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사회 사회일반

‘좋은 일’은 없습니다만, 좋은 일은 많습니다

등록 2019-05-26 14:14수정 2019-05-26 14:42

[토요판] 이런 홀로

주변의 기혼자들 툭 던지는
“근데 좋은 일은 없어?”
비혼자는 공백기 사람인가

지난 반년 연애, 썸, 선 없어도
글 쓰고 월급 오르고 악기도 배운
좋은 일 정말 많았던 시간
오랜만에 연락이 닿아 서로 얼마나 잘 있고 못 있는지 정보를 교환하고 나면, 상대방에게서 그 얘기가 툭 나온다. “근데 좋은 일은 없니?” 방금까지 실컷 이야기한 내 근황이 갑자기 통편집을 당한 기분이 든다. 그들이 말하는 ‘좋은 일’은 결혼 소식이고, 나는 좋은 일이 없는 공백기의 사람인 것이다. 게티이미지뱅크
오랜만에 연락이 닿아 서로 얼마나 잘 있고 못 있는지 정보를 교환하고 나면, 상대방에게서 그 얘기가 툭 나온다. “근데 좋은 일은 없니?” 방금까지 실컷 이야기한 내 근황이 갑자기 통편집을 당한 기분이 든다. 그들이 말하는 ‘좋은 일’은 결혼 소식이고, 나는 좋은 일이 없는 공백기의 사람인 것이다. 게티이미지뱅크
요새 들어, 웃으면서 맞는 잔잔한 이별들에 꼭 같은 말들이 따라왔다. “○○씨, 좋은 일 생기면 연락해.” 이 다정하고 아련한 인사. 지난달, 3년을 같이 일한 상사가 회사를 옮겨갈 적에도 그 말을 들었다. ‘어… 좋은 일, 안 생길 것 같은데.’ 순간 이런 생각이 스쳤다. 그래도 맞잡고 있던 한 손을 힘차게 흔들며 농담을 했다. “좋은 일 생길 때까지는 연락하지 말라고요?” 그러자 상사가 내 어깨를 가볍게 치며 웃었다. “아이, 왜 그래. 좋은 일 금방 생기겠지.”

앞으로 보기 어려워지는 사람들만 내게 좋은 일이 생기길 빌어주는 것은 아니다. 사실 그 말을 제일 많이 듣는 건 일 년에 한두 번 안부를 묻는 사이가 된 사람들에게서다. 오랜만에 연락이 닿아 서로 얼마나 잘 있고 못 있는지 정보를 교환하고 나면, 상대방에게서 그 얘기가 툭 나온다. “근데 좋은 일은 없니?” 방금까지 실컷 이야기한 내 근황이 갑자기 통편집을 당한 기분이 든다. 정말 궁금했던 이야기는 그 얘기였나 싶어 조금 머쓱하기도 하다.

생각해보면 나를 자주 보는 사람들은 그런 질문을 하지 않는다. 내 생활에서 연애건 선이건 썸이건, 결혼으로 이어질 만한 키워드가 쏙 빠진 지 반년 정도 됐다. 그러나 다른 좋은 일은 많았다. 이렇게 글을 쓰기 시작했고, 그래서 내가 쓴 글을 읽어주는 독자가 생겼다. 월급도 올랐고, 주말 알바도 다시 시작했다. 우쿨렐레를 배운 지 1년 만에 합주 공연도 했다. 그러나 그런 일들은 다 그 ‘좋은 일’에는 끼지 못하는 게 요새 나는 슬프다. 내게도 그 ‘좋은 일’이 있기를 기대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기혼자다. 친인척과 친자의 세계에 함입되며 자연히 나와는 덜 친해진 사람들.

교집합을 추리는 사람들

평전 맨 뒤에 실리는 연보를 읽어 내려가다 보면, 그 인물의 행적과 행적 사이에 상당한 햇수가 생략된 걸 발견하는 때가 있다. ‘이 사람은 이때 뭘 했지?’ 하고 의아할 수도 있다. 내 변변찮은 인생을 굳이 연보로 정리해 본다면 어떨까. 아마 대학원 졸업과 취직 이후 몇 년이 그 공백이 될 것이다. 원룸으로 독립하고, 분갈이 달인이 되고, 사내 동호회에서 악기를 배우는 건 연보에 들어가지 않는다. 그럼 내 일상에 관한 글을 쓰게 되고, 매주 한 편씩 짧은 소설을 쓰게 된 것은 어떨까. 나는 넣을 것이다. 누가 뭐라 해도 넣을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애정과 선의를 가득 담은 목소리로 ‘아니야, 네 인생의 다음 줄은 결혼이야’ 하고 타이르듯 말해주는 사람들이 있다. 여간한 승진이나 출세를 하지 않는 이상, 그들에게 나는 좋은 일이 없는 공백기의 사람인 것이다. 그 말을 들을 때마다 마음에 이는 파문은 작아도 쓸쓸하다.

