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일 오후 서울 강서구의 한 피시방 앞에 흉기 실인사건으로 목숨을 잃은 아르바이트생을 추모하는 공간에 국화와 과자, 추모 글들이 놓여 있다. 김경호 선임기자 jijae@hani.co.kr
지난 12일 밤. 서울에 거주하는 ㄱ(21)씨에게 급박한 연락이 왔다. 고등학교 친구인 ㄴ(21)씨의 어머니가 걸어온 전화였다.
“친구가 병원에 있다고 하셨어요. 너무 놀라서 병원으로 달려갔어요.”
병원 응급실에 도착했지만 친구 ㄴ씨는 이미 중환자실로 옮겨진 뒤였다. 의식을 잃은 채 병원에서 투병하던 ㄴ씨는 약 하루 뒤인 13일 밤 11시50분께 결국 숨졌다. 친구는 남자친구로부터 목 졸림을 당해 숨진 데이트 폭력의 피해자였다.
‘강서구 피시방 살인사건’으로 심신장애 형량 감경에 대한 논란이 벌어진 지 나흘 뒤인 지난 18일. 데이트 폭력으로 딸을 잃은 ㄴ씨의 아버지는 청와대 누리집에
‘심신미약 피의자에 의해 죽게 된 우리 딸 억울하지 않게 해주세요’라는 청원 글을 올렸다. 해당 글에서 아버지는 “꽃다운 우리 딸은 생일이었던 12일 남자친구에 의해 (목 졸림으로) 사망하게 됐다”며 “이제 만 20살, 꽃을 피울 나이에 꽃도 피지 못하고 꽃봉오리로 삶을 마감했다”고 억울함을 호소했다.
황망한 죽음으로 슬픔에 젖어있던 ㄴ씨의 친구들은 모두 이 글을 자신의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올리며 청원 동참을 호소했다. 친구들은 ㄴ씨를 이렇게 기억했다.
“친구는 어려운 가정형편에서 자라면서도 성격이 밝았고, 친구들에게도 배려심이 깊었어요. 어릴 때부터 부모님을 잘 돌봐야 한다는 책임감이 있어서 고등학교 졸업하자마자 간호조무사로 병원에 취직했거든요. 이번에도 새로운 병원으로 막 이직했던 참에 이런 사건을 당해서… 너무 황망하죠.”
-피해자의 친구 ㄱ(21)씨
김씨의 가족과 친구들을 분노하게 한 것은 피의자인 ㄴ씨의 남자친구가 경찰 조사에서 조현병을 주장했다는 점이다. 피해자 ㄴ씨의 아버지는 청원 글에서 “가해자는 조현병이라는 병명으로 사건을 축소·은폐하려고 한다”며 “(피의자는) 정상적으로 살 수 있는 정도인데 조현병으로 사건을 축소하려는데 대해 유가족은 너무 억울하다”고 했다. 현재 가해자는 치료감호소에서 정신감정을 받고 있다.
“(피의자는) 지난달 18일에 의가사 제대를 했어요. 친구 휴대전화에 그쪽(피의자) 아버지께서 친구(피해자)에게 보낸 진단서 사진이 있더라고요. 나중에 확인했더니 진단 내용에 ‘불분명한 정신병’이라고만 쓰여 있었습니다.”
-피해자의 친구 ㄱ(21)씨
강서구 피시방 살인사건 피의자 김아무개(29)씨처럼 수사기관은 피의자의 심신 또는 신체에 대하여 감정할 필요가 있을 때, 일정 기간 치료감호소나 병원 등에 보내 정신감정을 받도록 하는 ‘감정유치’ 제도를 시행한다. 짧게는 2주에서 길면 한 달 이상 걸리는데, 이 기간 동안 범죄 피해자의 가족들과 지인들은 가까운 이를 잃은 범죄 피해의 고통과 함께 혹여 감형의 근거가 될 수 있는 심신장애 판정이 나올까 ‘피가 마르는’ 시간을 보낼 수밖에 없다. 친구 ㄱ씨는 “사람을 죽였다는 것 자체가 이미 제정신은 아닌데, 그걸로 심신미약을 주장해서 결국 감형까지 받으려는 행태가 도저히 이해 가지 않는다”며 “정신감정 결과가 언제 어떻게 나올지 몰라서 가족들도 친구들도 계속 마음을 졸이고 불안해하고 있다”고 전했다.
강서구 피시방 살인사건 등 잔혹한 사건이 잇따르면서 피의자가 정신감정을 받는 기간 동안 피해자와 그 가족들이 받을 고통과 분노에 대해 좀 더 적극적인 보호 조처가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범죄 피해자와 피해자 가족들은 범죄 피해에 대한 고통을 주로 가해자에 대한 분노로 표출하고, 이런 상황이 이어지게 되면 외상후스트레스장애(PTSD) 등의 정신적·신체적 부정 반응까지 나타나면서 극단적인 경우 ‘가족 해체’와 같은 부작용으로 이어진다.
법무부 인권국에서 2009년 발행한 ‘강력범죄 피해자와 피해자 가족의 피해실태 사례연구’를 보면, 살인·강도 등 강력범죄의 가장 심각한 피해 가운데 하나로 ‘가족 해체’를 꼽고 있다. 보고서에서 강력범죄 피해자나 그 가족 171명을 대상으로 설문 조사한 결과를 보면, ‘범죄 이후로 가족들은 사소한 일에도 두려워하거나 불안해한다’는 항목에 응답자 169명 가운데 118명(69.8%)이 ‘그렇다’고 응답한 것으로 나타났다. 가족들 간에 웃음이 사라졌다’는 항목에는 응답자 171명 가운데 98명(57.3%)이, ‘가족들이 서로 다투는 일이 많아졌다’는 항목에는 응답자 169명 가운데 53명(31.4%)이 ‘그렇다’고 답한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살인 범죄의 경우, 피해자 가족의 자살이나 자살 시도가 있었던 경우가 응답자 60명 가운데 6.7%(4명)로, 강도(0%), 성범죄(3.6%), 방화(6.3%) 등 기타 강력 범죄보다 더 높게 나타났다.
2005년 제정된 범죄피해자 보호법은 국가 및 지자체에 범죄피해자와 그 가족에 심리상담, 의료제공, 법률지원, 취업 관련 지원, 주거지원 등 범죄피해자의 보호에 필요한 대책을 마련하도록 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특히 강력 범죄의 경우 발생 이후 초기 단계부터 적극적으로 피해자 가족에 대한 지원이 필요하다고 조언한다. 인권국 보고서도 “강력범죄 피해자와 그 가족을 대상으로 한 심층면접조사 결과, 수사기관이 적극적으로 피해자와 그 가족을 범죄피해자 지원센터에 연계하는 경우가 그렇지 않은 경우보다 피해자들의 만족도가 높았다는 결론이 나왔다”고 했다.
공정식 경기대 교수(범죄심리학)는 “가해자가 심신미약을 주장해 정신감정을 받게 될 경우, 남아있는 피해자 가족들은 ‘혹시나 심신미약이 인정돼 형이 감경되면 어쩌나’하는 두려움과 분노에 사로잡히게 된다”며 “이 분노가 크면 클수록 외상후스트레스장애로 이어질 가능성도 커진다”고 했다. 공 교수는 이어 “피해자 가족들의 분노를 보듬기 위해서라도 사건 초기 단계부터 ‘피해자 전담 경찰관’ 등의 수사기관이 개입해 이들을 지원할 필요성이 높다”고 강조했다.
황금비 기자
withbee@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