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일 이른바 ‘염전노예 사건’ 2심 재판이 끝난 뒤 피해 장애인을 대리한 최정규 변호사(원곡법률사무소)와 사단법인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가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법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전라남도 신안군 신의도 염전 등에서 노동력을 착취당한 이른바 ‘염전노예 사건’에 대해 항소심 재판부가 1심을 뒤집고 국가 배상 책임을 인정했다.
서울중앙지법 민사1부(재판장 윤승은)는 23일 노동 착취 피해자 김아무개(53·지적장애3급), 최아무개(57·경계성 지능장애), 김아무개(53·지적장애 3급)씨 등 3명에 대해 국가가 각 2~3천만원씩 배상해야 한다고 판결했다. 김씨의 경우, 지자체 완도군의 배상 책임 또한 인정됐다. 이는 “국가 등이 지적장애인에 대한 보호 의무를 다하지 않았다고 볼만한 증거가 부족하다”고 판단한 1심과 달리 장애인에 대한 노동력 착취 사건에 국가와 지자체의 책임을 인정한 것이다.
선고 공판이 끝난 뒤 피해자를 대리한 최정규 변호사(원곡법률사무소)는 “당사자분에게 승소 소식을 전했더니 너무 기뻐하셨다”고 말했다. 이어 “‘10년 넘게 한 두 명도 아닌 몇십명의 장애인이 노동력 착취를 당했는데 파출소 경찰관, 사회복지 공무원, 근로감독관이 정말 몰랐을까’하는 의문으로 소송을 시작했다. 이번 판결은 국가와 경찰, 근로감독관이 충분히 학대 피해를 알 수 있었음에도 방치했다는 사실을 법원이 인정했다는 의미가 있다”고 설명했다.
■ 1심 재판부 “의무 다하지 않았다는 증거 부족”… 8명 중 1명만 배상 책임 인정
이른바 ‘염전노예 사건’은 2014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지적장애가 있는 노동자들이 신안군 등에 있는 염전에서 길게는 20년 넘게 일했지만, 임금도 제대로 받지 못한 채 노동력을 착취당하고 심지어 폭행에 시달린 사건을 말한다. 2014년 초 피해 사실이 언론을 통해 알려졌고 이듬해 11월 피해자 8명은 “국가와 지자체가 보호의무 등을 다하지 않았다”며 각 3천만원씩 모두 2억4천만원의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냈다. 경찰·고용노동지청·지자체 누구도 지적장애 노동자에 대한 노동력 착취 행위·폭행 등을 막지 못한 것에 대한 책임을 묻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1심 재판부는 지난해 9월 이들의 손해배상 청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공무원의 고의나 과실에 대해 위법한 공무집행에 있었다는 점을 인정할 수 있는 구체적 증거나 주장이 부족하다”는 이유에서였다. 당시 국가와 지자체 등이 경찰 공무원의 징계 현황 등 자료 제출을 거부해 김씨 등을 대리하는 변호인쪽은 제한된 자료로 법정 다툼을 벌여야 했다. 다만, 재판부는 2013년 경찰에 도움을 요청하고도 다시 염전으로 돌려보내진 피해자 1명에 대해서만 국가가 3천만원을 지급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피해 장애인 중 3명은 1심 판단에 불복해 항소에 나섰다.
서울 서초동 서울중앙지법. 이정우 선임기자 woo@hani.co.kr
■ 경찰 “염전 인부 관리하는 장부 따로 있었다”… 2심서 새 증거 나와
국가와 완도군 등을 상대로 한 2심에선 ‘국가·지자체가 보호의무를 다하지 않았다’는 점을 입증할 새로운 증거들이 제시됐고 법원은 이를 받아들였다. 변호인측은 “근로감독관, 사회복지공무원, 경찰관 명단 등을 확보해 서면 증언을 받았고 이들 모두 피해자들이 염전에서 원치 않은 노동을 강요당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음에도 특별한 조치를 취하지 않은 것으로 밝혀졌다”고 설명했다.
특히, ‘전남 신안군 신의파출소에 염부들을 관리하는 장부가 따로 있었고 그 장부에 면담 내용을 기록했다’는 경찰관 박아무개(50)씨의 증언이 2심에서 새롭게 공개됐다. 2010년 초 신의파출소에서 근무하던 박씨의 서면 증언에 따르면, 새로운 염부가 입도하면 신의파출소에서 신고를 받았다고 한다. ‘염전 노동자에 대한 인권침해 사례를 예방하고 염주들에 경각심을 고취하기 위해서’였다. 노동자가 처음 입도할 때 주로 신상면담이 이뤄졌는데, 노동자의 장애 유무, 직계 가족의 주소지와 연락처, 입도 경위는 물론, 근로계약서 작성여부 및 임금지불방법, 액수까지 파악해 기록했다고 한다. 이 내용은 전남지방경찰청 내부망에도 등록됐다. 하지만 국가측은 ‘보존연한이 만료됐다’는 이유로 면담기록부가 이미 파기됐다는 답변만을 보내왔다.
