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용산구 이태원동 경리단길이 젠트리피케이션으로 상가들이 문을 닫고 떠나 쇠락하고 있다. 지난 2일 경리단길에 위치한 한 건물에 붙은 ‘임대 문의’ 푯말. 유리벽에 사람은 드물고 공사 차량만 분주한 경리단길이 비춰지고 있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 최근 친구들과 경리단길을 찾았다. 맛있는 음식을 먹고, 즐겁게 수다를 떨었던 기억이 가득했던 그 음식점에 다시 찾아갔다. 굳게 닫힌 문에 ‘임대’라는 종이만 붙어있었다. 골목을 돌아다녀보니, 문을 연 곳보다 닫은 곳이 많아 보였다. 추억이 가득했던 경리단길, 좋은 기억으로 남은 음식점이었는데, 작별인사도 하지 못한 채 떠나보내야 했다. 또 젠트리피케이션 때문이다.
서울 용산구 이태원동에 있는 이른바 ‘경리단길’의 오르막길을 따라 올라가 계단을 지나면 ‘한국술집 안씨 막걸리’라는 가게가 나온다. 이곳은 가장 가까운 지하철역인 녹사평역에서 걸어서 20분이나 걸리는 곳이지만, 주중과 주말을 가리지 않고 만석이다. 지난해부터 부쩍 두드러지는 경리단길의 ‘쇠락’에도 꿋꿋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하지만 안씨 막걸리마저 조만간 경리단길에서 쫓겨날 위기에 처해있다. 감당할 수 없게 오르는 임대료 때문이다. 안씨 막걸리의 이야기를 들여다보면 경리단길의 몰락을 불러온 젠트리피케이션(본래 낙후됐던 지역에 번성하게 되면, 임대료가 올라 원래 살던 주민이나 가게들이 쫓겨나는 현상)이 어떤 식으로 자영업자와 지역주민들을 옥죄는지 생생하게 보인다.
무너진 ‘100년 가게’의 꿈
경리단길은 서울 용산구 국군재정관리단 정문으로부터 그랜드하얏트 호텔 방향으로 이어지는 길과 주변 골목길을 통칭한다. 과거 육군중앙경리단이 현 위치에 있어 경리단길이라 불려왔다. 국군재정관리단의 담벼락엔 ‘경리단길은 저마다 개성이 넘치는 식당과 카페의 다양하고 독특한 먹거리가 유명한 문화와 젊음의 공간이다. 또한 서울의 평범한 동네 같으면서도 세계 각국에서 온 외국인이 주민들과 자연스럽게 어울려 지내는 모습이 이국적이고 색다른 분위기를 자아낸다’는 내용의 설명문이 붙어있다. 경리단길은 2010년대 초반부터 뜨기 시작해 2015년~2016년께 절정기를 맞았다.
그러나 지난 2일 찾아간 경리단길의 모습을 보면, 문화와 젊음의 공간이라기 보단 ‘텅 빈 골목’이라는 표현이 더 어울릴 듯했다. 한 집 건너 한집 꼴로 ‘임대’ 푯말이 붙어있었고, 사람보다 공사 차량이 더 분주하게 드나들었다. 심지어 경리단길 초입에 위치한 한 건물엔 1층에 입점한 8개의 가게가 모두 폐점 상태였다.
경리단길은 ‘망리단길’(망원동), ‘연리단길’(연남동), ‘송리단길’(송파동) 등 소위 ‘뜨는’ 상권을 일컫는 명칭인 ‘○리단길’의 원조다. 서울 뿐 아니라 부산 해운대의 ‘해리단길’, 경주 ‘황리단길’, 광주 동명동 ‘동리단길’, 전북 전주 ‘객리단길’ 등 전국적으로 ○리단길이라는 명칭이 붙은 상권만 약 20개에 이른다. 그러나 정작 원조인 경리단길의 상권은 무너지고 있는 것이다.
안씨막걸리의 대표 안상현씨는 2013년 12월, ‘한국 술 전문점’을 만들어 한국 고유의 술을 제대로 알리겠다는 포부를 갖고 경리단길에 술집을 열었다. 개업후 첫 3년은 월 매출 1000만원을 겨우 찍었지만 점점 입소문을 타면서 지금은 월 매출액이 5000만∼6000만원이 이른다. 다양한 한국 술을 소개해주는데다, 음식도 맛있어 식당가이드북 <미쉐린 가이드 서울>, <블루리본 서베이> 등에도 소개됐고 외국인들도 찾아오는 가게가 됐다.
안씨는 5년동안 경리단길의 흥망성쇠를 생생히 경험했다. 안씨막걸리는 경리단길 중에서도 보석길로 불리는 골목 안에 위치하고 있다. 개업 당시엔 예닐곱명 정도의 사업자 밖에 없던 300m 길이의 골목이 2015년엔 서른개가 넘는 신규 매장이 생길 정도로 흥했다. 그러나 이제는 2년 넘게 공실인 매장이 수두룩하다.
