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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주심판사는 ‘들러리’, 수석부장은 판결문 ‘빨간펜’, 법원장은 행정처와 ‘한몸’

등록 2019-03-09 04:59수정 2019-03-09 07:56

사법농단 공소장으로 본 법원의 속살
사법농단 사태와 관련해 지난 5일 재판에 넘겨진 전·현직 법관 10명이 받는 혐의들을 보면 법원의 일그러진 속살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고참 판사(재판장)가 후배 판사(배석)들을 찍어눌렀고, 수석부장판사는 다른 재판부 판결문 내용까지 일일이 수정하라고 지시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법원장들까지 법원행정처의 심부름꾼 역할을 충실히 해냈다.

직권남용 및 공무상 비밀누설 혐의로 기소된 방창현 부장판사의 경우를 보면 합의제 재판의 씁쓸한 뒷면을 엿볼 수 있다. 합의부 재판은 판사 3명이 대등한 관계에서 토론해 신중한 결론을 끌어내는 제도다. 하지만 방 부장판사가 2015년 맡고 있던 전주지법 재판부는 전혀 딴판이었다.

■합의는 무슨? 부장판사 마음대로 주심은 ‘들러리’

옛 통합진보당 지방의회 의원 행정소송에서 방 부장판사는 주심인 임경옥 판사나 배석인 강인혜 판사와 상의도 없이 “국정감사 기간을 피해달라”는 법원행정처 요청에 따라 선고기일을 미루는가(2015년 9→11월) 하면, 자기 방 실무관에게 타이핑을 치도록 해 판결 이유 등을 포함한 판결문을 작성(11월25일)했다. 당시 헌법재판소와 대립각을 세우고 있던 행정처 심경 심의관의 요청에 따라 ‘삼권분립의 원칙상 위헌 정당해산 결정으로 해산된 정당 소속 비례대표 국회의원 및 비례대표 지방의회 의원의 퇴직 여부를 판단할 권한은 법원에 있다’는 구절을 끼워 넣었다. 임 판사의 초안에는 없던 내용이었다.

방 부장판사는 판결문을 행정처로 보내 검토를 받았고 판결문에서 ‘비례대표 국회의원’ 부분을 빼달라는 요청을 받자 또다시 판결문을 수정하는 등 두 차례 더 판결문을 뜯어 고쳤다.(11월26일) 배석판사 두 사람이 전자서명까지 마친 상태였고, 판결문은 누더기 신세였지만 ‘선배 판사’의 전횡에 후배들은 토도 달지 못했다고 한다.

■형사수석부장, 다른 재판부 판결문에 구술서까지 ‘첨삭’

지방법원 ‘최고참’인 수석부장판사의 ‘숨은 역할’도 공소장에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다. 재판부를 지휘하는 가하면, 판결문이나 구술서까지 고쳐주기도 했다고 한다. 모두 헌법과 법률 위반이다. 임성근 전 서울중앙지법 수석부장판사의 경우 가토 타쓰야 산케이 서울지국장의 명예훼손 사건 등 3번 재판에 개입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 그는 2015년 3월 임종헌 당시 행정처 기획조정실장으로부터 “판결 선고 전이라도 기사의 허위성을 분명히 밝혀달라”는 부탁을 받자, 이 사건 재판장인 이동근 부장판사를 사무실로 불러 “행정처 요구를 반영해 달라”고 지시했다. 그러자 이 부장판사는 같은 해 3월30일 제4회 공판기일에 법정에서 느닷없이 “카토 타쓰야가 기재한 소문의 내용은 허위인 점이 증명되었다”고 밝혔다.

같은 해 11월 선고를 앞두고 임 수석부장판사는 이 부장판사에게 선고 때 판결문 외에 판결 이유 요약 및 카토 타쓰야의 행위에 대한 평가 등을 고지하고 “그 내용을 자신에게 사전 검토받으라”고 지시하기도 했다. 그는 특히, 구술서 내용 중 ‘피해자 박근혜는 공인이어서 명예훼손 자체가 성립하지 않는다’는 표현을 ‘대통령 명예가 훼손된 것은 사실이지만 법리적인 이유로 무죄를 선고한다’고 바꾸는 등 ‘빨간펜’ 역할도 했다.

