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9일 연평도 서남단 언덕에 있는 등대로 어스름이 내리기 시작했다. 등대 저편에 달이 조그맣게 보인다. 연평도/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해가 바다로 떨어지자 하늘에서 달이 나타났다. 어둠이 내리기 시작했으나 등대는 불을 밝히지 않았다. ‘조기’가 켜고 ‘안보’가 끈 등대였다. 조기잡이 어선의 바닷길을 비추며 1960년 3월 처음 빛을 뿌린 연평도등대는 북한 간첩 침투에 이용될 수 있다는 이유로 1974년 7월 소등했다. 연평도 서남단 해발 105m 언덕에 등대가 있다. 등대를 짓다 트럭 전복으로 사망한 노동자와, 조기잡이를 하며 삶을 지탱해온 ‘애기 선장’과, 3대째 등대를 돌보며 살아가는 항로표지관리원 가족과, 북한 포탄에 맞은 남쪽 함정을 내려다보던 주민들의 이야기가 폐쇄된 등대 주위에 흩어져 있다. 연평해전 중 사망한 군인들의 얼굴과 폐기된 탱크·전차·헬기가 한데 섞여 등대 불빛 없는 등대공원의 풍경을 이룬다. 남북이 충돌해온 바다에 평화수역을 조성하는 안이 지난 4월 판문점선언과 9월 평양공동선언에 담겼다. 그 기대를 안고 연평도등대 재점등이 추진되고 있다. 등대 상태를 점검한 해양수산부는 지난 19일 노후 페인트를 벗겨내며 내부 보수를 시작(재점등 시기는 미정)했다. <한겨레>는 2018년 마지막 토요판 커버스토리로 연평도등대를 찾았다. 새해 저 등대에 빛이 돌아온다면 얼어 있는 바다와 어민의 삶도 조금은 따뜻해질지 모른다.
빛을 잃은 등대에서 빛을 받은 먼지들이 하얗게 날았다.
낡은 등대 안으로 기운 해의 야윈 빛이 스며들었다. 방진 마스크를 쓴 인부들이 부스럼처럼 일어난 페인트를 긁어냈다. 햇빛 머금은 먼지들이 등대 안을 가득 채우며 떠다녔다. 12월19일 오후 페인트 박리 작업에 들어가며 등대 보수 공사가 시작됐다.
김광식(가명·48)이 등명기(등대에 불을 밝히는 기계) 아래층의 삭은 칠을 제거했다. 칠 부스러기들이 그의 머리 위로 우수수 떨어졌다.
360도 돌며 빛을 뿜던 등명기는 등 없이 틀만 남아 고정돼 있었다. 등명기를 지탱하는 쇠기둥은 녹이 슬어 부식했고, 등에 전기를 공급하던 선은 싹둑 잘려 한 토막만 붙어 있었다. 붉어지는 햇빛을 받으며 낮은 물결이 바람 없는 등대 언덕으로 느리게 밀려왔다. 등명기 너머 멀리서 소연평도가 아득했다. ‘불알조리개랑’(남자들의 고환이 쪼그라들 정도로 벼랑이 가파르다며 주민들이 부르는 언덕의 별명)에 심긴 등대가 검은 바다로 쏘아주던 하얀빛(백섬광)은 ‘10초 2섬광’(등질, 각 등대는 빛 깜빡임 패턴인 고유의 등질을 가짐)이었다. 10초마다 두번 깜빡이는 것으로 스스로를 다른 등대와 구별 지었다. 빛은 26마일(41.84㎞·광달거리)까지 뻗어나갔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바다에서 빛을 본 배들은 가늠할 수 있었다. 10초 2섬광을 보내는 곳에 연평도(인천시 옹진군)가 있었다.
“30년 만에 올라왔네.”
44년 전 멈춘 연평도등대를 청소하며 김광식이 말했다.
1989년 섬으로 놀러온 누나들에게 열아홉의 그는 등대 꼭대기에서 내려다보이는 바다를 보여주고 싶었다. 누나들과 등명기를 붙들고 바다 너머를 동경했던 그는 나이 오십을 앞두고 보수 공사 일당 노동자로 등대를 밟았다.