안씨는 처음에 1억5000만원 전세로 3년 계약을 했다. 입주 1년만에 건물주는 전세보증금을 10%로 올려달라고 했다. 안씨는 건물주의 요구대로 전세보증금을 1억6500만원으로 올려줬다. 또 1년이 지나자 이번에는 전세보증금(1억6500만원)은 그대로 두고 월세를 300만원 추가로 달라고 했다. 안씨가 거부하자 건물주는 상가임대차보호법상 임차료 인상률 상한이었던 연 9%(현재는 5%로 개정)의 인상률을 적용해 임차료를 올리겠다며 그 인상분을 월세로 달라고 했다. 건물주의 요구는 모두 계약 위반이었지만, 당시 끝없이 치솟던 경리단길의 인기를 믿고 어이없는 요구들을 한 것이다. 이 과정에서 건물주는 안씨에게 두번이나 소송을 걸었지만, 모두 안씨가 승소했다.
결국 지난해 12월, 상가임대차보호법의 보호를 받을 수 있는 기간인 5년이 지났다. 건물주는 당장 보증금 5000만원에 월세 300만원을 요구해왔다. 이는 시세의 3배에 가까운 금액이었다. 지난 2일 경리단길의 한 부동산에서 만난 부동산 중개업자는 “지난해 9월 기준 메인 거리 1층 상가 임대료는 전용면적 3.3㎡(1평)당 보증금 3000~4000만원에 월세 250~300만원 수준이었으나 최근엔 월 200만원까지 떨어졌다”며 “안씨막걸리가 위치한 골목은 메인 골목에서도 한참 떨어진 곳이라 월세 100만원, 많아야 120만원 정도”라고 말했다.
안씨는 다른 동네로 매장을 옮길까 고민도 해봤다. 그러나 인테리어 투자 비용, 주차 방법, 주민 민원 대처, 매장내 동선 세팅 등 지난 5년간 해결해놓은 것들을 다시 처음부터 해야한다는 것 자체가 큰 손실이었다. 게다가 안씨막걸리의 직원들(5명)도 효율적인 출퇴근을 위해 경리단길에 이사를 와서 살고 있는 상태였다. 이 공간에서 지난 5년 동안 쌓아온 손님들의 추억을 지킬 수 없다는 아쉬움도 컸다.
안씨와 건물주는 임대료에 대한 타협을 하지 못했고, 결국 건물주는 매장을 비워달라며 명도 소송을 걸어왔다. 현재 안씨와 건물주는 법원의 조정 절차를 밟고 있는 중이다. “우리 가게는 대중교통 뿐 아니라 자동차로도 오기 힘들 정도로 구불구불한 골목 깊숙히 있다. 여기라면 임대료가 오르지 않아 긴 호흡으로 장사할 수 있겠다란 생각으로 자리를 잡았다. 부동산 가격의 변동성이 이렇게 큰 건 장기적으론 건물주에게조차 도움되지 않는다. 눈치게임, 한탕주의가 만연하게 되기 때문이다. 일본처럼 대를 이어 50년, 100년 가는 가게는 커녕 5년도 버티기 힘든 게 현실이다. 우리 사회에도 오랜 동안 한 자리를 지키는 가게가 많아졌으면 좋겠고. 건물주보다 창업가가 더 존경 받는 사회가 됐으면 좋겠다.” 안씨의 말이다.
불편하지만 경리단길 갔던 이유
경리단길은 상권으로서는 좋은 입지가 아니다. 지하철역에서 거리가 먼 데다 언덕이고, 길도 좁기 때문이다. 경리단길은 이태원 상권의 임대료가 비싸지면서 옮겨간 위성 상권이었다. 이런 불편함을 무릅쓰고도 경리단길에 찾아가는 손님들이 많았던 이유는 자신만의 고유한 색깔과 콘텐츠를 가진 가게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상권분석 전문가인 김영준씨는 “상권을 평가할 때는 유동인구를 창출할 수 있는 인프라를 본다. 교통이 편리한지, 직장이 많은지, 주거지역인지 등이다. 그런 점에서 경리단길은 해당되는 점이 하나도 없고 나쁜 조건이다. 이태원 중심부에 있던 사람들이 임대료가 저렴한 곳을 찾아 자리 잡은 곳이 경리단길”이라고 말했다.
