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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김원봉과 김구 ‘한식구’ 된 임정…좌우 ‘통합의 역사’ 열다

등록 2019-04-11 07:31수정 2019-04-11 11:40

[임시정부 100돌] 3·1운동부터 1942년 통일의회까지
대한민국임시정부는 1942년 중국 충칭에서 비로소 ‘좌우합작’의 통합정부를 이뤘다. 우파이자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주축인 한국독립당이 꾸려온 임시의정원에 그해 보선을 계기로 좌파인 조선민족혁명당과 조선민족해방동맹, 조선혁명자연맹(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이 진출했다. 맨앞줄 왼쪽 네번째부터 한국독립당 소속인 홍진 임시의정원 의장, 김구 임시정부 주석. 앞줄 오른쪽 끝에 앉은 이가 조선민족혁명당의 김원봉이다. 좌우를 망라한 통합의회를 구성한 만큼 임시의정원 의원 46인이 모여 기념사진을 촬영했다. 국사편찬위원회.
대한민국임시정부는 1942년 중국 충칭에서 비로소 ‘좌우합작’의 통합정부를 이뤘다. 우파이자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주축인 한국독립당이 꾸려온 임시의정원에 그해 보선을 계기로 좌파인 조선민족혁명당과 조선민족해방동맹, 조선혁명자연맹(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이 진출했다. 맨앞줄 왼쪽 네번째부터 한국독립당 소속인 홍진 임시의정원 의장, 김구 임시정부 주석. 앞줄 오른쪽 끝에 앉은 이가 조선민족혁명당의 김원봉이다. 좌우를 망라한 통합의회를 구성한 만큼 임시의정원 의원 46인이 모여 기념사진을 촬영했다. 국사편찬위원회.
아열대 기후 탓에 연간 후텁지근한 중국 충칭에 선선한 바람이 불기 시작하는 가을이었다. 1942년 10월25일 아침, 충칭의 대한민국임시정부 청사에도 오랜만에 무거운 공기를 깨고 시원한 미풍이 드는 듯했다. 대한민국 임시의정원의 제34회 회의 개원식이 열리는 날이었다. 국기에 대한 경례와 애국가 제창 등의 절차가 지나자 한국독립당(한독당) 소속인 김구 임시정부 주석이 입을 뗐다.

“나는 본래 말주변이 없기 때문에, 나의 마음 가운데에 있는 말을, 다 표현해 낼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오늘의 이 의회가 성왕을 이루게 되어, 마음속, 진심으로 기쁨을 이기지 못하는 바입니다. 우리 운동은 삼일운동 이래, 많은 분열 상태로 오늘 본지에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부르짖고 있는 통일 문제는 그리 간단한 문제는 아닙니다. 이것은 우리가 정성으로 임무를 다하는 데서 해결될 것입니다.”

백범이 이처럼 감격에 찬 소회를 밝힌 데는 이유가 있다. 이날 회의는 그간 임시정부를 배척했던 좌파 정당들이 임시정부 합류를 결정하고 보궐선거를 통해 임시의정원에 등원해 진행한 첫 회의였기 때문이다. 백범의 인사말에, 한독당 의원 조소앙이 답사를 내놨다. “과거 무수한 방법의 대립이 이 의회로서 완전 합일되었다. 과거 무수한 단체의 대립이 한국 임시의정원으로 완전 통일되었다. 과거 각 당파의 대립이 의정원으로부터 완전 통일되었다.” 조소앙은 이때 언젠가 쑨원의 아들이자 그 자신도 정치인인 쑨커가 한국 독립운동의 정파 다툼을 조롱하며 했던 말을 떠올렸을지 모른다. “너희 사람들은 왜 뭉치지 못하느냐.”

사회주의가 국제사회에서 중요한 이데올로기로 부상하면서 좌우로 나뉜 한국 독립운동 진영은 20여년 동안 꾸준히 ‘통합’ 시도가 있었다. 1923년 중국 상하이에서 전개된 국민대표회의가 시발점이었다. 3·1운동 이후 급하게 출범한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이승만 리더십’의 한계와 내부 파벌 다툼으로 1921년 이동휘 국무총리가 사임한 데 이어 김규식·안창호까지 국무위원을 사임하며 위상이 크게 흔들렸다. 이에 신채호·김창숙 등의 요청으로 1923년 1~6월 74차례 국외 각지의 독립운동 세력이 참가하는 국민대표회의가 열렸으나 아무런 성과 없이 종료됐다. 안 하느니만 못한 논쟁 뒤에 여러 운동가는 실망감을 느껴 떠났고 독립운동은 사분오열됐다.