불 꺼진 등대(1974년 소등)의 재점등이 추진되고 있었다. 해양수산부는 지난 10월과 11월 두차례 실사를 거쳐 등대 상태를 점검했다. 건물 보수는 인천지방해양수산청이 맡아 12월 초 공사를 발주했다. 외부 도색은 이미 마쳤다.
“페인트 박리 작업을 끝내면 벽에 금이 가거나 파인 곳부터 메우고… 배가 별문제 없이 뜨면….”
김광식 등에게 작업을 지시하며 현장소장이 공사 자재가 섬으로 들어올 날을 계산했다. 접착제로 벽면을 고르게 하고 탄소섬유로 구조를 보강한 뒤 내부 도장은 시작될 것이었다. 건물 보수 공사 마무리까지 일주일에서 보름 정도 걸릴 것으로 그는 예상했다. 박리 작업 직전 못으로 박아뒀던 창문을 열어 묵은 먼지를 빼냈다.
지난 19일 인천지방해양수산청으로부터 보수 용역을 받은 노동자들이 등대 내부의 노후 페인트를 벗겨내고 있다. 사진의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면 등대 상부가 나온다. 연평도/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45년 만의 재점등 추진
“노동자 한명이 죽었지.”
옹진수협 연평출장소 초대 소장 백군식(80)은 기억했다. 그는 1957년 여름부터 해병대 연평부대에서 복무했다. 등대 설치 때 해병대 차량이 골재 운반을 지원했다. 가파른 언덕을 오르던 트럭이 전복됐다. 이름 없는 누군가의 사망 사건으로 백군식은 60여년 전의 등대 공사 시기를 추정(1958년 이후)했다.
북위 37도 39분 0초, 동경 125도 41분 3초.
그 좌표(연평면 연평로 682번길 62)에 연평도등대가 있었다. 해발 105m 언덕에 세워진 9.5m 높이의 하얀색 콘크리트 구조물이었다. 1960년 3월23일 처음 빛을 뿌렸다.
한국의 등대는 제국의 배를 안내하는 불빛에서 시작됐다. 1903년 첫 근대식 등대인 팔미도등대(인천 중구·인천시 유형문화재 제40호)가 팽창하는 일본 제국주의의 바닷길을 밝혔다. 일제가 만든 등대는 주로 원통형이었으나 연평도등대는 사각형을 3단으로 쌓았다. 철제 사다리를 밟고 1층부터 8계단, 7계단, 4계단을 오르면 닿는 꼭대기에 등명기를 달았다. 보는 위치에 따라서 언덕의 바위와 소나무 뒤로 등대가 숨었다. 항해하는 선박들은 등대를 기준으로 각도 235도에서 326도, 343도에서 161도 사이에서 등대를 확인할 수 있었다.
전국에서 현재 5340개(2086개는 사설)의 항로표지(등대 등 광파표지+형상표지+음파표지+전파표지)가 운영되고 있었다. 등대 1122개(유·무인등대 323개+방파제등대 799개) 중 유인등대는 38개(모두 국유)뿐이었다. 선박 통항이 빈번한 항로의 갈림길이나 암초가 많은 바다 주변에 사람이 거주하는 유인등대를 세웠다. 연평도등대는 유인등대였다.
연평 바다는 민물과 해수가 만나는 어장이었다. 한강과 예성강, 임진강 등을 따라온 강물이 바다와 합쳐지며 조기(1454년 완간된 <세종실록지리지> 등 여러 문헌이 연평도 조기 언급)의 산란을 불렀다. 산란기가 되면 꾸우욱 꾸우욱 하는 조기 울음소리가 바다에 가득 퍼졌다. 연평도 주위엔 암초섬(꾸지도)과 무인도도 많았다. 바닷길을 헤치며 몰려드는 조기잡이 어선들의 안전을 지키는 책임이 연평도등대에 주어졌다. 등대는 어민들의 숙원이었다.
1939년 7월 황해도 해주번영회(광복 전 연평도는 황해도 소속)는 연평도에 등대를 설치해줄 것을 조선총독부에 진정했다. 1959년 4월 해무청은 연평도 조기잡이 어선들의 길안내와 안전을 목적으로 등대 설치 계획을 발표했다.