■“판결문 수정해 주는 게 수석부장 ‘본업’이냐”

그해 12월17일 선고 당시 카토 타쓰야는 기립한 상태로 3시간 동안 판결 선고를 들어야 했다. 이 역시 ‘행정처→임성근→이동근’의 지휘에 따른 조치였다고 한다. 이 부장판사는 이듬해인 2016년 2월 대전고법 고등부장(차관급 예우)으로 승진했다.

임 수석부장판사는 민변 변호사 체포치상 사건에서도 최창영 부장판사에게 이미 등록 판결문을 물려서 수정하도록 지시했다. 최 부장판사가 당시 ‘서울 남대문경찰서의 직무집행도 적법한 것으로 볼 수 없다’고 쓴 표현을 문제 삼아 이를 빼도록 지시했고, 2015년 8월20일 오후 3시30분 등록된 판결문은 수정 작업을 거쳐 2시간 뒤 재등록됐다. 최 부장판사도 2년 뒤 고등부장급으로 승진했다. 이밖에도 임창용·오승환 도박 사건 재판에서 김윤석 판사의 공판절차회부 결정을 약식기소로 결정을 바꾸도록 지시하기도 했다.

임성근의 후임인 신광렬 형사수석부장판사 역시 ‘정운호 게이트’ 때 행정처 요청에 따라 독립된 단독 재판부인 조의연·성창호 영장전담판사와 공모해 법관 관련 영장을 기각하게 하고 검찰 수사 기밀을 빼 오도록 지시했다. “재판 독립을 침해하고 판결문을 수정하는 게 수석부장판사 ‘본업’아니냐”는 지적도 나온다.

■법원장이 앞장서서 행정처 하달 미션 ‘클리어’

법원 내 ‘원로그룹’인 법원장들도 행정처와 한 몸처럼 기민하게 움직인 것으로 나타났다. 2015년 12월 심상철 전 서울고등법원장의 경우 행정처 관계자로부터 ‘통진당 국회의원 관련 소송을 김광태 재판장에게 배당되게 해달라’는 요청을 받고 손수 배당조작에 나섰다.

공정한 배당은 공정한 재판의 기본 요건이라 법원이 예규 등으로 엄격하게 그 기준을 정하고 있다. 2009년 3월 신형철 전 대법관이 서울중앙지법원장 재직 때 미국산 쇠고기 수입반대 촛불집회 관련 형사재판을 지정배당해 논란이 된 이후 그 기준을 더욱 엄격하게 관리되고 있다는 것이 그간 법원의 설명이었다.

하지만 심 고법원장은 최아무개 행정과장을 불러 “통진당 사건에 대한 사건번호를 미리 하나 잡아 보라”고 지시하고 최 과장은 오아무개 담당자에게 지시 사건을 김광태 재판장에게 배당되도록 했다.

이태종 전 서울서부지법원장은 영장 단계에서 수사기밀을 빼돌리기도 했다. 2016년 9월 ‘정운호 게이트’ 사건으로 김수천 부장판사가 뇌물수수 혐의로 구속된 뒤 전국 법원장 회의에서 행정처로부터 ‘아무리 사소한 일이라도 행정처와 적극적으로 정보를 공유하고 대책을 마련해 달라’는 방안을 전달받고 이에 따랐다. 그는 검찰이 뒷돈을 받은 혐의로 서울서부지법 소속 집행관사무소 사무원들에 대한 계좌추적 영장을 청구한 사실을 알게 되자 임종헌 당시 행정처 차장에게 보고했고, 기획법관 나상훈 판사에게 수사기밀을 수집할 것을 지시해 이를 행정처에 보고했다. 검찰 한 관계자는 “구속·압수수색은 국민의 기본권을 제한하는 조치라 영장재판이 최후 보루가 돼 줘야 하는데, 이런 식으로 기밀이 유출된다는 건 상상도 못 할 일”이라고 말했다.

특히 이 과정에서 윤아무개 총무과장이 일부 피의자들의 체포영장 청구 사실을 집행관사무소 쪽에 알려 당사자들이 도주하는 일까지 발생했다. 법원장이 재판 독립을 지키는 방패막이 역할을 포기하자 연쇄적으로 발생한 일이다. 김양진 기자 ky0295@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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