■ 2심 재판부 “경찰·노동청·사회복지공무원, 중한 의무 위반… 불법·과실 인정”
“노동청에 조사를 받으러 갔는데, 처음에 갔을 때 조사가 안 된다고…. 두 번째 가서 ‘노임을 안 준다’, ‘돈을 받고 싶다’ 말했지만 조사를 잘 안 해주고 ‘갑갑하다. 가라’고 그랬다.”
지난달 17일 진행된 마지막 변론기일에서 피해자 김아무개(53·지적장애 3급)씨는 재판에 직접 나와 이같이 말했다. 김씨는 2003년 3월부터 2014년 3월까지 11년 동안 임금 한 푼 받지 못하고 전남 완도군 염전에서 노동력을 착취당했다.
2011년 고금파출소 경찰관은 김씨가 5년째 임금을 받지 못하고 있다는 수사첩보 보고를 받고 조사를 벌였다. 하지만 ‘염주에게 양육을 위탁한다. 노임을 청구하지 않겠다’는 김씨 아버지의 각서를 확인한 뒤, 단순 임금체불 사건으로 보아 노동청에 사건을 인계했을 뿐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그 뒤 광주지방고용노동청 목포지청 근로감독관의 조사(그해 7월), 완도군 고금면 사회복지 담당공무원의 조사(이듬해 5월)가 이어졌지만 구호 조치는 없었다. 김씨를 노동 착취에서 구할 기회가 세 차례 있었음에도 국가와 지자체가 김씨를 지속적으로 외면한 사실을 2심 재판부는 지적했다.
재판부는 “피해자들은 인권유린으로 표현할 수 있을 정도로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대접도 받지 못한 채 장기간 강제노동에 시달렸다. 사회적 약자인 정신장애인들은 외딴 섬에서 가혹 행위를 감수하며 대가 없이 장기간 중노동을 감당해야 했다”며 피해자들이 ‘절박하고 중대한 위험상태’에 있었다고 판단했다. 이어 “당시 ‘신안·완도 지역에 정신장애인 강제노동 피해가 적지 않다’는 언론 보도가 줄곧 있었다. 해당 지역 관할 경찰 공무원과 근로감독관, 사회복지 담당 공무원이 각별한 주의와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있었는데 그렇지 않았다”며 배상 이유를 밝혔다.
재판부는 경찰 조사과정, 목포지청 조사과정에서 정신장애가 있는 피해자를 조사할 때 신뢰관계인을 동석하게 하고, 또 가해자와 분리해야 함에도 이를 이행하지 않은 점 또한 지적했다. “법에 따라 ‘장애인 피해자의 특성을 이해하고 그의 눈높이에 맞춰 사건의 실체를 파악하려는 진지한 노력을 다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서울 서초동 대법원 대법정 출입구 위쪽에 법원의 상징인 '정의의 여신상'이 보인다. 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 “지적 장애인에 대한 ‘경제적 학대’ 사건, 국가 실효적 대책 내놔야”
이른바 ‘염전 노예’ 사건과 같은 피해 사례는 장애인 학대 유형 중 가장 흔한 사례로 분류된다. 중앙장애인권익옹호기관이 지난 9월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지적장애인 학대 사례 분석 결과 피해자 10명 중 7명이 지적장애인으로 드러났다. 신체적·정서적·경제적 학대 등 6가지 학대 유형으로 나눠 분석한 결과 피해 장애인들은 ‘경제적 착취’를 가장 많이 당한 것으로 분석됐다. 올해 중앙장애인권익옹호기관이 파악한 경제적 학대 사건 수만 27건에 달한다. 학대 피해자들을 대리한 최정규 변호사 등 대리인단은 정부가 이번 판결을 계기로 지적장애인에 대한 경제적 학대를 막을 수 있는 실효적인 대책을 내놔야 한다고 말했다. 최정규 변호사는 “같은 사건이 매년 반복되고 있다. 2014년 신안군 염전 노예 사건이 대대적으로 문제가 된 뒤에도 경찰이나 검찰, 노동청, 지자체에서 학대 피해 방지를 위한 마땅한 대책을 내놓지 않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어 “학대 가해자에 대한 처벌도 미미해서 법원에서 내리는 형벌이 예방적 기능을 다 하지 못하고 있다. 법원에서 마땅한 양형기준을 마련해야 한다”고 짚었다.
고한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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