“조기를 담뿍 잡아 기폭을 올리고, 온다던 그 배는 어이하여 아니 오나, 수평선 바라보며 그 이름 부르면, 갈매기도 우는구나 눈물의 연평도.”(작사 김남풍·작곡 김부해)
등대공원(연평도등대를 중심으로 조성된 공원) 입구에 세워진 바위에서 노랫말이 울고 있었다. 설치 계획 발표 다섯달 뒤 태풍 ‘사라’(전국 이재민 37만3천명·849명 사망)가 한반도를 때렸다. 바다도 무사하지 못했다. 연평도 어선들이 부서지고 많은 어민이 죽었다. 1964년 가수 최숙자가 그 슬픔을 노래했다.
“사는 맛은 조기잡이 때가 좋았네.”
노창식(78)이 ‘눈물의 연평도’를 부르며 조기를 잡던 때를 떠올렸다. 전쟁 직후 국민학교만 마친 그는 십대 중반부터 조기잡이 배를 탔다. 레이더도 지피에스(GPS·위성항법장치)도 에이아이에스(AIS·선박자동식별장치)도 없던 시절이었다. 그는 가까이는 강화도(인천)로, 멀리는 어청도(전북 군산)와 홍도·흑산도(전남 신안)로 오르내리며 “낮에는 산을 보고 밤에는 등대 불빛을 보며 연평도 위치를 파악”했다. 스물을 갓 넘긴 나이에 그는 고용 선장이 됐다. 연평도 최연소 선장이라며 이웃들은 그를 ‘애기 선장’이라고 불렀다. 그는 마흔이 돼서야 3t짜리 통통배를 살 수 있었다. “배를 샀는데도 살림이 나아지지 않아” 15년 전쯤 팔아 없앴다. 아내를 먼저 떠나보낸 그는 과거 자신의 배로 빛을 보내주던 등대 주위에서 공공근로로 풀을 뽑는다.
1960년대 말 어로한계선 남하로 조기 어장이 폐쇄되기 전까지 연평도 해안은 수천척의 배가 몰려드는 조기 파시로 흥성했다. 지난 20일 연평도 선착장 대합실에 걸린 1967년 5월 사진(미영사 촬영)에 당시 파시의 모습이 남아 있다. 연평도/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조기잡이 어선을 비추며
“저 앞에서 배들이 개미처럼 바글바글했는데 말이지.”
수천척의 배가 집 앞에 정박했던 ‘그때’를 노창식은 잊지 못했다. 그의 집이 지어진 땅은 본래 물이 들어찬 해안이었다. 전국 각지와 일본, 대만에서 온 배들(1943년 <매일신보> “5천척”)이 바다를 빽빽하게 채웠던 ‘조기 파시’가 1960년대 말까지 그 해안에서 열렸다.
4월 말부터 5월 말까지 조기 파시가 서면 바다로 나간 작은 운반선들이 조업 중인 배에서 조기를 사 해안으로 실어 날랐다. 수천명의 선원이 조기잡이에 매달릴 때 파시에선 그들이 먹을 식량과 물, 배를 움직일 기름 등을 거래했다. 외지 상인들이 파시에 맞춰 들어와 판을 벌였고, 술집과 식당과 숙박시설이 넘쳐났다. “아침에 바닷가에 나가면 돈을 물고 다니는 개들”(백군식)이 눈에 띄었다. “공중화장실이 없을 때 미처 종이를 준비하지 못한 사람들이 해안에서 볼일을 보고 지폐로 뒤처리를 했을 만큼” 돈이 돌았다. 그 돈을 개의 입에서 봤다는 목격담이 “연평도가 가장 흥했던 날들”을 떠올릴 때마다 회자됐다.
매몰돼 육지가 된 노창식의 집 앞으로 2010년 11월23일 북에서 날아온 포탄들(군인·민간인 4명 사망)이 떨어졌다. 그의 집 주위 빨간 벽돌 건물들은 그날 포탄을 맞고 부서진 뒤 다시 지은 집들이었다.
