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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3·1 첫날, 북부지역이 시위 주도한 까닭은?

등록 2019-03-01 07:39수정 2019-03-01 09:30

[3·1 첫날 만세시위 현장]
계엄령 서울 도심서 평화시위
오후 2시 200명 탑골공원 출발
광화문·대한문 행진 수천명으로
3시간 뒤 충무로 조선총독부 집결
헌병대 총검 휘둘러 무력 해산
첫날 시위, 서울과 북부지방 6곳
3·1운동 당시 조선민중들이 덕수궁에서 만세시위를 벌이고 있는 모습.
3·1운동 당시 조선민중들이 덕수궁에서 만세시위를 벌이고 있는 모습.
“서울의 거리는 열광적인 독립만세를 연달아 부르는 군중들로 가득 찼다. 어느 틈에 만들었는지 종이로 만든 태극기의 물결, 대열 앞에는 학생들이 선두에 섰으며, 서울 시민들과 지방에서 올라온 시골 사람들이 이에 호응하였다. 시위 군중들의 맹렬한 기세에 일본 관헌들도 멍청하게 수수방관하고 있었다. 지금의 광화문 세종로 거리인 육조 거리가 콩나물시루같이 인파로 빽빽하였다. 그 속을 인력거를 타고 지나던 일본인 경기도 지사에게 모자를 벗어들고 만세를 부르라고 호통을 치니까 혼비백산한 이자는 시키는 대로 고분고분 만세를 불렀다. 해가 저물어도 만세 소리는 여기저기서 산발적으로 들려왔다. ”(이희승, ‘내가 겪은 3·1운동’)

“백의(白衣)의 청년들이 앞을 다투어 대열에 가담했다. 인파는 광화문 네거리까지 꽉 메웠다. 우리 눈에는 왜놈 하나 보이지 않았다. 모두 만세꾼들이었다. 우리의 발걸음 앞에는 거칠 것이 없었다. ‘왜놈 물러가라’는 함성은 지축을 진동했다. 광화문 네거리에 이르러서 대열은 양분되었다. 한 대열은 경복궁으로 향했다. 그 후에 들은 말이지만 그리로 가서 광화문 앞에서 만세를 부를 때는 순사 한 사람이 순사 모자와 제복을 찢어 던지고 ‘조선독립 만세’를 부르며 시위에 가담하여 대중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다는 것이다.”(정석해, ‘남대문역두의 독립만세’)

한글학자와 당시 연희전문 2학년이었던 한 청년의 회고는 3·1운동 첫날 서울의 상황을 가늠하게 해준다.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 오늘, 서울부터 멀리 원산까지 모두 7개 도시의 민중들이 ‘조선독립만세’를 외치며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일종의 계엄령 상태인 무단통치 하의 서울에서 시위대는 밤늦도록 도심과 외곽을 돌며 만세시위를 벌였다. 3·1운동 연구의 권위자인 김정인 춘천교대(사회과교육과) 교수의 저서(<오늘과 마주한 3·1운동>)를 보면, 3·1운동 첫날 서울 시내 시위대의 구체적 이동 경로를 그려볼 수 있다.

오후 2시 탑골공원에서 200여명으로 출발한 시위대는 동대문과 종로 방향으로 나뉘어 행진했다. 종로 쪽으로 진출한 시위대는 보신각에서 다시 둘로 나뉘었다. 한 갈래 시위대는 남대문통(남대문로)→남대문역(서울역)→의주통(의주로)→이화학당(정동)→미국영사관(정동)→대한문→광화문→조선보병대(정부종합청사)→서대문정(서대문로)→프랑스영사관(서대문)→서소문정(서소문로)→장곡천정(소공로)→본정(충무로)으로 나아갔다.

3·1운동 첫날 서울시위대의 주요 이동경로.
3·1운동 첫날 서울시위대의 주요 이동경로.
다른 한 갈래 시위대는 보신각에서 무교정(무교로)으로 행진한 뒤 대한문→덕수궁 안→미국영사관→대한문을 거쳐 또 다시 둘로 나뉘었다. 그중 한 갈래는 광화문→조선보병대→서대문정→프랑스영사관→서소문정→장곡천정→본정으로 행진했다.

