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나 천인공노할 죄를 지었길래….’ 사형을 선고받을 정도 중죄라고 하면 보통 살인 등 강력범죄를 떠올리기 마련이다. 하지만 우리 법제를 살펴보면 살인이나 타인에 대한 심각한 위해를 끼치지 않고도 사형을 선고할 수 있는 조항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다. 사형제 자체에 대한 찬반 여부를 떠나 사형 선고를 위한 규정이 사실상 방치돼 있는 법체계 자체를 손봐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한겨레>가 10일 현행법 체계를 전수 분석한 결과, 현행법 가운데 ‘국가보안법’, ‘형법’ 뿐만 아니라, ‘문화재보호법’, ‘마약류 관리에 관한 법률’, ‘의무경찰대 설치 및 운영에 관한 법률’ 등 총 23개 법률 100여개 조항에 걸쳐 ‘사형’을 선고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먼저 의무경찰대설치법은 “적이 있는 상황에서 근무를 기피할 목적으로 자신의 신체를 상해한 경우 사형·무기 또는 5년 이상의 징역에 처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 ‘적전 상황’이라는 특수성을 감안하더라도 타인의 생명·신체를 위협하는 경우가 아니라 자해만을 이유로 사형을 선고할 수 있다는 조항이다. 또 문화재보호법은 다중의 위력으로 문화재 관리인을 숨지게 한 경우에 사형(무기 또는 5년 이상의 징역)을 선고할 수 있다는 규정을 두고 있다. 형량이 동일한 형법상 살인죄로도 충분히 처벌할 수 있는데, “국민의 문화적 향상을 도모함과 아울러 인류문화의 발전에 기여함을 목적으로” 하는 문화재보호법에 별도 사형 규정을 두고 있어 쉽게 납득이 가지 않는 대목이다.
이밖에도 사형을 규정하고 있는 법조항들은 폭넓은 범죄 혐의에 사형을 선고할 수 있는 길을 열어두고 있다. 마약류 관리에 관한 법률을 보면 마약을 수·출입 및 제조하거나 수·출입 목적으로 대마를 소지하는 등의 경우 중 영리를 목적으로 하거나 상습적일 경우 사형, 무기 또는 10년 이상의 징역에 처할 수 있다. 범죄를 저지르지 않아도 조직의 ‘수괴’라는 이유만으로 사형이 가능한 경우도 있다. 국가보안법, 국민보호와 공공안전을 위한 테러방지법, 폭력행위 등 처벌에 관한 법률 등에는 각각 반국가단체, 테러단체, 범죄단체의 수괴를 사형에 처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문제는 이렇게 광범위하게 ‘사형’을 규정하고 있는 법체계 때문에 사형 제도를 손보는 일 자체가 어려운 지경이라는 것이다. 박상기 법무부 장관은 연세대 법과대학 교수 시절인 2006년 11월 작성한 ‘사형제도의 개선방안에 관한 연구’ 보고서에서 “우리나라의 경우 사형제도가 존속하고 있다는 점보다 우선적으로 시정되어야 할 부분은 사형규정이 너무 많다는 점”이라고 지적하기도 했다. 23개 법률의 개정안을 일괄 개정해야해 사형제 개선을 위한 동력을 모아내기 그만큼 어렵다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각 법률에 흩어져 있는 사형 조항을 개별적으로 손봐야 한다는 주장에도 힘이 실린다. 대표적인 경우가 ‘한국조폐공사법’이다. 한국조폐공사의 설립을 위한 근거법률인 한국조폐공사법에는 2014년 이전에만 해도 은행권·주화·국공채 등을 강취한 경우 사형·무기 또는 5년 이상 징역으로 처벌할 수 있는 규정을 두고 있었다. 그러나 “사형은 범죄를 예방하고 처벌 효과를 알리기 위해 필요한 경우에 한하여 예외적으로 신중하게 인정되어 한다는 점” 등을 이유로 2014년 1월 이 조항이 개정됐다. 살인죄 등 사형을 규정하고 있는 다른 처벌규정과의 형평성에도 맞지 않는다는 지적이었다. 당시 한국조폐공사법 개정에 앞장섰던 것은 바로 이낙연 국무총리다. 이 총리는 국회의원 시절이던 2012년 9월 ‘한국조폐공사법 일부개정법률안’을 대표 발의했다.
김준우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사무차장은 “사형 선고가 사실상 한번도 없었던 법 조항이 수도 없이 많다”며 “사문화된 법이 그대로 남아 있으면 법의 권위 자체가 떨어지는데다 사형이라는 극단적인 처벌 조항을 방치하는 것도 옳지 않은 일”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어 “당장 사형제도 폐지가 어렵다면 사형이 규정된 법조항을 줄여가면서 사형제 폐지의 흐름을 만들 필요도 있다”고 덧붙였다.
정환봉 신민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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