남북이 맞닿은 바다였다. 연평도 북서쪽 끝에서 북한 강령군 남단까지 최단거리는 10㎞밖에 되지 않았다. 남쪽의 서해 북방한계선(NLL)과 북쪽이 주장하는 경비계선이 어긋나면서 바다를 두고 남과 북이 충돌했다. 그 바다를 지켜보며 분단을 비춰온 등대는 설치 이후 60여년 동안 남북 대치의 최전방에서 바람을 맞아왔다. 1999년 6월15일(제1차 연평해전, 2차 해전은 2002년 6월29일) 함포 소리에 놀라 등대공원으로 올라간 주민들은 바다 저편에서 북의 공격을 받고 연기를 올리는 남한 함정을 목격했다.
남북이 맞닿은 연평도 바다에는 충돌과 교전의 긴장이 상존한다. 연평도 함상공원에 전시돼 있는 참수리호의 함포. 연평도/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어로한계선이 수차례 남하를 거치면서 ‘연평도 조기’도 기억 속의 옛말이 됐다. 1960년대 말부터 조기 어장에 진입할 수 없게 됐다. 그 많던 어선이 연평도를 찾지 않았고 파시도 사라졌다. 연평도 어민들은 조기 대신 “조기 그물에 걸려도 내다 버렸던 꽃게”(백군식) 등을 잡아 생계를 꾸렸다.
“저기가 예전엔 안 저랬는데.”
박태원(58·서해5도평화수역운동본부 상임대표·전 연평도 어촌계장)이 등대 맞은편 산을 가리켰다. 2010년 포격 당시 북한 포탄이 떨어진 산이었다. 나무가 듬성했다. 등대가 폐쇄된 자리에 불 꺼진 뒤의 남북 충돌이 모여 있었다. “그날 포격으로 나무들이 죄다 불타버린 민둥산”이 연평도를 살찌웠던 조기(조기역사관)와, 교전 중 사망한 군인들의 얼굴과, 폐기된 탱크·전차·헬기와 한데 섞여 등대 불빛 없는 등대공원의 풍경을 이루고 있었다.
민둥산에서 시선을 끌어당긴 박태원이 등대로 오르는 계단 아래(등대공원) 미끄럼틀과 운동기구들에 눈길을 줬다. 등대원(현 항로표지관리원) 가족들이 살던 관사들을 허물고 지은 것들이었다.
박태원은 등대를 흑백텔레비전으로 추억했다. 텔레비전을 가진 집이 드물던 1970년대 초 프로레슬링을 중계하는 날이면 동네 사람들이 가파른 언덕을 올라 등대 관사에 모였다. 일본식 다다미방에 하얀색을 칠한 관사는 네가구가 살도록 분리돼 있었다. 1970년대 초엔 송씨, 성씨, 백씨, 세 가족이 살았다. 성씨네 아들은 박태원과 동갑이었다. 그는 등대 뒤에서 뱀에 물려 사흘을 앓다 사망했다.
백씨네가 등대장 가족이었다. 박태원과 동갑인 누나와 한살 어린 남동생이 있었다. 남매의 아버지 백봉규(1986년 작고)는 대를 이은 등대원이었다. 할아버지 백도수(1972년 작고)는 옹진군이 황해도에 속했던 1929년 태어나 일제 강점기에 소청도에서 잔심부름(당시 등대원 대부분은 일본인)을 하며 등대 일을 도왔다. 광복 뒤 정식 등대원이 된 그는 팔미도등대에서 일하다 한국전쟁을 만났다. 1950년 9월14일 미군이 찾아와 바다를 비춰달라고 요구했다. 연료가 없어 백도수와 아들들은 아카시아나무로 불을 밝히며 등명기를 돌렸다. 그 불빛을 보며 이튿날 새벽 유엔군의 인천상륙작전이 단행(한국 등대역사가 전하는 유명한 일화)됐다.