탑골공원을 나와 동대문 방향으로 가던 시위대는 창덕궁 방향으로 꺾은 후 안국정을 거쳐 광화문→서대문정→프랑스영사관으로 행진했다. 이 중 일부는 미국영사관→대한문→장곡천정→본정으로 행진했다. 또 한 무리는 종로통과 동아연초회사를 거쳐 동대문에서 해산했다.

200여명으로 시작한 시위대는 오후 내내 서울 시내를 돌면서 수천 명에 이르게 되었다. 흩어졌다 합쳐지기를 반복한 그들은 오후 4시께 본정인 충무로에 집결했다. 목적지는 남산 자락에 있는 일본 제국주의의 상징, 조선총독부였다. 다급해진 총독부는 조선군사령관에게 군대 파견을 요청했고 조선헌병대는 오후 5시 무렵에 본정 2정목(저동)에 방어선을 치고 시위대를 총검으로 강제 해산했다. 비폭력 평화시위임에도 하세가와 총독은 군대를 동원, 무력으로 진압했다.

서울 시내에서 일어난 시위는 저녁이 되자 교외로 퍼졌다. 저녁 8시께 마포에 있는 전차 종점 부근에서는 전차에서 내린 사람들이 집결하면서 200여명이 시위를 벌였다. 밤 11시께에는 신촌 연희전문학교(연세대) 부근에서 학생 200여명이 만세시위를 벌였고 자정이 넘어서는 종로에서 400여명이 만세시위를 이어갔다.

서울을 빼면 첫날 시위가 일어난 곳은 모두 지금의 북한 지역이었다. 평양·원산·진남포·의주·선천·안주에서 기독교인과 천도교인, 학생들을 주축으로 수만 명이 시위를 벌였다. 평양에선 고종의 죽음을 추모하는 봉도식을 거행한다는 명분 아래 숭덕학교 운동장과 남산형 교회에 4천여명이 집결했다. 봉도식 도중 대형 태극기가 단상에 게양되면서 독립선언식이 열렸다. 선언식 이후 거리로 쏟아져나온 시위대는 평양 시내를 돌며 조선독립만세를 외쳤다. 저녁 무렵 시위대가 평양경찰서를 포위하자 경찰은 공포탄을 쏘며 진압에 나서 충돌이 빚어지기도 했다. 진남포와 선천에선 경찰의 발포로 첫날부터 희생자가 발생하였고 안주에서는 수십명의 시위대가 체포된 주모자를 석방하라며 헌병대 정문 앞에서 농성을 벌였다.

이날 북쪽 지역 6개 도시에서 일어난 만세시위는 다음 날부터 바로 인근 지역으로 퍼졌다. 1일부터 14일까지 2주 동안 전국에서 일어난 276회의 만세시위 중 70%가 북쪽에서 일어났다. 초기 3·1운동을 견인하며 독립운동의 ‘전국화’를 불러온 것은 북쪽이었다. 여기엔 지역적 특성과 정치적 조건이 영향을 끼쳤다. 변방에 대한 지역적·정치적 차별은 천도교와 기독교가 19세기 말부터 북쪽 지역에 뿌리를 내리게 한 배경이 되었다. 철도역이 있는 이들 6개 지역은 선언서 배포와 독립운동 전파에도 용이했다.

3·1운동 당시 조선인들은 독립을 ‘요구’하지 않고 독립을 ‘선언’했다. 일본의 식민지배를 더는 용인할 수 없다는 각성은 조선인 스스로 자유인의 의식을 갖도록 만들었다. 노예의 삶에서 주인의 삶으로의 거대한 전환이었다. 이 땅의 주인은 바로 우리 자신이라는 자유의 외침은, 1919년을 온통 희망으로 들끓게 했다. 9년 동안의 식민지배로 명운이 다한 것처럼 보였던 조선이 3·1운동을 통해 드디어 깨어난 것이다.

오승훈 기자vin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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