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미년 통신〉 서곡 ② 끓어오르는 분노
대대손손 일구던 땅 빼앗고 고리대금 착취…광부들은 고작 일급 1원에 저당잡혀
대대손손 일구던 땅 빼앗고 고리대금 착취…광부들은 고작 일급 1원에 저당잡혀
[1919년 1월2일 경성/엄지원 기자] 조선에 ‘만세’가 일어나기 전 겨울이다. 세계대전이 막 끝나고 휴전조약이 성립되어서 세상은 비로소 번해진 듯싶고 세계개조의 소리가 동양 천지에도 떠들썩한 때이다. 허나 조선은 아직 장막이 드리워진 암흑과 같은 형국이다. 두달 뒤인 기미년(1919) 3월, ‘만세’가 일어나면 청년과 중년은 물론이고 아직 열살을 넘기지 않은 어린아이와 일흔을 넘긴 노인도 뛰쳐나와 “대한독립만세”를 외칠 것이고 자산가와 무산자가 뒤섞여 독립축하식을 열 것이다. 조선반도에서 글깨나 쓰는 이 중에 일제의 압제를 꾸짖는 격문을 쓰지 않는 이가 없을 것이고, 무명천에 태극기 한번 그려보지 않은 이가 없게 될 것이다. 금산 농민 박영규(24), 서울 용산기관차 화부 견습공 차금봉(21), 안성 날품팔이꾼 서순옥(36), 천안 직산금광 광부 박창신(25), 수원 기생조합 기생 김향화(23) 등도 거리로 뛰쳐나와 행렬 맨 앞에서 ‘만세’를 부를 것이다. 그러나 1919년 1월1일, 그들은 아직 자신이 하게 될 일을 모른 채 식민지 백성으로서 먹고사는 일에 속박돼 있다. 조선 각지에서 또다른 박영규·서순옥·박창신·차금봉·김향화를 만나 그들의 ‘만세 전’을 살펴보았다.
◇농촌의 주인은 이미 일본인=전라북도 정읍에서 조상 대대로 농사를 지으며 살았던 농민 ㄱ은 어느 틈엔가 이웃을 대부분 잃게 되었다고 푸념했다. 경술년(1910)부터 일제가 토지조사라는 명목으로 조선 농민의 토지를 몰수한 탓이다. 신고하지 않은 토지는 주인 없는 땅이라 하여 몰수하고, 신고하려 해도 문서가 없으면 대대로 농사지은 토지 점유권을 인정받을 길이 없다. 무주공산에 밭을 일구며 간신히 살아온 화전민들도 ‘삼림 범죄자’가 되어 대대적으로 검거됐다. 이런 토지 측량에 참다못한 농민들이 일본인 측량기수를 때려죽이려 한 일도 왕왕 있었다.
달리 식민지가 아니다. 그렇게 조선 사람들이 농토를 빼앗긴 농촌 마을에선 어딜 가나 일본인이 주인 행세를 한다. ㄱ의 이웃마을 화호리는 그런 이들 중에서도 한층 셈이 빠른 구마모토 리헤이라는 자가 대지주 노릇을 하고 있다. 임인년(1902) 조선에 온 구마모토는 화호리에서도 주민들이 명당이라 여기는 땅을 차지하고 불황 때 닥치는 대로 땅을 사들여 전라북도 최대 지주가 된 것으로 유명하다. 그런 일본인이 한둘이 아니다.
일제는 강제병합 직후부터 내지인(일본인)의 조선행 농업이민을 본격적으로 추진했다. 외양은 한일합작회사지만, 조선 땅을 통째로 집어삼키려는 동양척식회사가 그 일에 앞장섰다. 내지인이 조선으로 이민을 오기만 한다면 여비, 주택, 영농자금을 지원해주는데다 문전옥답만 골라서 챙겨준다 하니 생활 불안에 쫓기는 일본인들 발길이 쇄도한다. 그러니 동양척식회사를 향한 조선인들의 증오는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세브란스 의전의 프랭크 스코필드(석호필) 박사도 “한국 사람들은 동양척식회사를 한국인에게서 토지를 빼앗아 일본인 이주자들에게 돌려주는 거대한 조직체라고 생각하고 있다”며 “동양척식회사의 활동보다 한국인들의 원한을 더 사무치게 한 일도 드물 것”이라고 평가했다.
한국을 찾은 일본인들이 일삼는 것은 고리대금업이다. 형편이 궁한 조선인에게 돈을 빌려주는 대신 약조한 날짜를 넘기면 논을 몰수해가는 식이다. 상환 날짜가 되어 찾아가면 사무실을 잠그고 대응을 안 해놓고 상환일을 어겼다고 우기는 수법이다. 조선식산은행에서 저리로 융자금을 꿔오고선 조선 사람에게 꿔줄 때는 연리 4할4푼(44%)도 우스운 일이라고 한다. 그리하여 자작하던 조선 사람이 소작농으로 전락하면 평균 6할에서 많게는 9할의 소작료율을 일본인 지주에게 지불하며, 피착취민의 처지에 놓이게 되는 것이다. 일할수록 가난해지는 조선 농민들은 먹으려야 밥이 없고 입으려야 옷이 없는 방랑객 신세가 되어 타향을 헤매거나 두만강을 건너고 있다. 무오년(1918) 통감부 통계에 따르면 북간도로 이주한 조선 사람은 24만여명에 이른다.
