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16일 정재찬 전 공정거래위원장이 구속기소 되는 등 전·현직 공정위 고위 간부들이 무더기로 재판에 넘겨졌습니다. ‘갑질’을 막으라고 만들어놨더니, 되레 기업들을 압박해 공정위 퇴직자를 내리꽂고, 승인 없이 취업제한기관에 몰래 취업하는 등 만연한 ‘공정위 불법 재취업 실태’가 검찰 수사로 드러난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 짚어야 할 게 있습니다. 사실 공정위 재취업비리 사건은 2014년 경찰에서도 진행됐습니다. 정호열 전 공정위원장 등 7명이 기소의견으로 검찰에 송치됐습니다. 업무방해 혐의는 물론 등장인물(피의자)까지 겹칩니다. 이번에 구속된 정 전 위원장을 비롯해 김동수 전 위원장, 한철수 전 사무처장 등은 당시에도 수사 선상에 올랐습니다. 하지만 4년 전 검찰은 송치 두 달 만에 이 사건을 무혐의 처분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2009년 11월 공정위가 작성한 ‘바람직한 퇴직문화 조성을 위한 퇴직관리 방안 검토’ 문건의 5쪽. 김병욱 의원실 제공
당시 검찰·경찰 수사팀 관계자들의 얘기를 들어보면, 2013년 하반기부터 서울경찰청 수사과는 공정위가 설립인가권을 가진 공제조합 4곳 중 한 곳인 특수판매공제조합(특판조합)에 공정위가 2010년과 2012년 공정위 출신 퇴직자를 이사장으로 선출하라고 압박해 왔다는 단서를 포착, 수사를 진행했습니다. 당시 강신명 서울경찰청장은 기자들을 만나 “이번 수사는 (낙하산 인사에 대한) 법원 판례를 새로 만드는 일”이라며 의욕을 보였습니다.
경찰 수사에선 특판조합 이사장 선출을 위한 추천위원 7명 중 6명이 “공정위 고위 간부로부터 ‘공정위 출신 인사를 이사장으로 선출하라’는 구체적인 압박을 받았다”고 진술했다고 합니다. 실제로 2010년엔 공정위 부위원장 출신인 김선옥씨가, 2012년엔 공정위 총괄정책과장을 지낸 신호현씨가 각각 특판조합 이사장으로 선출됐습니다.
하지만 경찰 수사는 검찰 지휘 단계에서 턱턱 막힙니다. 일단 증거 확보를 위한 공정위 압수수색 영장을 받으려는 경찰에, 검찰은 “임의제출 받으라”고 수사지휘를 합니다. 정 전 위원장 등에 대한 피의자 소환조사도 방문조사로 대체됩니다. 예봉이 꺾인 상태에서 공정위는 자료제출을 거부했습니다. 피의자들도 편안하게 “관행이다”, “압박이 아니라 적임자를 추천한 것이다”며 혐의를 부인했습니다.
2014년 2월, 경찰은 정 전 위원장 등 전·현직 고위간부 7명을 업무방해 및 직권남용 혐의로 기소의견으로 검찰에 송치했습니다. 그리고 당시 서울중앙지검 형사3부는 송치 두 달 만에 사건을 무혐의 처리합니다.
경찰 수사 당시 ‘검찰의 반대’로 열지 못했던 공정위 운영지원과 캐비닛이 4년 만에 검찰에 의해 열렸습니다. 캐비닛에선 2009년 11월 작성된 ‘바람직한 퇴직문화 조성을 위한 퇴직관리 방안 검토’ 문건, 해마다 작성된 ‘퇴직자 재취업 리스트’가 튀어나왔습니다. 정년을 2년 앞둔 58살 퇴직자들을 사기업체는 물론 산하·유관기관에 꽂아넣는 것을 기획하고, 정 전 위원장 등 수뇌부의 승인 아래 실행했던 것입니다. 물론 특판조합도 공정위 퇴직자를 위해 자리를 내놓아야 하는 ‘을’ 중 하나였습니다.
올해 검찰의 공정위 수사로 12명의 전·현직 공정위 고위간부가 기소됐지만, 2009년 비리의 씨앗을 뿌린 정 전 위원장과 당시 공정위 수뇌부는 공소시효(7년)가 지나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았습니다. 4년 전 수사가 제대로 진행됐다면 결과는 달랐을 겁니다.
당시 검찰 수사팀 관계자의 말을 들어보았습니다. “경찰 수사 때 조사된 참고인들이 검찰에서 진술을 바꿨다. 또 2010년 이사장 선출될 땐 공정위가 추천한 인사가 이사장으로 선출되지 않았다. 무혐의 처분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고 했습니다. 또 “공정위가 대기업 인사담당자 등을 직접 불러서 압박하는 대기업 취업과 추천위라는 중간 단계가 있는 특판조합 이사장 선출과는 성격이 다르다”고 설명했습니다. 당시 경찰 수사 의도가 불순했다는 주장도 나옵니다. 법조계 한 인사는 “2013년에 경찰 출신이 공정위 산하 4대 공제조합 중 하나인 상조보증공제조합 이사장에서 그만둔 뒤, 공정위 과장급 출신이 이사장이 되자 경찰에서 괘씸하게 생각했다는 얘기가 있었다”고 말했습니다. 실제로 경찰 수사 이듬해인 2015년 또 다른 공정위 산하 공제조합인 직접판매조합에는 어청수 전 경찰청장이 이사장으로 선임됐습니다.
물론 경찰의 수사가 부적절했을 수도, 혐의 입증이 불충분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검찰이 1차 수사기관에서 2차 보충수사 기관으로 점차 변모해 가고 있는 상황에서 검찰 스스로 생각해 볼 점이 있습니다. 4년 전 사건을 처리할 때, 경찰 수사에 대한 견제 심리가 작동한 것은 아닌지, 혹은 정부기관에 대한 적극적인 수사가 금기시됐던 박근혜 정부 때라 검찰 단계 수사가 왜곡된 것은 아닌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는 겁니다.
서울지역 한 검사는 “참고인이 경찰 때 했던 진술이 검찰에 와서 바꾸면 왜 바꿨는지 캐묻는 게 정상이다. 그걸 근거로 무혐의를 쓴다는 건 수사 의지가 없다는 것 말고는 설명이 안 된다”고 꼬집었습니다. 4년이라는 시간만 흘렀을 뿐 같은 내용의 사건입니다. 경찰 입장에서는 검찰이 ‘지금은 맞고 그때는 다르다’고 우긴다고 생각할 수 있지 않을까요.
김양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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