가슴 가득 바다 바람을 채울 때가 좋았습니다. 장애가 있어 집에 혼자 둘 수 없는 동생 아영이도 가끔 배에 태웠습니다. 중미 이모는 영욱네 이야기를 2002년 동화로 썼습니다.

영욱은 초등학생 때부터 어부가 되고 싶어 했습니다. 아들의 장래희망을 들을 때마다 엄마아빠는 화를 냈지만 영욱은 군 제대 뒤 정말 어부가 됐습니다. 영욱은 바다에서 거둬온 생선들로 공부방 냉동실을 채웠습니다. 광어를 잡으면 회를 뜨고 꽃게를 잡으면 삶아서 공부방 동생들을 먹였습니다. 2016년 새해 첫 조업을 나간 영욱과 아빠의 배가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공부방 이모삼촌 모두 부두로 나가 밤새 배를 기다렸습니다. 이틀 뒤 아빠 없이 영욱만 바다에서 발견됐습니다. 영욱을 가르쳤던 삼촌들이 관을 들었습니다. 공부방 식구들은 오랫동안 바다 음식을 먹지 못했습니다.

“물 좀 마시고 가야지.”

호진(가명·9)이가 ‘도르리’(▶아래 기사 ‘창작집단 도르리의 골목 도르리’ 참고) 유리문 안으로 얼굴을 들이밀며 말했습니다. 호진이는 화수동(동구) 도르리 공방 골목에 삽니다. 공부방엔 다니지 않는 호진이는 공방의 단골입니다. 학교를 오갈 때마다 공방 문을 열며 넉살 좋게 물을 청합니다.

“날이 참 더워요.”

아이 같지 않은 말투에 정희(39) 이모와 성수(27) 삼촌이 컵에 물을 따라주며 웃었습니다.

정희 이모는 영욱과 동네 친구였습니다. 정희네 삼남매와 영욱네 삼남매는 공부방 골목 위아래에 살았습니다. 함께 놀다가, 함께 공부방에 왔고, 서로 가족이 됐습니다. 영욱은 정희 이모의 동생과 결혼했습니다.

정희는 중학생일 때 동훈 삼촌한테 그림을 배웠습니다. 공부방 공연에 필요한 그림도 삼촌과 같이 그렸습니다. 그림 그리는 일을 하고 싶었지만 그림 공부할 형편이 못됐습니다. 골목의 친구들처럼 정희도 공부를 포기하고 가족의 생계를 맡았습니다. 정희네 집이 헐리고 다른 건물이 올라가는 사이 공부방 아이였던 정희는 어른으로 자라 공부방 이모가 됐습니다. 노랑이가 새끼를 잃기 한 해 전(2012년) 영욱네 판잣집이 있던 윗동네도 철거(현재 임대주택인 괭이부리마을보금자리아파트)됐습니다. 정희 이모는 여전히 영욱의 이야기를 쉽게 꺼내지 못합니다. 그는 혼자 익힌 만화로 자신이 살았던 동네와 자신이 통과해온 시간들을 겨우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30년은 공부방 아이들이 자라
공부방 이모삼촌이 되는 시간
누구도 밖으로 밀려나지 않게
동그라미의 품을 넓혀온 과정

아이들과 아픔의 현장 연대방문
“아이들이 살아갈 진짜 현실
노동자 될 미래 부정하지 않고
내가 어디 서 있는지 알아가길”

성수 삼촌도 공부방 이모삼촌들의 아이였다가 공부방 아이들의 삼촌이 됐습니다. 강화도 한 보육원에 있던 그는 동훈 삼촌을 개인 후원자로 만난 뒤 강화공부방(기차길옆작은학교의 강화도 공부방)에 다녔습니다. 그도 그림에 뒀던 꿈을 접었던 때가 있었습니다. 중미 이모가 시켜준 그림 과외를 받으며 용기를 얻었습니다. 애니메이션을 전공하는 대학생이 되면서 만석동에 온 그는 비어 있던 옛 공부방에 살며(물이 새고 위험해 나중에 이사) 아이들에게 애니메이션을 가르치는 삼촌이 됐습니다. 가난한 동네에서 가난하게 살았지만 행복과 불행을 나누는 기준이 가난만은 아니란 사실을 두 사람은 압니다.