◇조선인의 노동은 일본인의 반값=도시로 밀려드는 노동자들 역시 참담한 생활난에 시달리는 것은 농민과 다름이 없다. 조선 노동자 실질임금은 9년 전인 1910년을 100으로 칠 때 기미년(1919)엔 67.9에 불과한 수준이다. 12~16시간씩 일하며 수면시간마저 침해당해도 식비마저 보장되지 않는다. 노동자 가운데서도 광부의 처우는 특히 형편없다. 저자에서는 떠돌아다니며 일하는 광부들을 ‘부랑배’ ‘무항산자’(無恒産者) ‘궁민빈사자’라 부르며 손가락질한다. 충청남도 직산 금광에서 일하는 광부 ㄴ은 사람들이 채광부를 어찌 부르는지 잘 알고 있다. 그러나 달리 도리가 있겠는가. 배운 게 도둑질이다. 고향인 평안도에서 소작도 행상도 여의치 않아 흘러흘러 도달한 곳이 광산이었다. 캐도 캐도 나오는 것이 없으면 타 지역 금광을 찾아 떠나는 게 광부 팔자다. 이곳 직산에는 평안도 출신 광부만 2천여명이다.
좁쌀 반 되, 팥 한 홉. 부식으로 손가락만큼의 고추장. 광부 ㄴ의 하루치 끼니다. 예나 지금이나 무산자의 삶은 변함없이 빈궁하나, 조선인 덕대(탄광 현장 책임자) 아래 일하던 십수년 전만 해도 ‘식사’라고 부를 만한 먹거리와 술, 담배를 덕대가 책임졌다고 들었다. 호시탐탐 직산 금광의 ‘노다지’를 노리던 일본이 조선 궁내부와 ‘직산 금광 채굴 합동조약’을 체결해 이곳을 맡고, 병오년(1906) 광업법으로 외국인들에게 금광의 문호를 열어주면서 광산에서의 노동은 더욱 견디기 어려운 것이 됐다. ㄴ은 “민족에 따른 임금차별이야말로 참기 어렵다”고 했다. 목숨을 걸고 하는 일인 점은 모두 같건만, 일본인은 조선인보다 갑절 이상 많은 급여를 받는다. 올해 조선총독부 통계를 보면 광부 일급은 조선인에겐 1원이지만 일본인에겐 2원4전이다.
보호시설이 불비하니 처참한 노동재해도 많다. 조선총독부가 공식 취합한 사고만 헤아려도 광부 1만명 중 한해(1919년) 사상자는 924명이다. 두달 전인 지난해 11월 평북 운산탄광에서도 31살 광부 이재근이 폭발약 사고로 즉사하였다. 바위를 파쇄하고 남은 폭발약이 작업 중 곡괭이에 걸리면서 일어난 참사다. 이런 일이 생길 때면 광부 ㄴ과 동료들은 부실한 끼니 앞에 삼삼오오 모여 일본인들 욕을 반찬 삼는다. 몇 년 전 유럽의 어느 나라에서는 광부들 열에 여섯이 파업에 나서 8시간 노동을 주장했다는 소식을 어느 말많은 이가 전해주었다. 미국의 어느 주에서는 광부 9천명이 1년을 넘도록 파업을 벌이다 군대에 진압됐다는 소식을 ㄴ도 들었다. 그러나 눈 뜨면 채굴하고 쓰러지면 잠드는 세상에서 어떻게 그런 힘이 솟는 것인지, 그로선 아직 알 길이 없다.
