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와대·국회·법원행정처 요청으로 재판부 심증이 줄줄 새나가고 재판 일정이 아무렇게나 변경됐다. 이 사람 저 사람 손을 타더니 판결문은 누더기가 됐다. 인신 구속 등 국민 기본권을 제한하는 보루인 영장 재판은 알고 보니 행정처 가이드라인이라는 외부 지침에 의해 이뤄지고 있었다. 법과 법관의 양심은 설 땅을 잃었다.
상황이 이런데도 사법시스템을 뜯어보고, 입법 등 제도 개선에 관심을 갖는 움직임은 좀처럼 찾아보기 어렵다. 특히 야권과 보수 언론의 관심은 오로지 ‘성창호 부장판사’에만 집중된 듯하다. 지난달 말 성 부장판사가 김경수 경남지사를 법정구속해서, 정권이 검찰을 이용해 정치적인 보복을 한 것 아니냐는 주장도 나온다.
거창하고 선정적인데, 어느 대목 하나 시원한 근거는 못 댄다. 지난해 9월에 이미 피의자 조서를 받았는데 성 부장판사가 김 지사를 법정구속한 걸 검찰이 과거로 되돌아가 보복했다는 소리인지 기본적인 논리도 안 맞는다. 검찰이 피해자로 규정했던 성 부장판사를 피의자로 둔갑시켰다는 말도 공소장만 한번 제대로 읽어봐도 할 수 없는 주장이다.
검찰의 막강한 기소 재량 및 독점 권한을 견제하려 했다고 선의로 보려 해도 본말이 전도됐다는 느낌은 지울 수 없다. 성 부장판사는 신광렬 수석부장판사나 행정처가 시키는 대로 했기 때문에 혐의가 약하다는 말인지, 영장판사가 수사기밀을 외부로 유출한 것은 봐줄 만하다는 것인지, 그렇게 유출된 자료가 악용돼 증인 회유 사태까지 벌어졌지만 그 정도 일은 괜찮다는 건지 “보복이다”라는 주장의 속뜻이 궁금하다.
입장을 바꿔보면 이 일이 왜 시급하게 다뤄져야 할 일인지를 알 수 있다. 내가 당사자나 피해자인 사건에서 저렇게 재판 외적인 요인을 우선하는 영장판사를 만났다. 그래도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대중적인 지지는 못 받더라도, 옛 통합진보당 의원들이나 일본인 카토 다쓰야(산케이 서울지국장)도 공정하게 재판받을 권리가 있다. 뭐가 문제였을까. 사법부 시스템의 문제였을까. 양승태 전 대법원장 등 일부 사법부 수뇌부의 일탈 때문에 벌어진 일일까. 어제도 오늘도 재판은 계속되고 있다. 법·제도에 문제점은 없는지 찾아내고 고치고 국민을 안심시키는 것이 국회가 해야 할 본연의 일 아닐까.
정치적 이해득실만 따지고 이번 사태의 발생 원인은 외면한다면 자유한국당이 아니라 그 누구라도 사법농단의 피해자가 될 수 있다.
김양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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