그날 백도수를 곁에서 도왔던 아들 백봉규(1977년 5·16민족상 수상)도 서해 5도(백령도·대청도·소청도·연평도·우도)와 무인도 등을 옮겨 다니며 등대를 돌봤다. 1971년까지 연평도등대에서 근무한 그는 그해 가족들을 데리고 소청도등대장으로 전근했다. 박태원 등과 어른들 틈에 끼어 ‘박치기왕 김일’을 응원했던 손자 백원경(57·평택지방해양수산청 항로표지과·2011년 옥조근정훈장)도 3대째 등대원이 됐다. “가족과 떨어져 살아 외롭고, 아플 때 병원 못 가 더 아프고, 먹는 게 제대로 조달 안 돼 잘 못 먹는 등대원의 삶”을 이어받은 그는 “세 사람 근무 기간을 합치면 100년쯤 되는 일”을 가업처럼 계속하고 있다.
보이지 않는 철책이 가로막은 바다
남 NLL-북 경비계선 어긋나며 충돌
조기어장도 60년대 말 출입 통제
남북 금지 구역에서 중국 어선만 조업
남북관계 따라 점등 추진·중단 반복
올해 판문점선언과 평양선언 이후
평화수역 논의 맞춰 재점등 조율
해주항로 열리면 등대 앞 꼭 지나야
박태원 서해5도평화수역운동본부 상임대표(전 연평도 어촌계장)가 지난 20일 연평도 앞바다에 띄운 배 위에서 등대가 놓인 언덕을 가리키고 있다. 연평도/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바다에서 바라본 연평도등대가 섬의 서남단 언덕 위에서 소나무들에 가려져 있다. 연평도/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북한의 역이용’ 이유로 폐쇄
“대간첩대책본부의 요청에 의거….”
1974년 6월께 전남 보성군 식산과가 관내 어업협동조합에 공문을 발신했다. ‘연평도등대 소등’이란 제목을 붙여 연평도로 올라가는 어선들이 참고하도록 했다.
“…수로국(현 국립해양조사원)에서는 서해 대연평도에 위치한 연평도 유인등대를 74년 7월1일을 기하여 소등·폐쇄코자 한다는 통보가 있어 통지하니 업무 수행에 만전을 기하시기 바랍니다.”
조기가 밝힌 등대를 안보가 껐다. 조기잡이 어선 보호를 목적으로 켜진 등대 불빛이 ‘북한의 역이용’ 우려를 이유로 점등 14년 만에 꺼졌다. “당시 남쪽으로 귀순한 북한인이 연평도등대 불빛을 따라왔다고 진술하면서 간첩 침투용으로 활용될 수 있다는 판단에 따라 당국이 소등 조처”(해수부)한 것으로 관계부처에 전해졌다. 등대 소등 사실은 열흘 뒤 관보에 고시(1974년 7월10일 교통부고시 제40호)됐다.
눈앞의 일을 예견하지 못한 등대는 소등 42일을 앞두고 등질을 변경했다. 10초에 두번 깜빡였던 등대 불빛이 1974년 5월20일 15초에 한번 점멸하는 백섬광으로 바뀌었다. 촉광(광도 단위)은 4천cd에서 12만cd로 향상됐다.
연평도등대가 ‘무신호’(霧信號·fog signal·소리로 보내는 주의) 운영을 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소등 소식과 병기됐다. 등대원에겐 “폭풍우보다 안개 낀 바다가 곤란”(백원경)했다. 폭풍이 닥쳤을 때 등대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지만 갑자기 안개가 끼면 시야를 잃은 배들을 지켜야 했다. 안개가 심한 날 연평도등대는 뿌우우우우 소리 신호를 보냈다. 희뿌연 바다를 향해 ‘에어사이렌’을 불었다. 등대에 달린 나팔이 3초 불고, 3초 쉬고, 3초 불고, 41초 쉬었다. 이어지고 끊기며 50초를 구성하는 무신호를 두차례 반복했다. 빛을 확인할 수 없는 바다를 향해 다급한 ‘3·3·3·41×2’를 발신하는 그곳에 연평도가 있었다.
“준전시하에 있는 우리와 같은 특수상황에서 학생 데모 등 집단행동으로 주장을 관철하려는 의식은 경제를 비롯한 사회 모든 분야의 안정과 발전을 저해한다.”
