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서초동 대법원 대법정 출입구 위쪽에 법원의 상징인 '정의의 여신상'이 보인다. 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21세기 노예’로 불리며 충격을 줬던 전남 신안·완도 ‘염전노예’ 사건에서 항소심 재판부가 1심 판단을 뒤집고 국가배상 책임을 인정했다.
서울중앙지법 민사1부(재판장 윤승은)는 23일 감금·착취 피해자 김아무개(53·지적장애 3급)씨에게 국가와 완도군이 3천만원을, 또 다른 김아무개(53·지적장애 3급)씨와 최아무개(57·경계성 지능장애)씨에게는 국가가 2천만원과 3천만원을 배상하라고 판결했다. 앞서 1심은 국가와 지방자치단체의 지적장애인 보호 의무 책임을 인정하지 않았다.
항소심 재판부는 그러나 “피해자들은 인권유린으로 표현할 수 있을 정도로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대접도 받지 못한 채 장기간 강제노동에 시달렸다. 사회적 약자인 정신장애인들은 외딴 섬에서 가혹 행위를 감수하며 대가 없이 장기간 중노동을 감당해야 했다”며 피해자들이 ‘절박하고 중대한 위험상태’에 있었다고 판단했다. 이어 “당시 ‘신안·완도 지역에 정신장애인 강제노동 피해가 적지 않다’는 언론 보도가 줄곧 있었다. 해당 지역 관할 경찰 공무원과 근로감독관, 사회복지 담당 공무원이 각별한 주의와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있었는데 그렇지 않았다”며 배상 이유를 밝혔다.
피해자를 대리한 최정규 변호사(원곡법률사무소)는 “10년 넘게 몇 십명의 장애인이 노동력 착취를 당했는데 경찰과 사회복지공무원, 근로감독관이 정말 몰랐을까 하는 의문으로 소송을 시작했다. 이번 판결은 국가가 충분히 학대 피해를 알 수 있었음에도 방치했다는 사실을 법원이 인정했다는 의미가 있다”고 설명했다.
지적장애가 있는 피해자들은 신안·완도군 염전에서 길게는 20년 넘게 임금도 제대로 받지 못한 채 감금·구타를 당하며 노동력을 착취당했다. 2014년 1월 피해 장애인 2명이 구출되며 ‘염전노예’ 실태가 알려졌다. 이듬해 11월 피해자 8명이 국가와 지자체를 상대로 소송을 냈지만, 1심은 경찰에 도움을 요청했는데도 불구하고 염전으로 돌려보내진 1명에 대해서만 3천만원을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이날 승소한 피해자 3명은 1심 판단에 불복해 항소했다.
2심에선 ‘염부들을 관리하는 장부가 따로 있었고, 그 장부에 면담 내용을 기록했다’는 경찰관 박아무개씨의 증언이 큰 구실을 했다. 2009~10년 신안군의 한 파출소에서 근무한 박씨는 서면증언에서 ‘새로운 염부가 섬에 들어오면 파출소에서 신고를 받았다’고 했다. 이유는 ‘염전 노동자에 대한 인권침해를 예방하고 염전 주인들에게 경각심을 고취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면담기록부에는 장애 유무와 직계 가족 연락처, 근로계약서 작성 여부, 임금 지급 방법과 액수까지 파악해 기록했다고 한다. 또 이 자료는 전남지방경찰청 내부망에도 등록됐다고 했다. 하지만 국가는 재판 과정에서 ‘보존 연한이 만료됐다’는 이유로 면담기록부가 이미 파기됐다는 답변을 보내왔다.
변호인단은 이번 판결을 계기로 정부가 지적 장애인에 대한 경제적 학대를 막을 수 있는 실효적인 대책을 내놔야 한다고 지적했다.
고한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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