좌우 합작의 시도는 끊이지 않았다. 1926년 도산 안창호는 “주의 여하를 불문하고 단합된 통일전선을 결성하자”며 ‘민족대당’ 결성을 독립운동가들에게 촉구했다. ‘민족유일당 운동’이다. 도산은 베이징 독립운동 세력의 대표 격인 원세훈을 만나 이 문제를 논의하고 중국의 각 지역에 이를 위한 조직을 꾸렸다. 하지만 이런 시도 역시 1929년 좌절된다. 강대국들에 둘러싸인 한국의 독립운동가들은 늘 국제정세를 살피고 기회를 노릴 수밖에 없었는데, 중국의 ‘국공 합작’이라는 기회를 노리고 전개된 민족유일당 운동 앞에 ‘국공 내전’이라는 파국이 찾아왔기 때문이다.

3·1운동 이후 분열했지만…
이승만 지도력 부재·파벌 다툼
이동휘 국무총리 사임에 이어
김규식·안창호 국무위원 사임
독립운동가들 떠나 사분오열

1942년 마침내 통합의 길로…
한독당 건국강령에 삼균주의 명시
좌우 합작 길 열자 좌파 계열 합류
명실상부한 ‘통일전선 정부’ 구성
“1942년 좌우통합, 보기 드문 성공”

수십년 타향을 헤매던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위원들은 조국 독립을 맞아 1945년 환국했지만 미 군정에 의해 ‘개인 자격’으로 귀국해야 했다. 1진과 2진으로 나눠 환국한 임시정부 요인들이 그해 12월3일 2진 귀국을 기념해 촬영한 사진. 첫째줄 왼쪽부터 장건상, 조완구, 이시영, 김구, 김규식, 조소앙, 신익희, 조성환. 둘째줄 왼쪽부터 류진동, 황학수, 성주식, 김성숙, 김상덕, 유림, 조경한, 김붕준, 유동열, 김원봉, 최동오. 국사편찬위원회.
수십년 타향을 헤매던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위원들은 조국 독립을 맞아 1945년 환국했지만 미 군정에 의해 ‘개인 자격’으로 귀국해야 했다. 1진과 2진으로 나눠 환국한 임시정부 요인들이 그해 12월3일 2진 귀국을 기념해 촬영한 사진. 첫째줄 왼쪽부터 장건상, 조완구, 이시영, 김구, 김규식, 조소앙, 신익희, 조성환. 둘째줄 왼쪽부터 류진동, 황학수, 성주식, 김성숙, 김상덕, 유림, 조경한, 김붕준, 유동열, 김원봉, 최동오. 국사편찬위원회.

기존에 우경화됐던 임시정부에 비판적인 태도를 보이며 일절 관여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견지해온 좌파계열 조선민족혁명당(민혁당)이 임시정부 참여를 결정한 것은 국제정세가 변화하고 있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민혁당은 1941년 12월 당 제6차 대회 선언문에서 “여러 민주국과 반파시스트 집단이 이미 파시스트 집단과 혈전을 전개”하고 있는 점을 임시정부 참여의 주요 원인으로 꼽았다. 현실적으로 유럽에서 폴란드 등 반파시스트 망명정부가 강대국들의 정부 승인과 원조를 받고 있는 터였으므로 노선 차를 좁히고 민족적 역량을 결집해볼 만하다는 판단이었다. 한독당은 1941년 환국 뒤 국가 상을 담은 ‘대한민국 건국강령’에 정치·경제·교육에서 모든 국민이 균등한 권리를 가지는 삼균주의를 명시함으로써 좌파 세력의 합작 가능성을 열어뒀다. 잘 알려진 바대로 조소앙이 기초한 건국강령에는 △대기업의 국영과 중소기업의 사영 △일제와 민족반역자의 생산시설 몰수와 국유화 △몰수한 생산시설의 국영·공영화 등의 내용이 담겼다.