“문전옥답 골라준다” 내지인 농업이민 장려 앞장
광산에서는 일본인 반절도 안되는 처우에 처참할 지경
공창제도로 가십 전락한 기녀들…성병검사 치 떨어 ◇“검사를 폐지하여 주오”=일제는 조선의 토지와 노동력만 수탈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조선인의 신체와 풍속마저 그들 손아귀에 두고 압박하고 통제하기 시작한 지 오래다. 기녀들은 이같은 패악을 최전방에서 마주쳐온 이들이다. 비록 신분은 천하나 예술과 학문에 두루 능하여 ‘궁인’(궁녀)에 가까운 삶을 살아온 관기들은 예기와 창기를 도매금으로 넘기는 일제식 공창제도에 치를 떨고 있다. 유교적 전통이 명백한 조선 땅에 유곽을 통한 매매춘을 공공연하게 이식한 것도 일본인들이다. 어느 노기는 “예전 기생이라 하면 첫째는 가무를 보고 둘째는 사람을 보는 것이요 셋째는 얼굴을 보는 것인데 지금 와서는 아주 정반대가 되었지요. 가무를 할 줄 모르면서 지껄이는 것으로 반 벌충을 하지요”(<매일신보>)라고 공개 한탄에 나서기도 했다. 10여년 전 일제는 기생 및 창기 단속령(1908년)을 내려 기생들이 모두 경시청의 인가를 받아 영업하도록 명했다. 인가를 받지 않고 영업했다간 10일 이하 구류 또는 10원 이하 벌금형에 처해진다. 인가받은 조합은 경비 견적서나 결산 보고서 등을 제출하는 것은 물론이고 소속 기생들은 매달 경시청이 지정한 의사에게 건강진단을 받아야 하며, 전염병에 걸린 경우 치료소에 수용된다. 기생의 활동까지 조선총독부가 직접 통제하겠다는 뜻이다. 일본의 신문사는 기생들의 사진과 소개를 얹은 <조선미인보감>까지 내어 기생들을 가십거리로 삼고 있다. 경상남도 김해의 기생 ㄷ은 “기예를 하는 기생들에겐 성병검사야말로 견디기 힘든 치욕”이라고 했다. 작년 1월에는 이같은 김해 기생 일동이 헌병출장소에 나아가 성병검사를 폐지하여 달라고 청원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이들은 “조선은 옛적부터 전래하는 습관으로 남에게 살을 내어 보이는 것은 비상한 치욕이라고 하는데 근래 기생 일동이 검사를 받는 것은 심히 치욕이고 본즉 원컨대 소장의 관대한 처치로 검사를 폐지하여 달라”고 청원하였다. 그러나 식민지 천민 여성의 말을 들어줄 이 없었으니, 이들의 분노가 오는 3월에 이르면 독립만세의 함성으로 터져나오게 되는 것이다.
◆경술년(1910) 본격적인 토지조사사업이 시작되어 조선 농토를 일본인들이 수탈하고 있다. 국사편찬위원회.
◆충청남도 천안 직산금광에서 금과 광석을 캐고 있는 무항산자(無恒産者)들. 평안도 출신이 많다. 독립기념관
광산에서는 일본인 반절도 안되는 처우에 처참할 지경
공창제도로 가십 전락한 기녀들…성병검사 치 떨어 ◇“검사를 폐지하여 주오”=일제는 조선의 토지와 노동력만 수탈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조선인의 신체와 풍속마저 그들 손아귀에 두고 압박하고 통제하기 시작한 지 오래다. 기녀들은 이같은 패악을 최전방에서 마주쳐온 이들이다. 비록 신분은 천하나 예술과 학문에 두루 능하여 ‘궁인’(궁녀)에 가까운 삶을 살아온 관기들은 예기와 창기를 도매금으로 넘기는 일제식 공창제도에 치를 떨고 있다. 유교적 전통이 명백한 조선 땅에 유곽을 통한 매매춘을 공공연하게 이식한 것도 일본인들이다. 어느 노기는 “예전 기생이라 하면 첫째는 가무를 보고 둘째는 사람을 보는 것이요 셋째는 얼굴을 보는 것인데 지금 와서는 아주 정반대가 되었지요. 가무를 할 줄 모르면서 지껄이는 것으로 반 벌충을 하지요”(<매일신보>)라고 공개 한탄에 나서기도 했다. 10여년 전 일제는 기생 및 창기 단속령(1908년)을 내려 기생들이 모두 경시청의 인가를 받아 영업하도록 명했다. 인가를 받지 않고 영업했다간 10일 이하 구류 또는 10원 이하 벌금형에 처해진다. 인가받은 조합은 경비 견적서나 결산 보고서 등을 제출하는 것은 물론이고 소속 기생들은 매달 경시청이 지정한 의사에게 건강진단을 받아야 하며, 전염병에 걸린 경우 치료소에 수용된다. 기생의 활동까지 조선총독부가 직접 통제하겠다는 뜻이다. 일본의 신문사는 기생들의 사진과 소개를 얹은 <조선미인보감>까지 내어 기생들을 가십거리로 삼고 있다. 경상남도 김해의 기생 ㄷ은 “기예를 하는 기생들에겐 성병검사야말로 견디기 힘든 치욕”이라고 했다. 작년 1월에는 이같은 김해 기생 일동이 헌병출장소에 나아가 성병검사를 폐지하여 달라고 청원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이들은 “조선은 옛적부터 전래하는 습관으로 남에게 살을 내어 보이는 것은 비상한 치욕이라고 하는데 근래 기생 일동이 검사를 받는 것은 심히 치욕이고 본즉 원컨대 소장의 관대한 처치로 검사를 폐지하여 달라”고 청원하였다. 그러나 식민지 천민 여성의 말을 들어줄 이 없었으니, 이들의 분노가 오는 3월에 이르면 독립만세의 함성으로 터져나오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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