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역사왜곡처벌농성단이 25일 오후 서울 서초동 5·18 당시 특전사 작전참모였던 장세동씨 집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발포명령자 진상규명을 요구하며 함성을 지르고 있다. 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25일 오후 2시30분 서울 서초구에 있는 한 고급 아파트 단지 입구 앞. 35층짜리 아파트들이 촘촘히 들어선 이곳에 살고 있다는 누군가를 애타게 부르는 이들이 있었다.
“○○○동 ○○○호 장세동은 나와라!” “양민 대상 헬기 사격 장세동은 자백하라!”
이 소리에 지나가던 하굣길 초등학생이 엄마를 올려다보며 천진난만하게 물었다. “엄마, 장세동이 누구야?”
이날 장세동(83)씨의 이름을 세상에 소환한 이들은 5·18역사왜곡처벌농성단(5·18농성단)이다. 장씨는 1980년 광주에서 5·18 민주화운동이 일어났을 당시 공수특전사령부(특전사) 작전참모를 지냈고, 이후 전두환 정권에서 대통령 경호실장과 국가안전기획부장을 지낸 인물이다. 5·18 피해자와 유족들로 이뤄진 5·18농성단은 자유한국당 일부 의원들의 5·18 광주민주화운동 ‘왜곡 망언’에 항의하며 국회 앞에서 74일째 천막 농성 중이다. 또 매주 목요일을 5·18행동의 날로 정해 서울 서대문구 연희동 전두환씨 집 앞과 경기 과천시에 있는 전 특전사령관 정호용씨 집 앞 등을 찾아 집회를 열어왔다.
장세동씨가 2012년 열린 제1회 6.25 상기 안보마라톤 대회에서 출발 전 축하 테이프를 끊는 모습. 연합뉴스.
이날 4번째 5·18행동의 날을 맞아 5·18농성단이 장씨 집 앞에서 집회를 연 이유는 전씨의 최측근인 장씨가 5·18 당시 발포 명령자를 규명하는 데 핵심 인물이기 때문이다. 1980년 5월21일 오후 1~5시 옛 전남도청 앞 금남로 일대에서 공수부대원들의 집단 발포로 최소 54명의 시민이 총을 맞고 사망했지만, 누가 발포 명령을 내렸는지 지금까지 밝혀지지 않고 있다. 진실 규명을 위해서는 당시 보안사령관인 전두환씨가 공식 지휘체계를 무시하고 보안사나 특전사 등 비공식 지휘 라인을 작동했는지를 밝히는 게 중요하다. 이 과정에서 장씨가 특전사 안에서 사실상 전씨의 ‘입’ 역할을 했는지도 밝혀야 한다.
5·18역사왜곡처벌농성단이 25일 오후 서울 서초동 5·18 당시 특전사 작전참모였던 장세동씨 집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발포명령자 진상규명을 요구하고 있다. 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김종배 5·18농성단 대표는 “모든 광주 학살의 기획을 장세동이 했다고 알려져 있는데 그 역할에 견줘 훨씬 평가절하되어 있다. 장씨야말로 광주 학살의 전모를 밝히는데 가장 큰 증인”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날 집회에서 5·18농성단은 장씨에게 보내는 공개질의서를 읽어내려갔다. 5·18농성단은 장씨에게 ‘5·18 진압작전의 진실을 밝히라’고 요구하며 1980년 5월21일 집단발포 명령을 장씨가 기획하고 전씨가 명령했는지 등을 물었다. 또 “당신이 1980년 5월10일부터 5월27일까지 광주에 체류했다는 제보를 받았다”며 “그 기간 동안 공수부대에 실탄이 지급됐고 잔인한 무력진압이 자행됐다. 당시 전씨가 당신에게 하달한 특전사 광주진압작전의 실체가 무엇이냐”고 물었다. 이 공개질의서는 집회가 끝난 뒤 아파트 관리사무소 관계자에게 전달됐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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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집회에 참여한 5·18농성단 소속 구성주씨는 “집단 발포 명령자가 밝혀지면 전두환 재수사도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며 “역사 앞에서 반드시 단죄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5·18 당시 스물다섯살의 평범한 직장인이었던 구씨는 이후 시민군에 들어가 계엄군에 맞서 싸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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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진 기자
yjlee@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