그리하여 ‘통일의회’라고도 불리는 제34회 임시의정원에는 보궐선거를 통해 좌파계열을 포함한 23명의 신입 의원이 당선돼 들어왔다. 정당별 분포를 보면 ‘여당’인 한독당 6명 외에 민혁당 8명, 조선민족해방동맹 2명, 조선혁명자연맹 2명, 한국독립당 통일동지회 2명, 광복군 2명, 기타 1명 등이다. 민혁당 소속의 당선자에는 당시 좌파 운동가 가운데 핵심인 약산 김원봉도 끼어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선거 뒤에 ‘광복군’으로 당선된 한지성·이정호, 한국독립당 통일동지회 소속의 손두환·김철남도 민혁당에 입당하면서 민혁당은 크게 세를 불리게 된다. 무정부주의 성향의 조선혁명자연맹에선 유림과 류자명이, 역시 사회주의 계열인 조선민족해방동맹에선 김성숙과 김재호가 당선됐다. 좌우연합 의회일 뿐 아니라 명실상부한 여야 구도가 형성된 것이다.

더 나아가 광복을 한해 앞둔 1944년 4월 임시정부는 직제를 개편해 국무위원을 6~10인에서 8~14인으로 보강했다. 주석 유고 시에 직권을 대행하는 부주석을 두었으며 ‘연립내각’을 실시하였다. 한독당 소속인 김구 주석 곁에 민혁당의 김규식을 부주석으로 선임했고, 국무위원으로는 좌익계열 인사인 김원봉·김성숙·유림 등을 두루 선임하였다. 민혁당 소속 4명이 국무위원이 됐는데 조선의용대를 이끌었던 김원봉은 임시정부의 군무부장이 되었다. 종전의 한독당 일색의 국무위원회를 넘어 임시정부는 명실상부한 통일전선 정부를 이루게 되었다.

정부 수립 초기부터 줄곧 비판받아왔던 임시정부의 정통성 문제와 보수성도 광복 직전이 되어서야 극복할 수 있었다. 백범은 그해 5월15일 각 당국자들의 취임식에서 이렇게 당부하기도 했다. “이번 의회는 민주 정신을 발휘하여 우리 독립운동사상의 신기록을 창조하였습니다. 이것은 우리 한국 3천만 민중이 열렬하게 환영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또 동맹국 그중에도 중국 방면에서 기뻐하고 다행하게 생각하는 일이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1945년 갑작스럽게 닥친 광복은 좌우를 다시 갈라놓았다. 수십년 광야를 떠돌며 독립운동에 나섰던 임시정부 요인들은 그해 11월 초라한 모습으로 귀국했다. 미 군정은 중국과 충칭 임시정부의 밀착된 관계를 우려해 정부 요인이 아닌 ‘개인 자격’으로 환국할 것을 강요했다. 주석 김구를 비롯한 15명이 1진으로 11월23일에 환국했다. 외무부장 조소앙 등이 2진으로 12월1일 귀국했다.

충칭 시기 임시정부는 건국강령에서 본토에 진격해 일제를 몰아내고 국제적 승인을 이뤄 독립운동을 완성하며(복국) 삼균주의를 이념으로 삼아 좌도 우도 아닌 새로운 세상을 만들고자(건국) 했다. 가까스로 통합을 이룬 좌우연합의 정부는 그 발판이 될 터였다. 그러나 정부 승인을 받지 못한 채 ‘개인’으로 고국에 돌아온 운동가들은 환국한 뒤에 잘 알려진 대로 모두 흩어졌다. 미군정 비호 아래 우익 세력의 결집으로, 임시정부의 환국 전후엔 이미 좌우의 대립이 팽팽해진 터였다. 그 결과 “과거 무수한 방법의 대립이 이 의회로서 완전 합일되었다”던 조소앙의 선언은 임시정부가 수립된 지 100년이 지나도 지켜지지 않은 채 남과 북 사이에서, 남과 남 사이에서 맴돌고 있다.

엄지원 기자 umkij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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