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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편집국에서] 어머니의 600만원 사기사건 / 이순혁

등록 2019-05-26 15:57수정 2019-05-26 19:49

2004~5년께 일이다. 환갑을 목전에 두고 있던 어머니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아직 젊은데 놀면 뭐 하겠냐. 용돈이라도 벌어 쓸란다.” 원아 40~50명가량인 유치원 식당(주방)을 인수해 운영하시겠다는 얘기였다. “애들 간식이야 때맞춰 과일 좀 내놓으면 되고, 식사는 점심 한끼인데 밥과 국에 반찬은 두세가지면 되니 두어시간이면 뚝딱”이란다. 몇년 전까지만도 식당과 함바집을 운영하며 억척스럽게 살아오셨기에 ‘이젠 좀 쉬시지’란 생각도 들었지만, ‘밥장사’ 경력에 어울리는 적당한 소일거리를 찾으신 듯도 했다.

그런데 며칠 뒤 거의 우는 목소리로 전화가 걸려왔다. 설명은 이랬다. 고작 몇시간 일하는 것이라지만 유치원으로부터 운영권을 받아야 하는 만큼 정식 계약서를 써야 했단다. 시간 약속을 한 뒤 동생과 함께 원장실로 찾아가 1200만원에 계약을 맺고, 절반을 선수금으로 줬단다. 그런데 이튿날부터 연락두절. 며칠째 통화가 안 되자 직접 유치원을 찾아갔는데 웬걸, 원장실에는 엉뚱한 사람이 앉아 있었다. 유치원이 며칠 쉬는 틈을 타 사기꾼들이 원장인 체 돈을 받아 챙겨 잠적한 것이었다. 말로만 듣던, 눈 뜨고 코 베인 경험을 한 셈이었다. “그나저나 내 돈 600만원은 어떻게 한다니….”

명색이 경찰출입 기자 아들이었지만, 떨어져 있는 처지라 딱히 해드릴 수 있는 게 없었다. 동생에게 전화해 ‘어머니 좀 잘 달래드리고, 빨리 경찰서에 가서 신고해’라고 할밖에.

며칠 뒤 이번엔 동생이 전화를 걸어왔다. “경찰관이 날 보더니 ‘고소인 아니면 나가보라’는 거야. 그래서 ‘엄마가 연세도 있으시고 너무 놀라셔서 제가 옆에 있는 게 좋겠다. 그리고 사기꾼들한테 돈을 건네는 현장에 나도 있었다’고 얘기했는데, ‘당신이 변호사야?’라며 호통을 치더라고. 결국 사무실에서 쫓겨나 건물 입구에 서있는데, 얼마 있다가 그 경찰관이 나와 담배를 피우더라고. 나중에 엄마한테 들으니 몇가지 물어보더니 ‘잠깐만 기다리라’고 한 뒤 담배 피우러 나가더래.”

황당했지만, 이번에도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어찌 됐건 조사는 받았으니, 이제 기다려봐야지.” 그런데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경찰에서는 연락이 없었다. 15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식구들 모두 어머니 앞에서는 절대 입밖으로 꺼내지 않는 집안의 ‘흑역사’가 생각난 건, 최근 검·경 수사권 조정안이 화제가 되면서다. 범죄 신고를 하고 피해자 조사까지 받았건만, 왜 십년이 넘도록 아무런 답도 못 듣고 있어야 할까. 과연 누구 잘못인가.

우선 떠오르는 건 경찰이다. 당시도 수사권 조정이 이슈가 되던 때(노무현 정권)였지만, 가족이 겪은 일선 경찰의 수준은 한심했다. 지금이라고 얼마나 달라졌을까 싶기도 하다. 국민적 관심이 있는 사안에서야 경찰서장이 직접 찾아가 고개를 숙이고 예산 수백만원을 들여가며 좋은 숙소까지 얻어주지만, 일반 시민들이야 어디 이런 대우를 기대하겠는가.

그렇다면 검찰은? 요새 검찰이 그렇게도 강조하는 수사지휘권(수사종결권 포함)이 행사되긴 했을까? 차고 넘치는 사기사건에 누가 관심이나 가졌을지 싶다. 평소 수사지휘권을 제대로 행사해와 그 중요성을 국민이 체감하고 있었다면, 검찰의 수사지휘를 폐지하고 수사종결권까지 경찰에 일부 넘기는 수사권 조정안이 국민 다수의 지지를 받지는 못했을 것이다. 최근 논란이 됐던 황하나 사건에서도 검찰이 한 일이라곤, 경찰의 말도 안 되는 봐주기를 추인해준 게 전부였다. 그나마 경찰은 뒤늦게 자체 조사에 나서 당시 경찰관 두명을 입건(직무유기)했다지만, 검찰이 당시 수사지휘 과정을 살피거나 해당 검사에 어떤 조치를 했다는 얘기는 들려오지 않는다.

그래서일까. “견제와 균형이라는 민주주의 원리에 위배된다”는 검찰 주장도, “국민 뜻에 따라 입법이 이뤄질 것”이란 경찰 주장도 공허한 여운을 남길 뿐이다. ‘우리 조직이 어떻게 되네, 너희 조직이 어떻게 되네’라는 주장만 넘쳐날 뿐, 평범한 시민들이 현재 형사사법 절차에서 겪고 있는 현실은 말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 어머니 600만원은 어찌 됐는지, 둘 다 왜 답이 없냐는 얘기다.

순혁
정치사회 부에디터

hyu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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