경리단길의 인기엔 수제맥주도 한 몫을 했다. 경리단길이 형성된 초창기부터 ‘맥파이’와 ‘더부스’라는 수제 맥주 전문점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또 ‘우리슈퍼’에서도 200여종에 이르는 수제 병맥주를 팔고 있었다. 당시엔 외국인 손님이나 소수의 맥주 매니아 정도만 수제맥주를 찾았다. 그러나 몇년 사이 수제 맥주 붐이 불면서 경리단길은 수제맥주의 성지가 됐다. 또 아기자기한 특색을 가진 카페, 내공을 가진 음식점들도 많이 생기면서 더욱 인기를 끌게 됐다.
경리단길의 임대료가 치솟기 시작했다. 서울시 상권분석서비스가 지난해 분석한 조사를 보면, 이태원역 주변 임대료는 2015년부터 2017년까지 10.2%나 올랐다. 서울시 평균(1.8%)보다 6배 높은 수준이다. 높은 임대료를 감당할 수 없던 가게 주인들은 경리단길을 떠났다. 한국감정원에 따르면 지난해 4분기 이태원 상권의 중대형상가 공실률은 21.6%로 서울 상가 공실률(7%)의 세 배에 달했다.
최근 경리단길에서 카페를 하다가 폐업한 이아무개(32)씨는 “임대료가 200만원이면 월 매출 2000만원을 올려야 한다”며 “주말에만 사람들이 찾아오는 경리단길에서 어떤 가게가 월 2000만원씩 매출을 올릴 수 있겠나. 결국 떠날 수 밖에 없다”고 말했다.
젠트리피케이션으로 상권이 몰락하는 것은 이제 하나의 ‘패턴’이 되고 있다. 서울 종로구 삼청동은 북촌, 인사동과 함께 해외 관광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던 곳이지만 과도한 임대료 부담을 견디지 못한 상인이 떠나면서 2016년부터 내리막길을 걸었다. 근본적인 해결책이 마련되지 않으면 최근 한창 뜨고 있는 서울의 익선동(종로구), 성수동(성동구), 망원동(마포구), 연남동(마포구) 역시 경리단길이나 삼청동을 따라갈지 모른다.
정부도 젠트리피케이션 현상을 해소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지난해 9월, 상가건물 임대차 보호법’이 개정안이 국회에서 통과됐다. 임차인의 계약갱신요구권 행사기간이 기존 5년에서 10년으로 연장됐고, 권리금 회수 보호 기간도 3개월에서 6개월로 확대했다. 다만 법 통과 이전에 맺은 계약에는 소급 적용되지 않는다. 그러나 임대료 인상률 상한을 제한하는 것이 근본적 해결책이 되진 않는다는 주장도 나온다. 전문가들은 임차인의 매출에 비례해 임대료를 책정하는 방식이나 관리비를 소유자와 임차인이 공유하는 방식을 대안으로 들고 있다.
임대인 인식 바꿔야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경리단길의 몰락을 계기로 임대인의 인식을 개선하는 것이라는 지적도 있다. “옛날이라면 상권은 쉽게 가라앉을 일이 없었다. 전통적인 상권들은 인프라의 집중으로 형성된 곳들이 많다. 그런데 2000년대 이후의 신흥 상권은 소프트웨어적인 장점으로 뜬 경우가 많다. 지역이 창출할 수 있는 가치 이상의 임대료를 매기면 소프트웨어가 빠져나가고 무너질 수 밖에 없다. 상권이나 상가 가치를 잘 측정해야 한다. 임차인이 무조건 약자나 피해자는 아니다. 양자가 장기적인 측면에서 비지니스를 보고 다시 생각해봐야할 시점이다.”(김영준)
임대인과 임차인이 상생을 도모하는 사례도 있다. 성수동은 지난 2015년 10월부터 젠트리피케이션 방지를 위한 시범구역을 선정하고 임대인과 임차인 간 상생협약을 추진했다. 임대료를 현실적 수준으로 조정하겠다는 내용이었다. 그 결과 2017년 하반기에 임대차 계약을 갱신한 업체 64곳 중에 50곳이 임대료를 올리지 않고 재계약을 맺었다. 2017년 하반기 상가임대료(보증금 제외) 평균 인상률은 4.5%로 2016년 하반기 18.6% 대비 14.1%포인트 하락했다.
좋아하는 음식점이 없어진 경험이 누구나 한번쯤 있을 것이다. 장사가 너무 잘됐는데, 왜 없어졌나 알아보면 임대료 인상을 견디지 못하고 떠난 경우가 대부분이다. 좋아하는 곳을 지키려면 장사가 잘 되야 하는 게 아니라 ‘적당히’ 잘 되길 바라야 하는 시대다. 우리나라에서 10년을 넘어 100년 가는 가게란 이룰 수 없는 꿈일까.
신지민 기자 godjimin@hani.co.kr
경리단길 초입에 붙어있는 설명문. ‘개성이 넘치는 식당과 카페의 다양하고 독특한 먹거리가 유명한 문화와 젊음의 공간’이라고 써있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