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철 정비는 크게 세 가지로 나뉘는데 이 작업을 비정규직과 정규직이 함께 한다. 비정규직이라고 단순업무만 하는 것이 아니고, 일의 경중으로 직군을 구별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서울지하철노동조합 제공
덕(덕후) 중의 덕은 ‘철덕’(철도를 좋아하는 사람을 이르는 말)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유별난 ‘철도 사랑’ 때문일까요? 코레일, 서울교통공사 등 철도와 관련한 공공기관 취업을 원하는 구직자들은 정보 공유를 위해 별도의 온라인 커뮤니티까지 만들 정도입니다. 그런데 이 커뮤니티에 1년 전쯤부터 등장한 신조어가 있습니다. 무기계약직을 ‘벌레’에 비유한 혐오 표현인 ‘무기충’입니다. 지난해 7월부터 올해 10월 말 현재까지 이 커뮤니티 게시판에서 ‘무기충’이란 단어를 검색하면 모두 477개의 글이 나옵니다. 지난해 7월은 박원순 서울시장이 서울시 공공부문 무기계약직의 정규직 전환을 약속한 시점이었습니다. 비정규직의 정규직화가 가장 빠르게 진행된 대표적인 회사가 바로 서울교통공사였습니다.
무기계약직에서 올해 3월 서울교통공사 정규직이 된 전동차 정비사 ㄱ(42)씨는 ‘무기충’이라는 단어가 원망스럽습니다. ㄱ씨는 서울교통공사에 입사한 지 만 1년이 안 된 ‘신입사원’이지만, 사실 15년 경력의 베테랑 정비공입니다. 서울지하철 승객들의 안전을 책임지는 그가 한 달을 일해 손에 쥐는 돈은 겨우 200만원대 초반(실수령액 기준)에 불과합니다. 부인과 맞벌이를 하고 있다지만, 초등학교와 유치원에 다니는 아이들까지 네 식구가 생활하기에는 살림살이가 빠듯합니다.
그런데 이런 속사정을 모르는 세상 사람들은 요즘 ㄱ씨를 실력도 없이 ‘꿈의 직장’에 정규직으로 들어간 ‘몰염치한 사람’ 취급을 합니다. 이달 국회 국정감사에서 서울교통공사 전·현직 직원들의 친인척이 무기계약직으로 입사해 정규직으로 특혜 채용됐다는 의혹이 불거졌기 때문입니다. 이른바 ‘고용세습’ 논란은 일부 사람들의 문제인데, ‘비정규직의 정규직화가 문제다’라는 식의 뉴스를 듣는 ㄱ씨는 허탈하기만 합니다.
그런 그에게 ‘고용세습’ 논란 이후 달라진 회사 분위기를 물었습니다. ㄱ씨의 이야기를 직접 들어보실까요?
“기존 정규직과 비정규직에서 정규직 전환이 된 동료들이 같이 정비 업무를 해요. 지난해 정규직화 협상을 할 당시에 정규직-비정규직 간 갈등이 컸거든요. 그 과정에서 자살한 분도 있었고. 그러다 3월에 정규직 전환된 뒤 10달 같이 일하면서 이제 다들 갈등이 옅어지고 서로 친해질 만한 분위기가 되니까 이런 일이 생겨가지고…. 고용세습 의혹이 나온 다음에 다시 조금 데면데면해졌어요. 물론 서로 얼굴 보며 일할 땐 좀 덜하긴 하지만 아무래도 차갑게 대하거나 그런 게 있죠. 사내 소통 게시판에선 더 노골적으로 (그런 감정이) 드러나는 게 있고.”
사실 서울교통공사의 정규직-비정규직 간 갈등은 이번이 처음은 아닙니다. 지난해 9월 무기계약직들의 정규직 전환 협상이 시작되면서 사내 익명 게시판 ‘소통의 창’은 무기계약직들에 대한 혐오와 공격이 매일같이 이어졌습니다. 무기계약직들의 정규직 전환이 ‘무임승차’라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가운데 정규직 전환이 어려워지는 상황에 괴로움을 느꼈던 무기계약직 정비 노동자 김민규(35·가명)씨는 지난해 11월16일 자신의 자취방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
▶관련 기사 : ‘무기계약직’ 82년생 김민규씨의 목숨은 누가 앗아갔나) 사건 직후 서울교통공사는 구성원 간 갈등을 사내 소통 한마당 게시판을 잠정 폐쇄했다가 올 초 다시 문을 연 상태입니다.
1년 전의 악몽이 다시 떠오르는 요즘, 무기계약직에서 정규직이 된 이들은 이른바 ‘무임승차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까요? ㄱ씨는 그 복잡한 심경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사내 익명 게시판 글을 잘 읽지 않아요. 비정규직에서 정규직으로 전환된 우리를 비하하는 글이 많이 올라온다는 얘길 들을 때마다 모욕감을 느끼고 ‘내가 왜 이 일을 해야 하나’ 좌절하거나 답답해하는 동료들이 많아요. 밀실에서 부정하게 채용된 게 아니라 저희는 분명 공개 채용을 통해 회사에 들어왔거든요. 물론 기존 정규직 분들이 저희가 NCS(국가직무능력표준)와 토목, 전자, 기계 같은 전공 시험을 안 보고 입사한 것을 지적한다면 그 점은 수긍해요. 하지만 그분들이 시험공부를 한 시간만큼 혹은 그보다 더 긴 시간 동안 현장에서 실무경험을 쌓았어요. 10㎏ 가까이 되는 브레이크슈를 갈고, 오일을 교환하고, 노후된 전자부품을 교체하는 일을 하는데, NCS같은 시험만으로 실력을 평가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지 않나요? 그런데 계속 ‘너희는 자격 미달이다’라는 말을 들으니 속상한 거죠.”
ㄱ씨와 같이 무기계약직에서 정규직이 된 이들을 바라보는 기존 정규직 노동자들의 시선은 대체로 세대별로 나뉩니다. 상대적으로 나이 든 정규직 노동자들은 대체로 싸늘한 시선을 보내는 젊은층 정규직들과 달리 ㄱ씨와 동료들에게 호의적입니다. 그는 “과거 지하철공사 시절 기능직과 일반직의 ‘직급통합’을 경험한 적 있는 50대 선배들은 대체적으로 우리를 개의치 않고 편하게 대해주신다”며 “그런 모습에 기분 나빠하는 젊은 직원들도 있지만, 또 우리 입장을 이해해주는 친구들도 있다”고 말했습니다. 해고 위험에 처했을 때 손을 내밀어 준 것 역시 정규직 동료들이었습니다. 7년 전 서울메트로의 외주 용역업체 소속으로 계약해지 통보를 받은 비정규직들에게 탄원서 쓰는 법을 알려주고, 그 결과 해고를 피할 수 있도록 도움을 줬던 것이 서울메트로의 정규직 노동조합이었기 때문입니다.
그가 마지막으로 이번 ‘고용세습’ 의혹 논란에 대해 사람들에게 당부하는 말이 있습니다.
“감사원 감사 결과에서 실제 고용세습에 연루된 사람이 아주 없지는 않겠죠. 그런데 그건 일부의 이야기에요. 저는 정치인들이 나쁜 것 같아요. 이제 조용히 서로의 상처가 아물어 가면서 얼굴을 맞대고 일하고 있었는데... 이번 일로 ‘비정규직이 정규직이 되는 건 부정행위야’라는 인식이 생길까봐 걱정이 돼요. 무기계약직이든 계약직이든 열악한 환경에서 열심히 일하는 비정규직들의 희망이 없어질 것 같아서요.”
선담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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