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시정부 100돌
기고 ㅣ 임시정부 수립 의의와 성과
기고 ㅣ 임시정부 수립 의의와 성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이했다. 사진은 서울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에 전시되어 있는 독립운동가 4800여명의 수형기록. 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로 함”
세계 처음으로 헌법에 명문화
모든 인민의 평등·자유권 명시
선거·피선거권도 남녀차별 없애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수립은 대체로 다음과 같은 의의를 가진다. 첫째, 임시정부 수립은 한국이 ‘제국’에서 ‘민국’으로 가는 결정적 계기를 만들었다. 4월11일 임시의정원이 채택한 임시헌장 제1조는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로 함”이다. 이는 독립 이후에 새로 세워야 할 나라는 전제군주국이나 입헌군주국이 아닌 공화국, 그것도 민주공화국이 되어야 한다는 선언이었다. 대한제국의 마지막 시기였던 1905~1910년에는 입헌군주국을 지향하는 이들이 많았다. 그러나 1910년 대한제국이 일본에 병합되고, 1919년 고종이 서거함으로써 그런 주장은 거의 사라졌다. 또 1911년 중국의 신해혁명, 1917년 러시아혁명, 1918년 독일혁명으로 황제가 다스리던 제국들이 다 무너지고 공화국 수립이 세계의 대세가 되었다. 이에 국외의 독립운동가들은 이제는 공화국을 세워 새 출발을 해야 한다는 쪽으로 의견을 모으고 있었다. 국내에서도 3·1운동에 참여했던 민족대표, 청년 학생들이 대부분 공화제를 선호하고 있었다. 임시헌장은 그러한 안팎의 여론을 반영한 것이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당시 세계 어느 나라 헌법에도 없었던 민주공화제를 임시헌장에 규정했다. 임시헌장은 입법부인 임시의정원 제1차 회의에서 제정됐다. 국사편찬위원회 제공
독립 뒤 조직·정책 수립 준비 길터 카이로 선언에 ‘한국독립 명기’ 등
외교전 펼치며 독립운동 상징으로
광복군 창설로 직속 무장부대 갖춰
삼균주의 건국강령 ‘제헌헌법 토대’ 둘째, 임시정부 수립은 독립운동의 지휘부가 등장했다는 의미를 갖는다. 당시 독립운동은 국내뿐만 아니라 중국(상하이·베이징·만주), 러시아, 미주 등 각지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또 무장투쟁, 외교운동, 실력양성 등 다양한 노선이 있었다. 따라서 여러 갈래의 독립운동을 총지휘할 컨트롤타워가 필요했다. 많은 독립운동가는 임시정부가 그 역할을 해줄 것을 기대하였다. 그러나 아쉽게도 임정에는 만주의 무장투쟁이나 국내외의 사회주의 운동까지 지휘하거나 통제할 능력이 없었다. 셋째, 임시정부 수립을 통해 독립 이후 필요한 여러 정책을 수립하고 정부와 의회 조직을 준비할 수 있었다. 임정은 1919년 1월 개막된 파리강화회의에서 한국이 독립을 얻을 수도 있다고 기대해 5월 폐막에 앞서 4월에 서둘러 수립된 것이었지만, 파리강화회의는 한국인들을 철저히 외면했다. 그러나 세계정세는 수시로 변화하는 것이어서 언제 한국에 독립의 기회가 올지는 아무도 몰랐다. 1920년대 후반부터 일본과 미국은 만주의 이권을 둘러싸고 대립하기 시작했고, 따라서 많은 이들이 한국의 독립 문제는 결국 미-일 간의 전쟁으로 결론이 날 것으로 전망했다. 그래서 독립 이후를 대비하여 임시정부와 임시의정원을 유지하면서 여러 정책을 구상해 두는 것은 꼭 필요한 일이었다. 그러면 실제로 임시정부는 어떤 활동을 했고 어떤 업적을 세웠을까. 또 임정의 활동에는 어떤 한계가 있었을까. 임정의 가장 중요한 활동은 역시 외교였다. 임정은 파리강화회의(1919년) 이후에도 워싱턴회의(1921년), 카이로회담(1943년) 등에 대비한 여러 외교활동을 전개했다. 특히 카이로회담을 앞두고, 김구 등 임정 지도자들은 중국 국민당 정부 주석 장제스를 만나 카이로 선언에 반드시 ‘한국의 독립’ 문구를 넣어주도록 요청했고, 실제로 카이로 선언에는 비록 ‘일정한 과정을 거친 후’라는 단서가 붙기는 했지만 ‘한국의 독립’이 명기되었다. 임정은 독립운동 세력의 구심점이 되고자 노력했다. 초기에는 미주의 안창호와 이승만, 러시아의 이동휘, 상하이의 이동녕·이시영 등 주요 세력의 대표자들이 임정에 참여하였다. 이로써 임정은 독립운동 세력의 구심점 역할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1920년대 중반 이후 이승만·이동휘·안창호 등이 임정을 떠나면서 임정은 구심점 구실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임정은 해방을 눈앞에 둔 시기에 다시 민족주의 세력, 사회주의 세력, 아나키스트 세력 등이 참여한 좌우합작 정부를 구성할 수 있었다. 그러나 독립운동 과정에서 임정에 참여하지 않은 세력도 많았다. 국내외 사회주의 운동 세력은 대부분 임정에 참여하지 않았다. 또 만주의 무장투쟁 세력도 임정과 대체로 소원한 관계에 있다가 만주사변 이후 만주를 떠나 임정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임정은 초기부터 직속 무장부대를 두고자 했으나 여러 여건상 이를 실현하지 못했고, 1940년 충칭에서 광복군을 창설함으로써 처음으로 직속 무장부대를 둘 수 있었다. 그러나 광복군은 중국 정부의 지원과 통제를 받다 보니 직접 전투에 참여하지 못하고 후방에서 주로 선전활동을 펴야만 했다.
수십년 타향을 헤매던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위원들은 조국 독립을 맞아 1945년 환국했지만 미 군정에 의해 ‘개인 자격’으로 귀국해야 했다. 1진과 2진으로 나눠 환국한 임시정부 요인들이 그해 12월3일 2진 귀국을 기념해 촬영한 사진. 첫째줄 왼쪽부터 장건상, 조완구, 이시영, 김구, 김규식, 조소앙, 신익희, 조성환. 둘째줄 왼쪽부터 류진동, 황학수, 성주식, 김성숙, 김상덕, 유림, 조경한, 김붕준, 유동열, 김원봉, 최동오.
박찬승 한양대 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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