1985년 4월21일 대통령 전두환이 해군인천해역방어사령부(인천 중구)를 방문했다. 전두환은 “백령도·연평도 등 접적해역과 연안을 잇는 안전운항과 어선의 안전조업을 위해 노력하라”고 주문했다. 그는 하루 종일 육군야전사령부와 공군전투비행단 등을 돌았다. “북괴군이 86 아시아경기대회와 88 서울올림픽을 방해하기 위해 대소간에 반드시 군사 책동을 취할 것으로 예측된다”며 철저 대비를 지시했다. 북한은 현실의 위협이었으나 비판 의견을 차단하기 위해 정권이 ‘동원한 위협’이기도 했다. ‘바다를 둘러싼 정치’에 휩쓸리지 않고 연평도등대는 평소처럼 이날 날씨를 ‘등대기상월표’(기상상태를 숫자화한 전문부호 사용)에 적었다.
“평균 전운량 1, 평균 시정 7, 평균 파고 2, 현재 일기 00….”
구름이 조금 있었고, 10㎞ 앞까지 볼 수 있었으며, 파도는 0.1~0.5m 높이로 일었다. 한시간 사이에 구름의 발달은 없었다….
불 꺼진 연평도등대도 무신호만큼은 중단하지 않았다. 재점등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등대원 2명이 남아 시설을 관리했다. 그들이 안개가 오를 때마다 무신호를 틀었다. 날마다 ‘등대기상월표’를 작성(국지적 기상 확인을 위해 기상청이 각 유인등대에 위탁)해 소등 뒤 10여년간 연평도 날씨를 상세히 전했다.
등대는 1987년 4월16일 완전히 폐쇄됐다. 등대원들과 발전기 시설도 철수했다. 폐쇄 뒤 등대의 운명은 정권이 바뀌고 남북관계가 변화할 때마다 출렁였다. 노태우 정부 말기 남북의 ‘화해와 불가침 및 교류·협력에 관한 합의서’(1991년 12월) 교환 4개월 뒤 인천지방해운항만청이 남북직항로 개설과 어로한계선의 북상 조정에 대비해 연평도등대 복구 방침을 발표(1992년 4월6일·미시행)했다. 1997년 3월 인천해항청은 감사원의 ‘불필요한 인원·장비 삭감’ 지적에 따라 등대 건물만 남기고 모두 철거했다. 남쪽 모래운반선들이 황해도 해주항을 오가던 2006년 노무현 정부 때도 연평도등대 재점등이 추진됐지만 군의 반대로 무산됐다. 2012년엔 껍데기만 남은 등대 건물 꼭대기에 북한의 지피에스 교란 전파를 탐지하는 장치가 설치됐다. 지난 4월 판문점선언과 9월 평양공동선언으로 연평도등대는 다시 한번 재점등을 위한 준비에 들어갔다. 전파 탐지 장치도 등대에서 분리돼 최근 다른 장소로 재배치됐다.
보이지 않는 철책
“넘어가지 말라고 여기 선이 그어져 있잖아요.”
박태원이 배를 몰며 조종석에 달린 에이아이에스 화면을 짚었다. 바다엔 그어지지 않는 엔엘엘이 화면에선 파란색 디지털 선으로 선명했다. 당섬선착장을 출발한 그의 배 너머로 크고 작은 경비정들이 월선(越線)을 감시했다. 경계 없는 바다를 가로막은 것은 보이지 않는 철책이었다. ‘넘나들 수 없음’을 선언하는 투명한 선들이 연평도 주위에서 교차했다. 북의 경비계선과 남의 합참통제선·어로한계선이 엔엘엘 아래에서 서로를 압박하며 연평어장을 동쪽으로 밀어붙였다. 등대의 빛줄기가 끊기고 조기 어장이 막힌 뒤 그 빛을 생명줄로 붙들어온 사람들의 길(어로)도 끊겼다. 연평어장은 섬의 서북단과 동북단을 윗변으로 두고 어로한계선을 밑변에 놓은 부채꼴 모양의 764㎢로 제한됐다.
남북 어민들의 입어(入漁)가 통제된 ‘바다의 공터’에서 오성홍기를 매단 중국 어선 한척이 여유롭게 떠 있었다. 공해를 따라 북한 수역으로 들어온 배는 엔엘엘에 아슬아슬하게 붙어 조업했다. 박태원이 바다 저편의 등대 언덕을 등지고 말했다.