지난 8월21일 공부방 1층에서 초등부 아이들이 장기알로 알까기를 하며 놀고 있습니다. 인천/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지난 8월21일 공부방 1층에서 초등부 아이들이 장기알로 알까기를 하며 놀고 있습니다. 인천/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그땐 잉잉 했는데 이젠 히히”

사람들을 헤치고 찾아온 김정욱(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 아저씨가 아이들 한 명 한 명의 머리를 쓰다듬었습니다. 청와대 앞에 2천여명의 사람들이 모인 무더운 여름날(8월18일 쌍용자동차 국가폭력진상규명·해고자복직 촉구 범국민대회) 오후였습니다. 공부방 이모삼촌과 아이들 20여명이 달궈진 아스팔트에 앉아 저 멀리 대열 앞을 바라봤습니다.

한울(12)이는 쩌렁쩌렁한 확성기 소리를 들으며 단상에 눈을 고정했습니다. 4달 전(4월22일) 해고노동자 아저씨들과 쌍용차가 만든 자동차를 밀고 끌었던 한울이는 아저씨들의 복직을 바라며 글을 썼습니다.

“저도 크면 노동자가 되겠죠. 제가 어른이 됐을 때 쌍용차 아저씨들처럼 해고되는 게 싫어요.”

하준(4)이와 예준(4)이는 가장 어린 집회 참가자들이었습니다. 뜨끈뜨끈한 아스팔트 위에 한 장 한 장 펼치며 ‘포켓몬’ 카드놀이를 했습니다. 집 안방에 있는 것처럼 두 아이는 웃고, 떠들고, 장난쳤습니다.

공부방 이모삼촌들은 아픔이 있는 자리로 아이들을 자주 데려갔습니다. 6월27일 스스로 목숨을 끊은 쌍용차 해고노동자 김주중의 분향소는 세 차례 찾았습니다. 용산참사 현장과 제주 강정마을, 파인텍 고공농성장(6일 굴뚝농성 300일 문화제)에선 아이들과 공연도 했습니다. 대부분의 부모가 보여주고 싶어 하지 않는 그 모습들이 “아이들이 만날 진짜 현실이기 때문”(김중미)입니다.

공부방에선 대통령, 판·검사, 의사, 부자가 되는 법을 가르치지 않습니다. ‘어른이 돼도 너희 가난은 그대로일 것’이라며 섭섭할 만큼 단호하게 말합니다. “미래를 부정하지 않고, 내가 누구며, 어디에 서 있고, 스스로 지켜야 할 권리가 무엇인지 알아야” 아이들이 이 세계와 대결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그 공부방에서 배운 아이들이 가장 싫어하는 말이 있습니다.

“너희는 몰라도 돼.”

중미 이모는 책(<꽃은 많을수록 좋다>)에 쓴 적이 있습니다.

“사람답게 살자면 삶은 원래 고달프고 힘겹고 아프고 슬픈 것이다.”

운영에 어려움을 겪는 공부방들은 이명박 정부 때 재정 지원을 받는 지역아동센터로 전환했습니다. “아이들이 상황에 맞는 돌봄을 받기보다 빡빡한 프로그램의 대상이 돼버리는 현상”이 나타났습니다. 지난 정부와 현 정부에선 기초수급가정과 차상위계층 아이들에게만 지역아동센터에 다닐 자격을 줬습니다. ‘구별’과 ‘구분’이 강화될 것으로 큰이모는 우려합니다. 이모삼촌들은 간섭과 구별을 차단하기 위해서라도 무료 방과후학교를 고집합니다. 공부방은 “여기 아이들이 있으므로” 아직 여기 있습니다. “아이들이 여기 있고 학교가 끝나면 찾아올 곳이 필요할 때까진” 공부방도 계속 이 골목에 있을 것입니다.

