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17일 발생한 ‘경남 진주 아파트 참사’ 희생자 합동분향소 모습. 김영동 기자 ydkim@hani.co.kr
지난달 17일 발생한 ‘경남 진주 아파트 참사’는 중증 정신질환을 앓고 있는 이들이 망상·환각 증상으로 인해 자신과 타인의 안전을 위협할 경우 작동해야 할 응급대응 체계에 큰 구멍이 있음을 드러냈다. 망상·환각 같이 일상이 어려운 증상을 일으킬 수 있는 대표적인 질환은 조현병·조울증 등이며, 국내에선 약 50만명이 중증 정신질환을 앓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참사 한달을 앞둔 15일 보건복지부는 지역 정신건강복지센터 인력 확충, 응급입원 및 급성기 치료 병상 확보 등을 담은 ‘중증 정신질환자 보호·재활 지원을 위한 우선 조치 방안’을 발표했다. 경찰관·119구급대원 요청으로 야간이나 주말에 현장에 나가 위험성 평가와 상담 등을 진행하는 전문요원들이 내년 중 전국 광역 정신건강복지센터에 배치된다. 지역사회에서 직접 환자를 만나 치료·복지 서비스를 연결하는 기초 정신건강복지센터 사례관리 인력을 2021년까지 785명 더 늘리고, 시군구마다 주민센터·정신건강복지센터·경찰·소방·의료기관 등이 참여하는 협의체를 구성하기로 했다.
하지만 일선 경찰·정신건강전문요원들은 이런 대책만으로 현재 응급대응 체계의 공백을 메우기 어렵다고 했다. 지난해 11월 복지부가 경찰청·소방청과 함께 마련한 ‘정신과적 응급상황에서의 현장대응 안내 2.0’을 보면, 자·타해 위험성 및 긴급성이 있을 경우 경찰은 응급입원 절차를 밟도록 돼 있다. 응급입원이란 자·타해 위험이 심각한 사람을 경찰이 데려가 의사 진단을 받은 뒤 3일간 입원시키는 제도다. 정신건강복지센터는 경찰 등에서 정신과적 판단을 필요로 할 때 협조해야 하고, 응급상황을 맞닥뜨릴 경우 경찰에 출동을 요청할 수 있다.
서울의 한 경찰은 진주 참사 이후 “마음만 무거워지고 달라진 건 별로 없다”고 했다. 민원에 ‘적극 대응하라’는 지시가 거듭 내려오지만 자·타해 위험이 명확하게 무엇인지, 다른 기관과 어떻게 협력해야 하는지 여전히 구체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그는 “정신건강복지센터 연락처를 알지만 평소 협력이 안 되다 보니 별다른 기대가 없다”며 “범죄를 저지르지 않은 정신질환 환자를 경찰이 왜 담당해야 하는지 이해가 안 되고, 중증 정신질환에 대한 교육도 받아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경찰이 협조를 요청하는 사례는 늘고 있지만 정신건강복지센터도 대응이 어렵긴 마찬가지다. 전준희 한국정신건강복지센터협회 회장은 “경찰 등이 진단과 보호를 요청하지만, 환자 이송엔 협조하지 않는 문제가 있다”며 “자·타해 위험이 높지 않음에도 민원 발생 등의 사유로 무조건 ‘행정입원을 시키라’는 요구도 많아졌다”고 전했다. 행정입원이란 의사나 정신건강전문요원이 자·타해 위험이 있는 사람을 발견한 경우 지자체장에게 보호를 요청하고, 의사 진단을 통해 최장 2주까지 입원시키는 제도이다. 울산의 한 정신건강전문요원도 “현장 상황을 기재하는 의뢰서 전달도 없이 전화로만 ‘위험하니 가보라’는 경우가 있는데, 공무원이 아닌 민간인인 우리만 가서는 현장 개입이 쉽지 않다”고 말했다.
