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여성의전화, 토론회 잇따라 열고
가정폭력 경찰 초기 대응 강화 방안 논의
‘가정 유지’ 가정폭력처벌법 목적 조항 수정 요구
그래픽 정희영 기자 heeyoung@hani.co.kr
“경찰에 전화를 걸어서 남편에 대해 ‘임시조치’를 취하겠다고 했는데 수사관이 저한테 화를 냈어요. 지금 가정을 깰 거냐, 유지하지 않을 거냐면서요.” (가정폭력 피해자 ㄱ씨)
“경찰이 한 시간쯤 뒤에 남편하고 이야기를 나누고 오더니 ‘아저씨 불쌍하고 착한 분인데 뭐 이런 일로 경찰을 부르냐, 아줌마가 좀 잘 사시면 되겠구먼’ 이렇게 말했어요. 우리도 바쁘다면서.” (가정폭력 피해자 ㄴ씨)
29일 오후 서울 종로구 광화문 변호사회관에서 열린 ‘위험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경찰의 가정폭력 재범 위험성 조사표’ 토론회에서 공개된 연구 결과의 일부입니다. 한국여성의전화는 ‘재범 위험성 연구팀’을 꾸려 10월15일부터 11월15일까지 한 달 동안 ㄱ씨와 ㄴ씨 등 실제 가정폭력 피해자 3명과 현장 경찰 등을 심층 인터뷰했습니다. 경찰이 가정폭력의 위험을 제대로 감지하고 그 위험으로부터 피해자를 제대로 보호하고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서입니다.
■ 가해자에게 감정이입…해결책임은 피해자에게
ㄱ씨의 남편은 욕설과 무시, 살해와 자살 위협을 일삼았습니다. ㄱ씨를 칼로 위협하고 목을 조르기도 했습니다. ㄴ씨의 남편도 욕설과 무시, 비하를 일삼고 ㄴ씨를 성폭행하거나 정신병으로 몰고 칼로 위협했습니다. ㄱ씨는 3~4번, ㄴ씨는 8번이나 경찰에 남편을 신고했지만 경찰은 번번이 피해자들과 남편을 제대로 분리하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경찰이 겉으로 드러나는 신체적 피해를 보고도 “자해했다”는 남편의 말만 듣고 돌아갔다는 이야기까지 나옵니다. 다음은 ㄴ씨의 이야기입니다.
“제 상처를 본 경찰이 한 명도 없었어요. 여자가 피투성이가 되어서 기절해서 정신조차 차릴 수가 없는데 ‘아프다’고 호소를 해도 ‘어떻게 다치셨습니까’ 묻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어요. 한 명은 가해자 편으로 가서 듣는다 해도 다른 한 사람은 제 이야기를 들어줘야 하는 거 아닌가요. 제 옆에는 아무도 없었어요. 항상.”
문제는 이들의 경험이 결코 예외적이거나 특별하지 않다는 데 있습니다. 연구팀의 일원으로 이날 토론회에 나온 손문숙 한국여성의전화 쉼터 활동가는 “현장에서 만난 피해자들이 경험하는 경찰들은 여전히 가해자에게 감정을 이입하며 가해자를 두둔하고, 사건 해결의 책임을 피해자에게 떠넘기기 일쑤”라고 지적했습니다.
27일 정부가 ‘가정폭력 방지대책’을 발표하면서 그 추진 배경으로 언급한 ‘강서구 주차장 살인사건’만 봐도 그렇습니다. 피해자 이아무개(46)씨와 피의자 김아무개(49)씨 사이에 난 세 자매 가운데 둘째 딸(21)은 2015년 2월 아빠 김씨의 폭력을 보다 못해 직접 경찰에 신고했습니다. 당시 이씨의 얼굴은 “주름이 다 없어질 정도로 퉁퉁 부어 있었다”는 게 둘째 딸의 설명입니다. 그런데 집으로 출동한 경찰은 “다 이해합니다. 어떤 심정인지 공감해요. 우리 서에서 얘기합시다”라며 김씨를 달래 경찰서에 데려갔고, 그마저도 2시간 뒤 김씨를 집에 돌려보냈다고 합니다. 3년여가 지난 지난달 22일 아침, 김씨는 이혼 뒤 자신을 피해 숨어 살던 이씨를 스토킹 끝에 찾아내 흉기로 살해했습니다. (▶관련 기사 :‘강서구 주차장 살인사건’ 딸 인터뷰 “아빠는 우릴 통제했다”)
경찰은 오랜 세월 가정이라는 울타리 속에서 폭력을 감내하던 피해자들이 만나는 ‘최초의 공권력’입니다. 그런 점에서 경찰의 가정폭력 초동 조처 강화는 미룰 수 없는 과제입니다. 하지만 연구에 참여한 김홍미리 여성주의 연구활동가는 “피해자들이 가해자에게 공감하는 경찰에 대해 일관되게 이야기했다”며 “폭력 관계를 끝내고자 하는 피해자의 노력은 죄책감이 되어 돌아왔다”고 지적했습니다. 경찰이 피해자를 되레 가정을 깨려는 사람으로 지목하고 가정 해체의 책임을 폭력의 가해자가 아니라 피해자에게 묻고 있다는 겁니다. 또 다른 가정폭력 피해자 ㄷ씨의 인터뷰 일부도 이를 뒷받침합니다.