‘그 아이들’ 중엔 공부방 이모삼촌들의 아이도 있습니다. 중미 이모의 두 딸도 공부방 친구들과 섞여 자라며 ‘공동체’의 일원이 됐습니다. 공부방에서 활동해온 이모삼촌들과 공부방에서 성장해 이모삼촌이 된 사람들이 공동체(11가구·수입의 15%를 공동 운영비로 사용)를 이뤄 살아갑니다. 그들을 공동체로 묶는 끈은 핏줄이 아닙니다.

하준이(엄마 윤복현·아빠 임종완)와 예준이(이세나·박지호)는 입양으로 공동체 가족이 됐습니다. 두 아이도 그 사실을 압니다. 집에 처음 왔을 때 찍은 영상을 아이들이 한참 뒤에 보며 말했습니다.

“엄마아빠 만나기 전엔 잉잉 했는데 여기 와서는 히히 하네.”

먼저 입양된 동후(기사에 나갈 이름으로 본인이 직접 지은 가명·8)는 하준·예준이가 만석동으로 올 때 엄마아빠(박명화·심상범)에게 물었습니다.

“내가 올 때처럼 오는 거지?”

따뜻하고 속 깊은 형 동후는 동생 하준·예준이를 각별히 챙깁니다.

지난 8월28일 공부방의 공동체 가족들이 모여 정기 회의(매주 화요일 저녁)를 하고 있습니다. 인천/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지난 8월28일 공부방의 공동체 가족들이 모여 정기 회의(매주 화요일 저녁)를 하고 있습니다. 인천/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곁에 서다”

노랑이는 ‘공노랑’입니다. ‘공부방 공씨’입니다. 공부방 아이들이 지었습니다. 노랑이처럼 졸다가도 노랑이처럼 뛰어다니는 아이들이 노랑이에게 성(姓)을 붙여줬습니다. 슬픈 눈을 가진 고양이가 슬픔을 야옹하지 않아도 되는 공부방에서 노랑이는 머리를 쓰다듬는 아이들의 손을 가만히 허락했습니다. 고마움을 전하고 싶을 땐 쥐와 참새를 잡아 공부방 앞에 갖다 놓습니다. 기겁하는 공부방 식구들 앞에서 노랑이는 노란 얼굴로 칭찬을 기다립니다.

1998년 이사온 4번째 공부방 건물. 3번째 공부방과는 50여m 거리에 있습니다. 인천/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1998년 이사온 4번째 공부방 건물. 3번째 공부방과는 50여m 거리에 있습니다. 인천/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큰이모는 “나이가 들면서 누군가의 슬픔이 다 내 것처럼” 느껴집니다. 노랑이의 슬픔도 큰이모에게 전해지고, 큰이모의 슬픔도 노랑이한테 들킵니다. “살아있는 존재들 사이엔 그렇게 오가는 슬픔”이 있었습니다. “공부방 아이들, 청년들, 이젠 엄마아빠가 된 이모삼촌들끼리도 서로 그랬”습니다. 공부방을 찾는 생명들은 “누구나 그랬”습니다. 그들은 슬픔으로 연결돼 있지만 슬픔에 지진 않습니다. 공부방 1층 벽에 걸린 네 글자를 품고 살아서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곁에 서다.”

인천/이문영 기자 moon0@hani.co.kr


‘도르리’ 멤버 유동훈(왼쪽부터), 김성수, 오정희씨가 동화책 을 낼 때 만든 인형들을 앞에 두고 사진을 찍었다. 인천/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도르리’ 멤버 유동훈(왼쪽부터), 김성수, 오정희씨가 동화책 을 낼 때 만든 인형들을 앞에 두고 사진을 찍었다. 인천/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창작집단 도르리의 ‘골목 도르리’
“그림으로 편견을 깨고 싶어요”

도르리

[명사] ① 어떤 사람이 음식을 차례로 돌려 가며 내어 함께 먹음. 또는 그런 일. ② 똑같이 나누어 주거나 골고루 줌. 또는 그런 일.