응급대응 협력에서 엇박자가 나는 건 기관별로 어떤 역할을 맡아야 하는지 제대로 정립되지 않은 탓이다. 복지부와 경찰이 만든 응급대응 매뉴얼부터 내용이 달랐다. <한겨레>가 입수한 경찰 내부 문서에는 ‘자·타해 위험성이 있고 급박한 상황일 경우 행정입원 또는 응급입원을 진행하라’고 돼 있으나, 복지부 매뉴얼엔 행정입원 언급 없이 경찰이 응급입원 처리를 해야 한다고 쓰여 있다. 자·타해 위험 및 긴급성 판단 기준도 경찰 매뉴얼이 복지부가 제시한 기준에 견줘 덜 구체적이었다. 경찰청 관계자는 “두 문서상 표현이 다를 뿐 의미는 같다. 법에 근거해 경찰이 응급입원에 나서야 한다는 공문도 계속 내려보내고 있다”며 “우리로선 자·타해 위험성 판단이 어려운데 당장 도움받을 길이 없으니 현장 대응에 어려움이 많다”고 설명했다. 이날 정부 대책 발표도 범부처 차원이 아닌 복지부 홀로 진행했다. 시군구 협의체를 만든다 하더라도, 부처별 협력이 원할하지 않다면 공동 대응에 한계가 있을 수 밖에 없다.
경찰 내부 문서의 자·타해 위험 및 긴급성 판단 기준(왼쪽)과 복지부가 마련한 판단 기준(오른쪽). 경찰 문서에는 ‘자·타해 위험성이 있고 급박한 상황일 경우 행정입원 또는 응급입원을 진행하라’고 돼 있으나, 복지부 매뉴얼엔 행정입원 언급 없이 경찰이 응급입원 처리를 해야 한다고 쓰여 있다.
2012년부터 정신건강 서비스 전달체계 개선을 위한 시범사업을 진행해온 광주는 정신건강복지센터·경찰·주민센터·병원 간 협력이 비교적 잘되는 지역이다. 광주 지역 정신건강복지센터 관계자는 “어떻게든 서로 분절된 기관과 소통을 하려고 수년간 노력했다”고 강조했다. 그는 “센터 인력을 늘려도 우리가 할 수 없는 일이 있다”며 “위기 현장에 출동할 경우 경찰이 현장에 계속 머물러야 직원 안전도 보장할 수 있다”고 말했다.
진주 참사 이후 모두의 안전을 위해 강제입원이 불가피하다면 비용을 국가가 책임져야 한다는 지적도 많았다. 환자 본인이나 가족이 아닌 경찰·지자체장이 개입하는 응급 및 행정입원의 경우 누가 비용 부담을 할 것인지 그동안 명확하지 않았다. 복지부는 자·타해 위험이 있는 환자 가운데 ‘저소득층’엔 강제입원·외래치료 비용을 지원하겠다고 밝혔으나 구체적 대상이나 재원 마련 방안은 제시하지 않았다.
복지부는 내년부터 3년 동안 광역 지자체에 국비 예산을 지원하고 그만큼 지방비 예산을 합쳐 시·도별 여건에 따라 정책을 마련하는 ‘통합정신건강증진사업’을 통해 광주 시범사업 성과를 전국에 확산시킨다는 계획이다. 광주의 경우 전남대학교 병원 등 의료진과 지역사회가 다른 곳에 견줘 ‘가깝다’는 특성이 있으며 지난 6년 동안 국비·지방비를 합쳐 해마다 100억원 안팎의 예산을 확보해 사업을 진행해왔다. 지역별로 재정 여건이나 의료·재활시설 인프라 차이가 큰 상황에서, 지방 정부에 사업을 맡기는 것만으론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지적이다. 장기입원을 줄이는 대신 병원 안팎 급성기 치료 강화를 위한 건강보험·의료급여 수가 개편 등 구체적인 정책 설계가 뒷받침되지 않으면 지역사회에서 정신장애인이 살아갈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박현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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