기혼자들이 내게 ‘좋은 일’을 물어올 때, 그 사람들과 내가 서로 삶을 기록하고 평가하는 기준이 달라졌다는 것을 깨닫는다. 새삼 우리가 서로의 삶에서 이미 멀어져 왔음을 실감한다. 아니면 앞으로 얼마나 멀어져 갈 것인지를 짐작해 보기도 한다. 삶의 우선순위가 달라지는 게 서운한 것은 아니다. 서로의 자잘한 기쁨과 슬픔에 자잘한 공감조차 표할 수 없는 사이가 되어 가는 것이 아쉬운 것이다.

결혼이란 게 진일보하여 통과할 인생의 관문일까. 어느 순간 결혼은 그저 커다란 집합의 조건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 그다음은 아이가 있느냐 없느냐로 조금 더 작은 교집합을 추릴 것이다(‘수포자’들이 대개 그러하듯, 나도 수학 참고서에서 집합 단원만은 좀 들여다봤다). 회사에서 소위 ‘이너서클’에 드는 이들은 모두 결혼과 출산과 육아의 궤적들을 앞서거니 뒤서거니 밟아가며 사는 사람들이다. 보수적인 조직일수록 그렇게 교집합의 교집합으로 추려진 사람들에게 더 많은 의사결정권을 주기 때문이다.

직장 밖에서도, 고운 체로 내리듯 삶이 찰찰히 구분되는 것은 마찬가지다. 결혼을 해서 가정을 이뤄야만 사회 안쪽으로 남는 구심점을 얻고, 그런 게 없으면 원심력이 실린 것처럼 점점 커뮤니티 바깥으로 떠밀려나는 느낌을 받는다. 부모가 자식에게, 상사가 부하에게, 선배가 후배에게, 친구가 친구에게, 심지어 치킨집 사장님이 단골손님에게도 자꾸만 ‘좋은 일’을 만들라고 강박하는 이유도 그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교집합의 교집합으로 파고든 그 가운데에 무엇이 있는 것일까. 내게 ‘좋은 일’을 빌어주는 사람들을 보며, 그들이 통과해 들어갔을 겹겹의 좁은 문을 생각해보려 할 뿐이다. 무슨 결핍이 있는지, 문제가 있는지 하며 문 바깥으로 거침없이 던지는 의심과 동정의 시선에 따끔 놀라기도 하면서.

방명록·축의금 없는 잔치

혼자 사는 사람의 삶에선 출세와 승진 말고 어떤 좋은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 우선은 이 즐거운 글쓰기를 계속할 것이다. 그리고 결혼과 출산을 뛰어넘어도 된다면, 육아(育兒) 대신 육아(育我)를 하며 지낼 것이다. 나 하나 들어앉힐 자리도 빠듯한 깜냥이 이제는 조금 더 넉넉했으면 싶어서다. 저마다의 자리에서 고군분투하는 서로의 삶을 거르고 빼는 것 없이 온전히 이해해줄 수 있는 사람으로 살고 싶다. 그러려면 지금 이 어중간한 여집합 자리가, 수련을 하기엔 제격일지 모른다는 생각도 든다.

매주 소설 쓰기 스터디 모임을 하러 흑석동에 간다. 근처 흑석시장에는 서로 자웅을 겨루는 순댓집이 몇 군데 있다. 한동안 도장 깨기 하듯 ‘혼순’(혼자 순대 먹기)을 하다, 그중 한 집의 간판에서 ‘잔치고기’라는 메뉴를 발견했다. 짐작이 될 듯 말 듯 해서 사장님께 여쭤봤더니, 잔치 때 사태를 푸짐하게 삶아서 내놓는 걸 잔치고기라고 불렀다고 한다.

그래서 그날 저녁 소설 쓰기 스터디를 마치고 맥주를 마시다가 술김에 “글 써서 잘 풀리면 잔치고기 맞춰서 대접하겠습니다” 하고 선언을 해버렸다. 서른 또 몇 해를 살아도 일천하기만 한 인생의 연보에 출세의 계기보다는, 잔치를 기록하고 싶다. 그 조촐한 잔치는 방명록도 없고 축의금도 없고, 대신 맛난 술과 고기와 김밥이 가득했다고.

‘좋은 일’은 없습니다만, 좋은 일은 있을 겁니다.

유주얼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사회 많이 보는 기사

전광훈 ‘지갑’ 6개 벌리고 극우집회…“연금 100만원 줍니다” 1.

전광훈 ‘지갑’ 6개 벌리고 극우집회…“연금 100만원 줍니다”

하늘이 영정 쓰다듬으며 “보고 싶어”…아빠는 부탁이 있습니다 2.

하늘이 영정 쓰다듬으며 “보고 싶어”…아빠는 부탁이 있습니다

‘윤석열 복귀’에 100만원 건 석동현…“이기든 지든 내겠다” 3.

‘윤석열 복귀’에 100만원 건 석동현…“이기든 지든 내겠다”

검찰, 김정숙 여사 ‘외유성 출장’ 허위 유포 배현진 불기소 4.

검찰, 김정숙 여사 ‘외유성 출장’ 허위 유포 배현진 불기소

‘장원영’이 꿈이던 하늘양 빈소에 아이브 근조화환 5.

‘장원영’이 꿈이던 하늘양 빈소에 아이브 근조화환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