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 주> 올해는 3·1운동과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입니다. 역사적인 해를 맞아 <한겨레>는 독자 여러분을 100년 전인 기미년(1919)의 오늘로 초대하려 합니다. 살아 숨 쉬는 독립운동가, 우리를 닮은 장삼이사들을 함께 만나고 오늘의 역사를 닮은 어제의 역사를 함께 써나가려 합니다. <한겨레>와 함께 기미년 1919년으로 시간여행을 떠날 준비, 되셨습니까?
이승만 국무총리 추대를 강하게 비판한 신채호. <한겨레> 자료사진
임시정부 수립 과정에선 정당론과 정부론, 국내파와 국외파의 갈등 못지않게 국무총리 선출을 둘러싼 내홍도 치열했다고 한다. 사실상의 식민지배인 위임통치를 미국 대통령 윌슨에게 청원한 이승만(44) 박사를 임시정부의 수반으로 앉힐 수 없다는 거센 비판이 제기된 것이다.
10일 밤, 중국 상해 불란서 조계지에서 열린 임정 수립 대표자 회의에서 참석자들은 국호를 ‘대한민국’, 관제를 총리제로 택한 뒤 국무총리 인선에 착수했다. 먼저 일본 조도전대학 출신의 신석우(25)씨가 한성임시정부 국무총리로 선출된 이 박사를 국무총리로 뽑자고 제안하였다. 이때 무장독립운동을 벌여온 이회영, 신채호(39), 박용만(38) 등의 인사들이 반대 의사를 피력하고 나섰다. 특히 독립운동단체인 ‘동제사’ 출신의 신채호씨가 “이승만은 위임통치를 제창하던 자이므로 국무총리로 신임키 불능하다”며 “이승만은 이완용보다 더 큰 역적이다. 이완용은 있는 나라를 팔아먹었지만, 이승만은 아직 나라를 찾기도 전에 팔아먹은 놈”이라고 강하게 비난하였다. 박용만은 이승만을 미국 하와이에 정착하도록 도와준 인물로 한때 이승만과 의형제를 맺기도 했다.
한때 이승만과 의형제를 맺었지만 반이승만 노선에 앞장서게 된 박용만. <한겨레> 자료사진
이들의 거센 항의에 장내는 순간 정적이 흘렀다. 이윽고 조소앙(32)씨가 절충안을 내놓았다. 후보자 3인을 추천하여 투표하자는 의견이 그것이었다. 이 박사와 함께 미주지역 독립운동의 거물로 꼽힌 안창호(43)씨와 민족진영의 어른 이동녕(50) 선생 등 3인이 거론되었으나 결과는 ‘이승만 총리’였다. 윌슨 대통령 등 미국 정치권과의 학연과 남다른 인지도, 참석자의 절반 이상이 이 박사와 같은 기호 출신이었던 게 영향을 미친 것으로 풀이된다. 이 박사가 총리로 선출되자 반대파 3인은 회의 장소를 박차고 나가버렸다고 한다.
앞선 3월3일, 이 박사는 미국 윌슨 대통령에게 조선을 ‘위임통치’하여 달라는 청원서를 제출한 바 있다. 비록 “조선의 완전한 독립을 보장한다”는 단서를 달기는 하였으나 “조선을 국제연맹의 위임통치 아래에 두는 조치” 등의 내용 때문에 식민통치를 자처했다는 비판이 제기돼왔다. 이 박사의 위임통치론이 임정 수립 과정에서 자격 논란으로 비화한 셈이다.
이 박사가 임시정부의 초대 총리로 추대되었다는 사실은, 외교독립론의 기대가 만연한 상해에서 아직 위임통치 청원 문제는 큰 논란거리로 부각되지 못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러나 외세 의존적 태도 등과 더불어 군주적 권위의식으로 충만한 이 박사가 민주공화제를 표방한 임시정부의 초대 대표가 되면서, 임정 내 갈등의 불씨가 재점화될 가능성도 적지 않다. 이 박사는 현재 미국에 머물고 있다.
△참고문헌 오영섭, ‘대한민국임시정부 초기 위임통치 청원 논쟁’(한국독립운동사연구·2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