“남도 북도 못 가는 저 바다에서 중국 어선만 붙박이처럼 떠나지 않고 고기를 잡아간다고.”
세월호 참사의 책임을 물어 박근혜 정부가 해경 해체를 발표한 날(2014년 5월19일)이었다. ‘알고 왔다’는 듯 중국 어선 수백척이 소청도 쪽으로 밀고 내려왔다. 해군 방송선이 지침을 내렸다.
“긴급상황, 동남방(인천 쪽)으로 피항하라.”
확성기 소리를 들으며 박태원은 “왜 우리가 피해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는 2003년과 2005년 중국 어선 나포를 주도했다. 2015년 6월 어장 침범에 분노한 어민들의 나포 사건 뒤부터 그는 불빛이 없어 영해 표시가 안 된다며 등대 재점등을 요구했다.
남북 어선들이 들어갈 수 없는 바다에서 오성홍기를 매단 중국 어선이 북방한계선에 바짝 붙어 조업하고 있다. 연평도/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지난 5월9일 박태원은 인천시청(남동구) 브리핑룸에 있었다. 서해5도평화수역운동본부 상임대표 자격으로 기자들 앞에 섰다. 어로구역 확대와 조업시간(현재 일출 30분 전~일몰 후 1시간) 연장, 옹진반도 남북 민간교류 추진, 평화수역(4월 판문점선언 ‘엔엘엘 일대를 평화수역으로 만들어 우발적 군사 충돌 방지와 안전한 어로 활동 보장’) 실현을 위한 민관협의체 구성 등을 요구했다.
보수 공사 자체가 등대 재점등을 보장하진 않았다. “재점등 시기를 못박았다는 뜻이 아니라 ‘조건’이 갖춰지면 곧바로 불을 켤 수 있도록 준비 상태를 만들어둔다는 의미”라고 해수부는 설명했다.
섬의 삶은 바다의 표정에 좌우됐다. 남북이 날을 세울 때마다 바다에 주름이 파이고, 바다가 긴장해 얼 때마다 그 바다에 의탁해온 생명들이 가로막힌 바다 앞에서 길을 잃었다. 허리 잘린 정치가 위아래에서 요동칠 때마다 재점등 추진과 무산을 반복해온 시간들이 빛을 잃은 등대에 집약돼 있었다.
“남북관계 기류와 안보 상황, 민관 협의(운동본부와 해수부, 해군, 해경, 인천시, 옹진군 등 참여) 진행 결과에 따라 ‘조건’ 조성 시기가 결정”되겠지만 해수부는 “내년 꽃게 조업이 시작되는 4월 이전에 조업구역 확장 여부 등을 결론짓도록 국방부에 요청해둔 상태”다. 발달한 장비가 배의 길을 인도하는 시대에도 등대의 역할은 여전(백원경 “장비가 고장 났을 때나 장비가 부실한 작은 배들엔 특히”)했다. 금지된 야간조업이 허용되면 연평도등대의 역할도 커질 수밖에 없었다. 남북 교역이 현실화돼 해주항로가 열리면 북쪽으로 향하는 배들도 반드시 연평도등대 앞을 지나야 했다.
해가 서쪽 바다에 잠기자 등대에도 어둠이 내렸다. 까마귀 한마리가 날아와 등명기 위에 앉았다. 하늘에서 돋아난 달이 빛 없는 등명기 안으로 들어가 작은 빛이 됐다. 소등 45년 만인 2019년 다시 빛을 쏜다면 연평도등대는 과거와 달리 무인등대로 복원된다. 610㎜ 엘이디 등을 장착할 등명기는 예전보다 훨씬 밝은 빛을 바다로 보낼 것이다. 10초 2섬광 혹은 15초 1섬광의 하얀 불빛이 연평도민들의 바람을 실어 깜빡일 것이다.
“여기는 연평도, 전쟁 없는 섬.”
연평도/이문영 기자 moon0@hani.co.kr
갓 떠오른 달이 내려다보는 연평도등대의 불 꺼진 등명기 위로 까마귀 한마리가 날아와 앉았다. 연평도/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