“제가 먼저 경찰한테 남편을 ‘형사처벌’을 해달라고 했더니 ‘가정보호로도 가능하신데 이거(형사처벌)로 하시겠느냐’고 다시 물었어요. 올 2월에 (집에) 오셨던 분도 ‘계속 고민해보시라, 꼭 형사처벌 해야겠느냐’고 해서 제가 알게 모르게 죄책감을 느끼게 된 것 같아요.”
더욱 심각한 현실은 피해자들이 처한 ‘위험’이 경찰의 눈에는 잘 포착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이번에 정부가 개선을 약속한 ‘재범 위험성 조사표’를 한 번 볼까요. 경찰은 2011년부터 가정폭력 가해자에 대해 직접 긴급임시조치를 내릴 수 있게 됐는데요. ‘재범 위험성 조사표’는 긴급임시조치 발동 기준을 마련하기 위해 도입됐습니다. 전문가들은 그동안 가정폭력 피해자가 처한 ‘위험’을 파악하고 충분한 조처를 할 수 있는 척도로 이 조사표가 제대로 기능하지도, 활용되지도 않았다고 말합니다. 신체적 폭력만을 강조하는 탓에 가정폭력의 특징인 통제를 목적으로 하는 위협과 추적 등은 조사표상 ‘위험’으로 간주하지도 않는다는 겁니다. ‘지킬 앤드 하이드’처럼 경찰 앞에서만 온순해지는 ‘연기파 가해자’를 걸러내지도 못한다고 합니다.
평가 항목뿐 아니라 실제 현장에서 활용도도 낮습니다. 지난 8월 열흘 동안 가정폭력 출동 사건 재범 위험성 조사표를 모두 조사한 결과를 보면, 작성조차 하지 않은 경우가 약 30~40%에 달했습니다. 올 7월부터 경찰이 가정폭력으로 신고된 모든 사건에 대해 조사표 작성을 의무화했지만 쓰지 않는다고 해서 처벌할 수 있는 규정이 없는 탓입니다.
■ 가정폭력 처벌의 방점은 ‘가정 유지’에 찍혀있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요. 이날 토론회에 나온 전문가들은 ‘가정 유지’라는 현행 가정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가정폭력처벌법)의 목적조항이야말로 경찰의 가정폭력에 대한 낮은 인식과 소극적 대응을 뒷받침하고 있다고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가정폭력처벌법 제1조는 “이 법은 가정폭력 범죄의 형사처벌 절차에 관한 특례를 정하고 가정폭력 범죄를 범한 사람에 대하여 환경의 조성과 성행의 교정을 위한 보호처분을 함으로써 가정폭력 범죄로 파괴된 가정의 평화와 안정을 회복하고 건강한 가정을 가꾸며 피해자와 가족구성원의 인권을 보호함을 목적으로 한다”고 적고 있습니다.
여전히 가정폭력 피해자 보호보다 ‘파괴된 가정의 평화와 안정’에 방점을 찍고 있는 목적조항입니다. 이에 대해 손문숙 활동가는 “가정폭력을 사적이고 경미한 문제로 바라보는 잘못된 인식, 그리고 가정 유지에 대한 맹목적이고 비합리적인 신념을 더욱 공고히 하는 데 기여하고 있다”고 비판했습니다. 경찰이 보다 적극적이고 강력한 의지를 갖고 가정폭력 피해자의 인권을 보장하기 위해서는 이 목적조항부터 개정돼야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국가가 의사라면 가정폭력은 포기되거나 방치된 환자”라는 김홍미리 활동가는 “폭력가정이라 하더라도 지켜야만 하는 가정이라는 인식을 가해자, 경찰, 국가가 공유하고 있다”고 꼬집었습니다.
일선 경찰들의 말도 비슷합니다. 김정혜 한국여성정책연구원 부연구위원은 27일 열린 ‘가정 폭력을 여성인권의 관점에서 해결한다는 것’ 토론회에 나와 경찰 설문조사 결과를 공개했는데요. 일선 경찰들은 소극적 대응을 한 이유로 많은 이들이 ‘적극 개입했다가 가족관계 악화 우려’를 꼽았다고 합니다. 이 밖에도 ‘경찰 개입 없이도 관계 개선 가능’, ‘부부 문제는 가정 내 해결이 우선’을 이유로 꼽아 인식에 큰 문제를 드러냈습니다.
다시 근본적인 질문을 던져보고 싶습니다. 그렇게 한국 사회가 지키고자 하는 ‘가정’이란 무엇일까요. 이 주제로 27일 토론회에 나섰던 김순남 가족구성권연구소 대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정상가족’ 대 ‘위기가족’이라는 정상가족 이데올로기는 가족 내부의 폭력을 은폐시키며, 위기가족에 대한 낙인을 통해서 가정은 (반드시) 유지되어야 하는 사회적인 분위기를 형성합니다. 가정폭력은 가족을 떠나서 삶을 살아낼 수 있는 자립이 가능한 사회와 다양한 형태의 가족들이 평등하게 살아갈 수 있을 때 해결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