인천 동구 화수동 골목 모퉁이에 ‘도르리’가 있다. 기차길옆작은학교 ‘큰이모’ 김중미(<괭이부리말 아이들> 등의 작가)는 30여년 전 만석동에서 아가방(1987년)과 공부방(1988년)을 시작하며 매일 아침 400여부의 신문을 돌렸다. 가는 실처럼 꼬인 골목을 따라 만석동에서 화수동까지 손수레를 끌며 그는 ‘그때까지 경험한 것과는 차원이 다른 가난’을 봤다.

그 공부방에서 자란 오정희(39)와 김성수(27)가 30년 뒤 그 화수동에 창작공간을 열었다. 3평 좁은 공간에서 그림·만화를 그리고, 인형을 만들고, 전시를 한다. 공부방 아이들이 만든 목공품들이 ‘작품’으로 걸리기도 한다.

창작집단 도르리는 2011년 제주에서 시작됐다. 해군기지사업단의 구럼비 바위 파괴가 임박했을 때 공부방 식구들은 강정마을로 가서 인형극을 공연했다. 공연 뒤 김중미의 제안으로 한 잡지에 구럼비 이야기를 연재했다. 김중미가 글을 쓰고 김성수와 공부방 또래 친구들이 삽화를 그렸다. 오정희는 만화를 보탰다. 팀의 이름을 도르리로 정했다. 그림이 나눔이 되길 바라는 마음을 담았다. 강정 이야기는 책 <너영 나영 구럼비에서 놀자>로 묶여 나왔다. 인형 그림책 <6번길을 지켜라 뚝딱>은 김중미가 쓰고, 도르리가 인형을 만들고, 유동훈이 인형 사진을 찍었다. 재개발로 삶의 터전을 잃게 된 마을을 도깨비 삼형제가 돕는다.

인천 동구 화수동의 한 골목 모퉁이 건물 1층에 창작집단 ‘도르리’의 공방이 있다. 왼쪽부터 도르리 멤버 유동훈, 김성수, 오정희씨. 인천/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인천 동구 화수동의 한 골목 모퉁이 건물 1층에 창작집단 ‘도르리’의 공방이 있다. 왼쪽부터 도르리 멤버 유동훈, 김성수, 오정희씨. 인천/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도르리 멤버 중 세 명이 취업과 결혼으로 활동을 그만뒀을 때 공부방 삼촌이면서 그림·사진·목공 작업을 해온 유동훈(<어떤 동네> 등의 작가)이 공백을 메우며 도르리가 됐다. 그는 공부방 골목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급할 때마다 찾는 ‘각종 고장·수리 해결사’이기도 하다.

도르리는 그들이 자랐고 지금도 살고 있는 동네를 그린다. 사람들이 떠나고 싶어 하는 가난한 삶터를 이야기한다. 오정희는 “스러져 가는 동네가 마음 아파 한동안 외면하고 살았”다. 그의 집도 철거돼 사라졌다. 그는 도르리를 통해 동네에서 ‘도르리하기’가 되살아나길 희망한다. 대학 졸업 뒤 애니메이션 회사에 취직했던 김성수는 “야근을 해도 최저시급에 못 미치는 월급을 받으며 의미 있는 삶과 멀어졌”다. “어린 시절 외로웠던 나를 닮은 공부방 아이들을 그릴 때” 겨우 숨 쉴 수 있었다. 그는 회사를 그만두고 도르리 활동에 전념하고 있다.

도르리는 현재 ‘한 달 프로젝트’로 동네를 기록하고 있다. 한 달을 관찰하면서 보지 못하던 것들을 보게 됐다.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떠났다는 사실을 알게 됐고, 사람이 살지 않을 것 같은 집에 여전히 사람이 살고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됐다.

“이야기가 사라지고 있는 마을에서 우리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계속 찾아갔으면 좋겠다.”(유동훈)

가난하면 행복하지 않다는 편견을 그림으로 무너뜨리길 도르리는 꿈꾼다.

인천/이문영 기자

*그림·만화·인형 등으로 도르리가 바라보는 동네와 세상을 전하는 ‘도르리의 골목 도르리’가 9월15일부터 격주로 연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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